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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순교자
작성자장병찬 쪽지 캡슐 작성일2019-09-30 조회수1,398 추천수1 반대(0) 신고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주 우리 하느님 찬미받으소서. 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지극히 거룩하시고 만군의 왕이시며 살아 계신 자비의 하느님, 오늘도 저에게 생명을 주셔서 감사하며 주님의 구속사업의 도구가 되게하시고 평온한 죽음을 맞게하소서.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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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 세상과 모든 가정에 주님의 은총이 넘치기를 기도드립니다 ] 

[ 긴 고해를 하시는 분들은 명동성당의 상설고해소를 방문하세요 ]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Ignatius) - 기념일(10월 17일)



1. 생 애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는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가 세운 안티오키아 교회의 2대(혹은 3대) 주교로서 110년에 로마의 꼴로세움(원형극장)에서 맹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는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서 선고를 받고 로마로 압송되어 가던 중에 7개의 서간을 쓰게 되었다. 안티오키아 도시는 제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우게 된 곳이며(사도 11,26),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출발하였던 선교의 중심지였다.

특히, 예루살렘이 멸망한 후부터 안티오키아 교회와 로마 교회는 초대교회 안에 두 기둥 역할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안티오키아의 주교가 체포되어 로마로 압송되어 간다는 소식은 전 교회의 슬픔이었다. 순교지를 향한 그의 여정이 스미르나에 도달하였을 때에 에페소, 마네시아, 뜨랄리아 교회 등에서 보내온 위문 사절단과 만나게 되었다. 이냐시오는 이곳에서 자기에게 사절단을 보낸 세 교회에게 감사의 마음이 담긴 권고의 편지를 각각 보내고, 순교를 당하게 될 로마 교회에도 편지를 보낸다. 다시 뜨로아스에 와서는 안티오키아에 박해가 멎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필라델피아 교회와 스미르나의 주교인 뽈리까르뽀에게 편지를 보낸다. 드디어 로마에 도착해서는 우리가 고전영화 쿼바디스 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맹수형으로 순교하였으며, 후에 신자들이 그의 유해를 안티오키아로 옮겨 안장하였다. 교회는 그의 순교일에 따라 10월 17일에 축일을 지낸다.


2. 일곱 서간

이냐시오가 보낸 7개의 서간들 중에서 6개는 교회 공동체(에페소, 마네시아, 뜨랄리아, 로마, 스미르나, 필라델피아)에 보낸 것이고, 1개는 뽈리까르뽀 주교 개인에게 보낸 것이다. 뽈리까르뽀 주교에게 보낸 편지는 선배 주교로서 후배 젊은 주교에게 사목자로서 지녀야 할 자세와 덕을 가르쳐주는 내용이고, 로마 교회에 보낸 서간 외에 다른 5개 교회 공동체에 보낸 서간들은 서로 그리스도 안에 일치하고 교회의 장상들에게 순명하며, 그릇된 이단들에 조심하라는 권고를 담고 있다. 특기할 점은 이냐시오가 최초로 그리스도 교회 공동체를 일컬어 "가톨릭 교회"(스미 8,2)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가톨릭"이란 단어는 '보편적'이란 뜻을 갖고 있다). 가톨릭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공동체로서 그 안에는 반드시 주교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로마 교회에 보낸 서간은 다른 여섯 서간과 성격을 달리한다. 이 서간에는 교회 장상들에 대한 순명의 권고나, 이단에 대한 경고가 없는 대신 이냐시오 자신의 신앙 자세와 주님께 대한 사랑, 그리고 승화된 인간의 신비적인 면을 감동적으로 고백하고 있다. 이 서간은 신학전망 24호(1974년 봄)에 우리나라 말로 번역되어 있다. 이냐시오의 서간들은 평상시에 보낸 편지가 아니라 순교지로 가는 여정에서 쓴 것들이기에 그 호소력이 강하며 우리에게 주는 감동이 매우 크다. 사실 이냐시오가 순교한 후에 편지를 받은 각 교회 뿐만 아니라 다른 교회들도 이 편지들을 서로 돌려가며 보거나 복사하여 보관하였기 때문에 교회 안에 널리 유포되었다.


3. 로마 교회에 대한 존경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로마 교회에 보낸 편지는 다른 여섯 편지와 그 성격을 달리한다. 
이냐시오는 원로주교로서 다른 교회들에게는 일치와 조화를 권고하고 있는 반면, 로마 교회에 대해서는 이런 권고를 감히 줄 수 없는 이유는, "나는 베드로와 바오로 같이 여러분에게 명령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이었고, 나는 한 죄수에 불과합니다"(로마4,3)라고 설명한다. 특히 로마 서간의 인사말에 나오는, "여러분의 교회는 로마 사람들의 지역 안에서 선도(先導)하며 하느님께 합당하고 존경, 흠숭, 성공, 순결을 지닌 복된 교회입니다. 사랑을 선도하며 그리스도의 법과 성부의 이름을 보유하였습니다"라는 표현에 대해 가톨릭 학자들과 개신교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있다.

이 논란은 로마 교회가 타 교회들에 대해 수위권(首位權)을 갖느냐 하는 미묘한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여기서 "선도하다"(prokathetai)라는 동사가 연이어 두 번 사용되고 있는데, 첫째 경우에는 '로마 교회가 로마제국의 교회들에 대해 수위권을 갖고 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둘째 경우에는 '사랑을 실천하는데 있어 다른교회들 보다 앞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으나, 다른 편지들에서 이냐시오는 "사랑"이란 단어를 교회와 동의어, 즉 '사랑의 공동체'라는 뜻으로 여러번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이 경우에도 '로마 교회가 다른 교회들을 선도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미묘한 표현상의 논쟁을 차치하고라도 이냐시오는 로마 교회에 대해, "여러분은 아무와도 비교될 수 없을 만큼 다른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로마3,1)라고 칭찬하고, 끝으로 주교를 잃게 된 시리아 교회를 위해 기도해주고 염려해 줄 것을 부탁하고 있다(로마9,1).

로마 교회에 대한 그의 이런한 존경심은 개인적인 겸손이나, 또는 로마가 로마제국의 수도였기 때문이 아니라 로마 교회 자체가 두 으뜸 사도들로부터 세워져 그 권위를 받은 교회라는 논리에서 나온다. 안티오키아 교회 역시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의 가르침을 받아 세워진 교회이지만, 로마 교회는 이 두 사도의 가르침이 그들의 순교로써 증거된 교회라는 점에서 다른 어떤 교회보다 권위를 인정받게 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로마의 끌레멘스 주교가 고린토 교회에 대해 취했던 태도를 이해할 수 있다.


4. 순교영성

우리는 안티오키아의 아냐시오 주교의 생애와 그가 맹수형의 선고를 받고 로마로 압송되어 가던 중에 쓴 7개 서간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가 지녔던 순교에 대한 열망은 여러 서간에 나타나 있다. 그는 순교를 그리스도께 대한 불붙는 사랑, 그분과의 완전한 일치로 표현하고 있다. [지금 왜 내가 목숨을 바치려는 것입니까? --- 내가 맹수들 가까이 있을 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 가까이 있는 것입니다. 그분의 수난에 동참하기 위하여 나는 모든 것을 참아낼 수 있는데 완전한 인간이 되신 그분께서 나에게 힘을 주시기 때문입니다](스미 4,2). [나는 아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완전한 자가 못됩니다. 그런데 지금에야 비로소 그분의 제자가 되기 시작했습니다](에페 3,1).

순교에 대한 그의 열망은 로마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더욱 생생히 표현되 있다. [불도 좋고 십자가도 좋고 맹수의 무리도 좋으며 사지를 짓이기고 찢어도 좋고 배를 갈라도 좋으며 팔다리를 자르고 온몸을 난도질 해도 좋습니다. 가장 잔인한 형벌도 좋습니다. 다만 내가 예수 그리스도께로 갈수만 있다면 말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쾌락도 지상의 모든 왕국도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 이 세상 극변까지를 다스리는 것보다 그리스도 예수와 일치하기 위해 죽는 것이 나에게는 더 좋습니다. 내가 찾고 있는 것은 우리를 위해 죽으신 바로 그분이며 내가 원하는 것은 우리를 위해 부활하신 바로 그분입니다. 내 출산의 때가 가까왔습니다.](로마 5,3-6,1)

여기서 순교는 영원한 생명을 위한 [출산]으로 표현되어 있다. 해산의 고통을 통해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기쁨을 얻듯이 이냐시오는 순교의 수난을 통해 하느님 안에 새로 태어나는 부활의 기쁨을 얻게된다는 확고한 믿음에서 자신의 순교일을 애타게 고대하고 있는 것이다. 이냐시오의 이러한 믿음에 따라 교회는 순교자들의 순교일을 [천상 탄일](dies natalis)이라고 부르고 순교일을 그들의 축일로 정하고 있다.

이냐시오 주교가 로마로 압송되어 온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로마교회는 훌륭한 지도자를 구해내기 위한 구명운동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이냐시오 주교는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이 좋은 기회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자기를 위한 어떠한 호의도 베풀지 말아달라고 간청한다. [보이는 것이거나 보이지 않는 것이거나 아무것도 내가 그리스도께 가는 길을 질투해서 방해하지 말 것입니다](로마 5,3). [나는 하느님께 도달할 수 있는 이런 기회를 다시는 얻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만일 침묵을 지켜준다면 그것보다 더 좋은 일을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나의 육신을 사랑하게 되면 나는 또 다시 달음질을 해야 합니다. 하느님께 제물로 바쳐지는 것 외에 아무것도 나를 위해 하지 마십시요. 제대는 준비되어 있습니다](로마 2,1-2).

그는 한시라도 빨리 순교하고 싶은 열망을 이렇게 표현한다. [나 때문에 마련된 맹수떼를 빨리 만나고 싶습니다. 그 맹수들이 나에게 성급히 달려들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맹수들이 겁을 먹어 달려들지 못한 경우가 있지만 나는 그들과는 달리 나를 급히 잡아 먹도록 유인하겠습니다. 그리고 맹수가 나를 거절하면 나는 강요하겠습니다](로마 5,2). [나는 더 살려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여기에 동의하면 내 원의는 이루어질 것입니다. 동의하십시오---. 나의 원의가 채워지도록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요](로마 8,1-2). 우리나라에도 수많은 순교자들이 있다. 우리는 성 이냐시오의 생생한 글을 통해 우리 순교자들이 지녔던 열정과 기쁨을 보는 듯하다.


5. 순교와 성체 신비

이냐시오가 자신의 순교를 성체의 신비와 연결시킨 대목은 주목할 만하다. [나를 맹수의 먹이가 되게 버려두십시오. 나는 그것을 통해서 하느님께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하느님의 밀입니다. 나는 맹수의 이빨에 갈려서 그리스도의 깨끗한 빵이 될 것입니다. 오히려 맹수들을 유인해서 그들이 나의 무덤이 되게 할 뿐 아니라 최후 잠듦에 있어 아무에게도 폐가 되지 않게 맹수들이 내 몸의 어떤 부분도 남겨두지 말도록 해주기 바랍니다. 세상이 내몸을 볼 수 없을 때,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다운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 맹수라는 도구를 통해서 내가 하느님께 봉헌된 희생이 될 수 있도록 그리스도께 기도해주십시요](로마 4,1-2).

여기서 이냐시오는 자기가 하느님의 밀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마치 밀이 맷돌에 갈려 가루가 되고 그 가루로 빵이 만들어 지듯이 자신의 몸이 맹수의 이빨에 갈려서 그리스도의 깨끗한 빵이 된다고 한다. 이것은 자신의 순교를 성체신비에 동참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의 교부학 자료 중에서)






순교에 대한 준비와 연습

(여진천 신부)



교회는 순교에 대한 준비와 연습이 필요하다고 가르칩니다. 배론신학교의 집주인이었던 장주기(요셉) 성인은 부지런히 성사를 받을 때에 "순교하여 예수님의 구속하신 은혜를 보답하기가 나의 소원입니다."고 하였습니다. 최양업 신부님의 복사였던 조화서(베드로) 성인은 형벌을 받은 후에 순교하러 가면서 "반 천당이나 오른 듯하니 매우 좋습니다"고 하면서, 함께 나가는 이들에게 순교를 권면하였습니다. 그의 아들 조윤호(요셉) 성인은 "아버지가 순교하러 가시는데, 나도 또한 같이 가 순교하겠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정문호(바르톨로메오) 성인은 순교하러 가면서 "우리가 천당 과거하러 가니 즐겁습니다"고 말하였습니다. 손자선(토마스) 성인은 배교를 강요당하자 "살기를 좋아하고 죽기를 싫어함은 인정(人情)의 떳떳한 일이오나, 저는 하늘과 땅의 대군(大君)을 섬기다가 이때를 당하여 주님을 위해 죽기를 좋아하고, 살기를 두려워합니다."고 하였습니다.

남명혁(다미아노) 성인은 배교하라는 말에 "천지의 주인이시며 창조주이신 위대한 하느님을 우리는 저버릴 수 없소"라고 하였습니다. 전경협(아가다) 성녀는 "뼈대가 없이 집이 서 있을 수 있습니까? 대들보가 한 집의 주된 재목이라면, 우리를 기르시는 하느님은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을 지으신 분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이런 분을 공경하는 것에 무슨 죄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홍금주(페르페투아) 성녀는 마음속에 순교의 원의를 품고 있었는데, 친구에게 "내 소망은 붉은 옷을 입는 것이라네"라고 하였습니다. 무슨 뜻이냐고 묻자, "순교할 소망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지"라고 대답하였습니다. 현경련(베네딕다) 성녀는 심문과 형벌을 받으면서도 대단히 강한 정신력을 보였고, 함께 갇혀 있는 동료들을 즐거운 표정으로 권면하였는데, 이러한 즐거운 표정을 끝까지 간직하였습니다. 최경환(프란치스코) 성인은 감옥에서 숨을 거두기 전에 "내 소원은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내 목숨을 내놓고 도끼날 아래 목을 늘이는 것이지만, 하느님께서 내가 감옥에서 죽기를 바라시니, 그 뜻이 이루어지소서"라고 하였습니다.

민극가(스테파노) 성인은 배교하면 살려주겠다고 하자, 분명하게 "저의 종교를 버리는 일은 만 번이고 불가합니다. 만약 풀어주신다면 남아있는 교우들을 예전처럼 가르치러 다닐 것입니다."고 하였습니다. 남경문(베드로) 성인은 무분별했던 지난날을 통회하는 마음으로 가득차서, 아침마다 동이 트기 전에 기도를 바쳤고, "그런 짓을 하였으니, 나는 하느님 나라에 가려면 순교하는 도리 밖에 없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였습니다. 권득인(베드로) 성인은 서소문 밖 형장으로 끌려가면서 차분하고 평화로운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고 합니다. 박희순(루시아) 성녀는 순교의 날이 왔음을 알고 희광이를 오게 하여 술을 사주면서 말하기를 "내가 자네에게 부탁이 하나있는데, 자네가 우리 머리를 자를 때 절대로 침착함을 잃지 말아주게. 칼을 잘 갈아두고, 절대로 우리를 잘못 내려치는 일이 없이 단칼에 머리를 잘라주게"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원귀임(마리아) 성녀는 포졸들이 들이 닥치자 동료에게 "다른 사람들이 우리 때문에 죽으러 가는데 우리가 계속 살 수 있겠는가? 게다가 어디로 피신하리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길은 자수하여 순교에 몸 바치는 것 뿐입니다"고 하였습니다. 박후재(요한) 성인은 열심히 수계하면서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나의 구령(救靈)을 위해 나는 순교해야 하오"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리 103위 성인과 수 많은 순교자들은 스승이신 예수님을 본받고 그 분과 가장 긴밀히 일치하며,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이 순교임을 알았습니다.


 






당고개 순교지


당고개 순교지는 서소문 밖 네거리, 새남터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성인을 탄생시킨 성지이다. 한국 교회에서 가장 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서소문 밖 네거리 형장에서 41명의 순교자들이 목숨을 잃은 1839년 기해박해 당시 이곳 저자거리를 중심으로 하던 장사치들은 음력설 대목장에는 처형을 중지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서소문 밖 형장을 피해 조금 한강가로 나간 곳이 당고개이다. 원효로 2가 만초천(蔓草川) 변에 위치한 이곳은 1840년 1월 31일과 2월 1일 양일에 걸쳐 10명의 남녀 교우들이 순교함으로써 기해 박해를 장엄하게 끝맺은 거룩한 곳이다. 특히 이들 가운데 어린 자식을 거느린 세 어머니는 천주에 대한 뜨거운 사랑에서 모성애까지도 초월하고 순교의 월계관을 차지했다.

이곳에서 순교한 이들 중에서 박종원, 홍병주, 홍영주 형제, 손소벽, 이경이, 이인덕, 권진이, 이문우, 최영이 등 9명이 성인품에 올랐다. 하지만 당고개의 순교자이면서 최경환 성인의 부인이요, 최양업 신부의 어머니인 이성례만은 시복 조서에서 제외돼 성인품에 오르지 못했다.

기해박해 순교자의 시복 조서를 꾸밀 때 왜 이성례 마리아를 제외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그가 옥에 갇혀 있을 때 젖먹이 자식이 아사(餓死)를 당함으로써, 나머지 네 아들의 목숨만이라도 살리겠다는 일념에 배교를 범함 때문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가능하다.

본래 부모와 함께 어린 아이를 투옥시키는 일은 국법에도 없었으나 큰아들 최양업을 사제로 봉헌하기 위해 외국에 유학 보낸 이 집에 대해서는 예외였다. 어머니와 함께 옥에 갇힌 아이들은 국법에도 없는 일이라 밥도 나오지 않고 어쩌다 한 덩어리 밥이 나오면 어린 아이들에게 나누어주고 자신은 굶기 일쑤였다. 세 살짜리 막내는 그나마도 얻어먹지 못해 빈 젖을 빨다 그만 목숨을 잃고 말았던 것이다.

어린 자식의 죽음을 눈앞에서 당한 어머니는 자칫 네 자녀를 모두 죽이고 말 것만 같아 짐짓 배교하겠노라고 하고 옥을 나왔다. 지극한 모성애와 극도의 슬픔 속에서 그는 어쩔 수 없는 인간적 선택을 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결국 이성례 마리아는 아이들과 문전 걸식으로 묵숨을 부지하다가 남편 최경환이 홀로 감옥에서 겪을 고통을 생각하고 아이들이 동냥 간 사이 다시 남편 곁으로 돌아와 다시금 갇힌 몸이 된다.

6세부터 15세까지 네 형제가 부모를 가둔 옥에 찾아와 울부짖자 철이 든 맏이 희정은 어머니가 다시 배교할 것을 우려해 어린 동생들을 달래 발걸음을 돌린다. 그후 동냥한 음식을 틈틈히 부모에게 넣어 주면서 이성례가 참수되기 하루 전 어린 형제들은 동냥한 쌀과 돈 몇 푼을 메고 희광이를 찾는다. "우리 어머니가 아프지 않게 한칼에 하늘 나라에 가도록 해주십시오." 이에 감동한 희광이들은 밤새 칼을 갈아 당고개에서 그 약속을 지켰다. 그리고 먼 발치에서 어머니의 죽음을 지켜본 어린 4형제는 동저고리를 벗어 하늘에 던지며 용감한 어머니의 순교를 기뻐했다는 눈물겨운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성 요한 드 브레뵈프 사제 순교자의 「영적 수기」에서



나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주여,
나도 당신을 위해 내 목숨을 바치게 해주소서.

이틀 동안 끊임없이 순교에 대한 큰 열망을 느껴
순교자들이 당한 온갖 고초를 견디어 내고 싶어했습니다.

나의 주여, 나의 구세주 예수여,
당신이 나에게 베풀어 주신 모든 은혜 무엇으로 갚아 드리겠습니까?
당신의 손에서 당신 고통의 "잔을 받들고 당신의 이름을 부르겠습니다."

당신의 영원하신 아버지와 성령의 면전에서
당신의 거룩하신 어머님과 그분의 정결하신 배필 성 요셉,
천사들, 사도들, 순교자들,
우리 복되신 사부 성 이냐시오와 성 프란치스꼬 사베리오의 면전에서,
그리고 끝으로, 나의 구세주 예수 당신의 면전에서 서약하오니,
당신의 영원한 자비로써 부당한 종인 나에게
언젠가 순교의 은혜를 베불어 주신다면 내가 할 수 있는 한
그 은혜를 결코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그러므로 남아 있는 내 여생 동안 당신을 위해
내 피를 흘리어 목숨을 바칠 계기가 생긴다면,
그때 당신의 영광을 위해 다른 식으로 하는 것이 더 유익하지 않는 한,
그 계기를 피할 자유도 없고 권리도 없게끔 내 자신을 묶어 놓습니다.
그뿐 아니라 죽음이 다가 올 때 크나큰 기쁨과 즐거움으로
그것을 당신의 손에서 받아들이기로 서약합니다.

그래서 온갖 사랑을 받으실 만한 나의 예수여,
이제부터 벅찬 기쁨으로 내 피와 내 몸과 내 생명을 바쳐 드립니다.
당신이 나에게 이런 은총을 베풀어 주신다면
나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분이여,
나도 당신을 위해 내 목숨을 바치게 해주소서.
내가 당신에게서 그렇게도 행복한 죽음의 은총을
받을 만한 삶을 영위하게 해주소서.

나의 하느님이시여, 나의 구세주시여,
당신의 손에서 당신 수난의 "잔을 받들고 당신의 이름을 부르겠습니다."
예수여! 예수여! 예수여!

나의 하느님이시여,
이 미개의 나라가 아직 당신께로 온전히 돌아서지 못하고
이 땅에서 죄가 뿌리채 뽑히지 못했다는 것을 당신이 보지 못하십니까!
마음 아플 뿐입니다.
나의 하느님이시여,
나로서는 온갖 고초들이 내 위에 덮쳐도,
이 나라의 포로들이 당하는 가장 잔인한 고초를 당한다 해도
나는 기꺼이 그런 고초들에다 나를 바치고 나 홀로 그 모두를 받겠습니다.


[성 요한 드 브레뵈프 사제 순교자의 「영적 수기」에서 (The Jesuit Relations and Allied Documents, The Burrow Brothers C",]






얼려 죽임을 당한 순교자 원시장 베드로

(1732-1792, 61세 순교)


"나를 위하여 온 몸에 매를 맞으시고 내 구원을 위하여 가시관을 쓰신 예수여, 당신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내 몸이 얼음에 덮여 있는 것을 보십시오"

원시장 베드로는 홍주에서 돈 많은 양민의 집안에 태어났는데 성격이 사납고 야성적이어서 호랑이라는 별명을 들었다. 그는 나이 55세가 되었을 때 천주교에 대한 말을 듣게 되었지만 주위에는 교리를 가르쳐 줄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이 있었기에 아무에게도 천주교에 대한 말을 하지 않고 있다가, 어느 날 "나는 50년 이상을 무익하게 살아 왔다. 내가 돌아오면 내가 떠난 까닭을 알게 될 것이다. 아무 걱정들말고 나를 기다리지 마라" 하고는 진리를 찾아 집을 떠났다. 원시장은 당장 길을 떠났고, 1년 이상이나 아무런 소식도 없었던 그가 고향에 다시 나타났을 때 그의 친척과 친구들이 그에게 달려가 무수한 질문을 하니 그는 웃으면서 대답하였다.


"50여년 동안 나는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소, 그러나 지금은 수 천년 동안 목숨을 보전하게 해 주는 생명의 약을 가지고 있소. 그것을 내일 설명해 주리다."

과연 그 이튿날이 되자 "수 천년 동안 목숨을 보전하게 해 주는 약이 무엇일까?" 하고 친척들과 동네 사람들이 몰려왔다. 그는 모여든 사람들에게 이 세상의 시초와 마지막, 만물을 창조하고 보존하시는 하느님의 존재, 원죄, 예수님의 탄생, 하느님의 계명, 천당과 지옥, 요컨대 그가 천주교에 대하여 아는 것을 모두 그들에게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덧붙여 말하였다. "자, 이것이 착한 뜻을 가진 사람 누구나 영원히 사는 방법이오. 여러분은 모두 내 말을 내 유언으로 알고 나처럼 천주교를 신봉하시오." 하였지만 사람들은 영원히 살 수 있는 생명의 약 인줄 알았다가 실망하고 돌아갔다.

그러나 원시장은 어떤 말보다도 행동으로 실천하여 착한 모범으로 타인을 회개시켰다. 그가 집에 돌아왔을 때에는 자기의 성격을 완전히 정복하여 사납던 자신을 극복하고 모든 이에게 온유하고 너그럽게 대하며, 특히 가난한 이들에게 자기 재산을 나누어주어 그들을 구해 주고, 자기의 지식으로 외교인들을 권고하는 열성을 보이며, 기쁘게 살아가는 그의 변화된 삶이 놀랍게 주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시작하여 부인과 자녀 등 가족들이 변화되고 친척들이 변화되며 이웃사람들이 변화되어 그가 입교한지 2년쯤 뒤에 그 집안 전체가 천주교인이 되었고, 원시장의 열성에 감탄한 외교인들 중의 30가구 이상이 입교하였다.

이렇게 신앙의 삶을 살던 어느 날 1791년 진산 사건으로 공주의 감사가 천주교인인 그의 사촌형인 원 시보 야고보를 지명 수배하였다. 그러나 원 야고보는 친구들의 권고를 따라 이미 도망하고 없었다.
포졸들은 원시장에게 "당신 사촌이 어디로 갔소" 하니 원시장은 "죽기가 무서워서 숨었소. 그가 어디 있는지 내가 어떻게 안단 말이오" 하자 포졸은 "우리는 관장의 명령을 받고 그가 천주교인이라 잡으러 왔소. 그러나 그가 여기 없으니 대신 당신을 잡아가겠소"하며 원시장을 잡아 관아로 끌고 가 형장에게 넘겼다.


형장은 그에게 "당신 사촌이 천주교를 믿는다는데 당신도 믿소?" 라고 묻자 원시장은 큰소리로 주저하지도 않고 "나도 천주교를 신봉하오"라고 하였다. 형장은 천주교를 믿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천주를 배반하면 모든 소문이 순전히 모함이라고 하겠다면서 풀어줄 것을 약속하였지만 원시장은 "나는 천주를 배반할 수 없소"라고 일축하였기 때문에 그는 홍주 목사(사또)에게 보내졌다. 

사또는 그를 신문하는 과정에서 "천주를 배반하고 공범자들을 고발하며 다시는 천주교를 따르지 않겠다고 말하라. 그러면 너를 즉시 놓아주마"라고 하였다. 

원시장 베드로는 "천주를 배반하다니 절대로 안됩니다. 저는 또 다른 천주교인들을 밀고할 수도 없습니다"라고 하자 사또는 성이 나서 그에게 주리를 틀게 하고 치도곤 70도를 치게 하였다.

원시장 베드로는 모든 고문을 참을성 있게 견디면서 하느님과 부모님께 대한 사람의 본분과 외교인들의 미신의 헛됨 따위에 대하여 참된 도리를 설명하기를 그치지 않았으며 이튿날도 같은 질문과 같은 대답으로 고문을 당하였는데, 또 주리를 틀리고 그 전날보다도 더 혹독하게 치도곤을 맞아 그의 살점은 너덜거리고 두 어깨뼈가 부러지고 등뼈는 으스러져 허옇게 드러났다. 이렇게 참혹한 상태로 그는 옥으로 다시 끌려갔다. 

그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은 만족과 가쁨을 발산하고 있었다. 그는 옥졸과 아전과 포졸들에게 전교하기 시작하였고, 며칠 후에 한 교우가 그를 보러 감옥을 찾아 왔으므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렇게 옥살이하는 동안 사또는 공주 감사에게 보고하여 그에게서 때려죽이라는 명령을 받고 사또는 원시장에게 마지막으로 물었다.

"네 목숨을 구해 주려는 마음에서 나는 네 마음을 좋은 길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 모든 방법을 썼다. 그러나 네가 아무 말도 듣고자 아니하고 죽기를 고집스럽게 원하므로 나는 감사에게 보고를 하였더니 너를 쳐 죽이라는 명령이 왔다. 그러니 이번에도 배교하지 않으면 죽을 것을 알라" 이 말이 떨어지자 그의 결박을 더 조이고 무서운 고문은 하루 종일 계속되었다. 원 베드로는 그것을 용감하게 견디었다. 그러나 그의 몸은 하도 으스러져서 이제는 수족을 쓸 수도 없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를 감옥으로 떠메어 가야 하였고, 그가 제 손으로 먹을 수 없게 되자 음식을 입에 넣어 주어야만 하였다. 마침내 감사와 수령이 모여 그의 마음을 돌이켜 보려는 마지막 노력을 하여, 그를 끊임없이 기다리고 찾는 자녀들 이야기를 그에게 하면서 회유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원 베드로는 "그것은 제 마음을 크게 움직입니다. 그러나 천주께서 친히 저를 부르시니 어찌 그분의 목소리에 대답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하면서 배교를 마다하니 그들은 사형수에게 관례로 주는 음식을 마지막으로 먹이고 나서 마침내 그의 결박을 더 세게 조이고 무서운 고문도 가하며 할 수 있는 대로 빨리 죽이려고 전보다 더 미친 듯이 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는 죽지 않았다. 사또와 포졸과 형리들은 기진맥진하여 서로 말하였다. "이 죄인은 매맞는 것을 느끼지 못하니, 끝장을 낼 방법이 없소"하였다.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이보시오, 나으리. 나도 인간인지라 매맞으면 아픕니다. 왜 못 느끼겠소. 그러나 천주께서 여기 계시어 저를 직접 굳세게 해 주십니다"라고 하면서 천주께서 나와 함께 여기 계시어 자신을 굳세게 해 주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며 하느님의 현존을 말하고 있었다.

순교는 이렇게 하느님의 은총 없이는 이루어 질 수 없다. 하느님의 은총에 의지적 노력인 응답이 있었기에 순교를 가능하게 해 준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을 듣고 사또는 섬뜩한 생각과 등골이 서늘하여 "저놈은 틀림없이 귀신을 부리는 놈이다"라고 하면서 더 세게 매질을 시켰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마침내 그렇게 죽이는 것을 단념한 사또는 그를 결박하여 물을 퍼붓고 추운 밤중에 밖에 내 놓아 얼려 죽이라고 명령하였다. 

그래서 원시장 베드로는 굵은 밧줄로 묶였고 온 몸에 물을 뒤집어썼다. 이미 그의 온 몸에 얼음이 뒤덮였다. 이 무서운 형벌 중에도 그는 오직 예수님의 수난만을 생각하며 "나를 위하여 온 몸에 매를 맞으시고 내 구원을 위하여 가시관을 쓰신 예수여, 당신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내 몸이 얼음에 덮여 있는 것을 보십시오"라고 하며 감사와 봉헌의 기도를 드리고 목숨을 바쳐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주님의 이름을 영광되게 하기 위하여 매맞고 얼음에 냉동되어 죽어 가는 원시장 베드로였다. 닭이 두 번째 울 때에 그는 마지막 숨을 거두고 1792년 12월 17일 61세로 홍주 감옥에서 순교하였다.

(한국순교복자수녀회 순교자영성센터의 글 중에서)







낮은 자리 (루카 14,1.7-14)


복음에서 주님은 잔치 상을 둘러보시며 서로 다투어 윗자리를 차지하려는 광경을 보시고 다음과 같이 교훈하십니다.

첫째로, 어떤 모임이나 잔치에 초대되어 갔을 때, 윗자리에 서둘러 앉지 말라고 하십니다(14,8). 만일 윗자리에 앉았다가 자기보다 더 높은 사람이 초대되어 왔다면 그 자리를 어쩔 수 없이 내어 주고 무안하게도 맨 끝자리에 내려 앉아야 할 것이라 이르십니다(14,9). 그러니 아예 처음부터 맨 끝자리에 앉았다가 주인으로부터 윗자리로 올라 앉으라는 말을 듣느다면 좌중의 영예를 한 몸에 받게 될 것이라 하십니다(14,10).

사람은 누구나 으레 남을 자기보다 못한 사람처럼 생각하고 자신은 똑똑하고 잘난 사람인 양 처신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 이처럼 자신을 남보다 높이는 자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존경 대신 멸시를 받게 마련이고, 반대로 자신을 진심으로 낮추는 사람은 주위로부터 존경을 받습니다. 자기의 분수를 잘 알고 그 선을 넘지 않으면서 즐겁고 여유 있게 지내는 사람은 우선 슬기와 지혜가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입니다"(14,11)라고 하셨습니다.

둘째로, 우리가 이웃을 초대할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말씀하십니다(14,12).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들, 즉 가난한 자들, 불구자, 절름발이, 소경 같은 사람들, 자신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사람들을 초대하라 이르십니다. 그들은 갚을 능력이 없지만, 마지막 날 하느님께서 대신 갚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14,14).
이와 반면, 갚을 능력이 있거나 되갚음을 받을 수 있는 자들, 즉 형제나 친척, 잘 사는 이웃 또는 자기와 직접 간접으로 이해 관계가 있는 자들만을 초대한다면, 얼마 후에 그들로부터 도로 받게 됨으로써 갚음은 끝나고 하느님께로부터는 더 이상 받을 아무런 상급이 없다고 하십니다(14,12).

그런데 우리 자신을 되돌아 보면 이웃을 초대한 대부분의 경우는 한 마디로, 언제인가 그들을 이용해 보겠다는 속셈이었거나 더 많은 갚음을 바라느 심정에서가 아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각자 분수를 지키며 안전하게 낮은 자리를 거니는 한편 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관심 밖에 있고 버림을 받고 있는 불우한 이웃을 특별히 의식하며 그들을 정성스럽게 대접하고 보살핍시다. 그들은 마지막 심판 날에 하느님 앞에서 틀림없이 우리를 대변해 줄 것이며 주님은 우리보고 "저 윗자리로 올라 앉으라"(14,10) 하실 것이며 그들을 대신해서 우리에게 후하고 넘치게 갚아 주실 것입니다(14,14).






하느님과 사람 앞에서 늘 겸손하십시오



명상에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처음에는 적은 발전으로 만족하십시오.

언젠가는 달리고 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순종하십시오.

그것은 하느님을 택한 영혼에게 중요한 일입니다.

처음에는 작은 벌이지만

나중에는 꿀을 만드는 큰 벌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과 사람 앞에서 늘 겸손하십시오.

하느님은 마음이 겸손한 사람에게 말씀하시고

그들을 그분의 선물로 채우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상의 비오신부)

 






구원에 이르는 좁은 문 (루카 13,22-30)


주님은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려 하지만 실제로 구원의 문에 들어서는 사람이 적다는 어두운 말씀을 하십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구원받을 자의 수를 예정하셔서가 아니라, 그들이 악행을 일삼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복음에서 구원에 관한 다음 세가지 가르침을 살펴볼 수 있겠습니다.

첫째로, 구원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가르치십니다. 사람들은 현세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의 욕망을 다 채우면서 후세에서도 첫 자리를 차지하려고 원하겠지만 그 때에는 말째가 될 것이라고 이르십니다.

둘째로, 주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신앙생활은 구원에 이르지 못함을 보여 주십니다. 세상에 살아 있을 때에 하느님의 나라에 관한 좋은 말씀을 많이 듣고 또 그 말씀을 서로 자주 나누었을지라도(13,26), 그 말씀을 생활에 조금도 옮기지 않고 뒤에서 악을 일삼으며 회심을 미루고 죄악으로 흐르는 일생이었다면, 그는 실제로 하느님을 모르는 자요, 하느님께서도 그 날에 그를 모른다고 하실 것입니다. "악을 일삼는 자들아, 나에게서 물러가라.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마태오 7,23).

셋째로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지 않는 신앙생활은 구원에 아무런 소용이 되지 못함을 보여 주십니다. 신앙인들이 세상에 살면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를 많이 드렸고(마태오 7,21) 주님의 이름으로 좋은 일들을 많이 했다고 자랑할는지 모르지만(마태오 7,22),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지 않았다면 그 모든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하십니다.
이와 반면, 비록 세상에서는 천시를 받고 따돌림을 받아가며 가난하고 어려운 생활을 하면서도, 주님의 말씀만은 자기의 가장 중요한 재산으로 간직하고 그 말씀으로 살아가며 선행으로 가득 찬 일생을 보냈다면, 그들은 하느님을 참으로 아는 자요, 하느님 나라에서 누구보다 먼저 첫 자리에 초대될 것임을 밝히십니다.
그런데 오늘의 우리는 어떻습니까? 구원의 말씀인 주님의 말씀을 오늘도 우리 생활과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계속 흘려 버리고 있지는 않은지요? 우리의 생활이 마치 죄악을 밑바탕으로 지탱되고 있지나 않은지요? 주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있는 힘을 다하여라"는 의미 깊은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 다 같이 진심으로 회심합시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곧바로 실천에 옮겨야 하겠습니다. 좋은 생각, 좋은 말을 하면서도 실천이 따르지 못하는 신앙 생활이라면, 더 이상 되풀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구원의 보장이 되어 있는 참으로 지혜로운 자는 주님의 말씀을 많이 들은 자도 아니요, 주님의 말씀을 많이 알고 또 말하는 자도 아닙니다. 오직 그 말씀을 묵묵히 행동으로 옮기는 자입니다(마태오 8,21).






병자성사


병자성사는 어떤 성사인가요?
교회는 질병 때문에 육체적, 정신적으로 중대한 위험에 처한 환자들에게 병자성사를 통해서 병을 이겨나갈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 줍니다. 즉 교회는 병자성사를 통해서 병고로 허약해진 환자의 마음과 신앙을 굳세게 하고, 병자의 구원에 도움이 된다면 잃어버린 건강을 다시 회복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 은혜를 청합니다.


병자성사와 종부성사는 다른가요?
병자성사와 종부성사는 같은 성사에 대한 두 가지 명칭입니다.


어떤 사람이 받을 수 있는지요?
병자성사는 죽음에 직면한 사람만이 아니라 중한 병을 앓는 환자들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전례헌장 73항에서는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습니다. 병자성사는 "죽을 위험이 임박한 이들만을 위한 성사가 아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육체가 쇠약 해지거나 나이가 많거나 병이 들어 죽을 위험에 처하기 시작하면 이미 이 성사를 받기에 합당한 시기가 되었음이 틀림없다." 이 규정에 따르면 급격히 노쇠해지는 노인들도 병자성사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본당에서는 노인들을 위해서 성당에서 공동으로 병자성사를 베풀기도 합니다. 그리고 중한 수술을 받기 전에 병자성사를 받는 것은 합당할 뿐만 아니라 권장할 일입니다.


병자성사의 특별한 은총은 무엇입니까?
첫째, 병자성사는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강화함으로써 병이나 노쇠의 고통을 견딜 수 있도록 평화와 용기를 줍니다. 인간 사회에서는 병들고 노쇠한 이들을 외면하는 경향이 만연하지만, 하느님은 이런 일들을 결코 버리시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욱더 큰 관심과 사랑으로 돌보시는데, 병자성사는 이에 대한 믿음을 굳건하게 합니다. 또한 죽음에 직면한 사람은 병자성사를 통해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께 대한 신뢰를 갖도록 도움을 받습니다.

둘째, 병자성사를 통해서 병자의 영신적인 구원에 적합한 경우에는 건강이 회복되는 은혜를 받습니다. 예수께서는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는데, 그 목적은 그들의 믿음을 견고케 해서 구원을 얻게 하고,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려는 데 있었습니다. 모든 환자는 예외없이 자신의 병이 나아서 다시 건강해지기를 원하지만, 하느님은 그 사람의 구원에 유익이 되고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한도 내에서 치유의 은혜를 주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병의 치유를 위해서 기도해야 하지만, 그러나 열심히 기도한다고 모든 병이 반드시 다 치유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도 자신이 당하는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시기를 주님께 청하였지만 "너는 이미 내 은총을 충분히 받았다. 내 권능은 약한 자 안에서 완전히 드러난다"(2고린 12,9)는 대답만을 들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감수해야만 하는 고통이 있다' 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오로지 육체적인 치유만을 바라고 병자성사를 반복해서 받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니라 하겠습니다.

셋째, 병자성사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에 병자 자신의 고통을 일치시키도록 돕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인류 구원을 위해서 당신이 받으셔야 할 수난과 십자가의 고통을 몸소 감수하셨습니다. 병이 낫지 않더라도 열심히 기도하며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에 합치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으로 채우고 있다"(골로 1,24)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고통이 자신과 교회에 선익이 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넷째, 병자성사는 아직 남아 있는 죄를 용서하는 은혜를 베풉니다. 야고보 사도는 병자를 위한 기도와 도유가 "병자를 구할 것이고 주님께서 그를 일으켜주실 것이다"고 말하면서 이렇게 덧붙입니다. 병자가 "죄를 지었다면 용서받을 것입니다"(야고 5,15 참조). 고해성사를 통해서 죄사함을 받지만, 혹시라도 남아 있는 죄가 있다면 병자성사를 통해서 용서를 받게 됩니다.


병자성사의 은혜는 무엇입니까?
병자성사의 은혜는
첫째, 생명의 은총을 증가시키고
둘째, 병자를 위로하고 유혹에 강하도록 하고
셋째, 경한 죄를 사면하여 천국에 들어갈 준비를 시키고
넷째, 구원에 유익하다면 육체의 건강을 줍니다
.

병자성사를 받으면
첫째, 상존의 은총(성화은총)을 더해 주고
둘째, 죄와 벌이 사해집니다.
셋째, 육신의 병을 낫게 해주고 병자의 영혼을 견고하게 하여 악의 세력과 죽음의 두려움에 대해서 굳세집니다.
넷째, 하느님께 대한 굳은 신뢰심을 갖게 되고 고통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냉담 중이거나 견진성사를 받지 못한 신자이거나 혼인 장애(조당)가있는 신자가 병자 성사를 받아 임종 전면은사(전대사)를 받고, 견진성사와 혼인성사를 받지 못했다면 견진성사를 받은 후 혼인 성사를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병자 성사 및 성체를 받아 모십니다.(병자성사 예식서 30, 31,115-135항. 사목지침서 제 98조 참조)


병자성사로서 중죄가 사해질 수 있습니까?
병자성사는 병자가 고백할 수 없더하도 그가 통회하면 중죄가 사해집니다.


생전에 몇 번이나 받을 수 있나요?
병자성사는 반복해서 여러 번 받을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중병이 들었을 때마다 병자성사를 받을 수 있습니다. 병자성사를 받은 병자가 건강을 회복했다가 다시 중병에 걸리게 되면 이 성사를 다시 받을 수 있으며, 같은 병으로 앓다가 병이 더 중해지는 경우에도 이 성사를 다시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병자성사를 합당하게 받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가 병자성사를 합당하게 받기 위해서는 고해성사를 잘 받고, 신망애 삼덕을 발하고, 기도하며 특별히 만사를 하느님의 뜻에 맡겨야 합니다.

(1)우선 병자로 하여금 신망애 삼덕의 정을 일으키도록 하여주고, 자기 죄를 성찰하여 통회를 발하게끔 하고, 타인과 불목한 일이 있으면 용서케 하고, 채무관계라든가 기타 병자로 하여금 심적 부담이 없게끔 해야합니다.
(2)육신의 준비 : 성유를 바를 부분(이마와 두손바닥)을 깨끗이 합니다.
(3)가족의 할 일 : 방을 깨끗이 하고, 조그만 탁자위에 십자고상, 초, 성수, 깨끗한 물을 담을 그릇 하나, 수저 하나를 준비합니다.


어떻게 청할 수 있으며, 또 어떻게 준비해야 하나요?
병자의 상태가 위급하지 않은 경우에는 본당 사무실이나 구역 책임자에게 신청해서 신부님과 시간을 맞춰 약속하면 됩니다. 병원에 입원한 환자의 경우에는 병원의 원목 신부님에게 청하거나, 원목 신부님이 계시지 않는 경우에는 소속 본당 신부님이나 그 지역에서 가까운 곳에 계시는 신부님에게 청하면 됩니다.

어떤 분들은 아직도 병자성사는 죽기 전에 받는 성사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죽음이 임박할 때까지 성사를 미루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환자가 의식이 있을 때 병자성사를 청해서 받는 것이 좋습니다. 모든 성사는 공동체의 예식입니다. 그러므로 환자의 가족이나 신자들이 모인 가운데 병자성사가 집전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병고를 겪어야 하는 것은 환자 자신이지만, 가족이나 신자들이 함께하면서 관심과 기도를 아끼지 않는다면 환자가 자신의 고통을 이겨낼 힘을 얻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병자성사 예식은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병자성사는 말씀 전례로 시작해서 성사의 핵심 부분인 안수, 도유로 이어집니다. 이는 말씀과 성사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좀더 자세히 얘기하면, 사제는 성호경으로 예식을 시작하고 통회의 기도에 이어서 성경 말씀을 읽고 간단하게 하느님의 능력을 구하는 호칭기도를 바칩니다.

말씀 전례에 이어서 사제는 말없이 병자에게 안수하는데, 이는 성령께서 임하시기를 청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교가 축성한 성유를 병자의 이마와 두 손에 바르면서 다음의 기도를 바칩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자비로우신 사랑과 기름 바르는 이 거룩한 예식으로 성령의 은총을 베푸시어 이 병자를 도와주소서. 또한 이 병자를 죄에서 해방시키시고 구원해 주시며 자비로이 그 병고도 가볍게 해주소서." 그리고는 마침 기도를 바칩니다.

죽음에 직면한 환자는 병자성사 외에도(아직 의식이 있으면) 성체를 영하게 됩니다. 이렇게 죽음에 임박해서 영하는 성체를 노자성체(路資聖體)라고 합니다. 먼 길을 떠날 때 노자를 지니고 가듯이 천상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리스도를 노자로 모시고 가는 것입니다.


고해성사도 함께 받을 수 있나요?
그렇습니다. 병자가 지은 죄가 있으면 병자성사를 받기 전에 고해성사를 받는 것이 마땅 합니다. 그러나 병자성사 중에 고해성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병자성사 전에 고해성사를 받고 곧 이어서 병자성사를 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동시에 두가지 성사를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고해성사 때에는 함께 있던 가족들이나 신자들은 자리를 비켜주어야 합니다.


신부님께만 받을 수 있나요?
그렇습니다. 사제, 즉 신부와 주교만이 이 성사를 집전할 수 있습니다. 병자성사의 집권자는 사제입니다. 특별히 본당신부는 그 본당 신자에게 성사를 줄 책임을 맡고 있습니다.


성경에 병자성사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까?
예수께서는 많은 병자들을 낫게 해 주셨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 특히 마르코 복음 (6,13 참조)에는 병자들에게 기름을 발라 병을 고쳐 주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병자성사를 받을 사람과 병자성사의 효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앓는 사람이 있으면…, 원로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고 그를 위하여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믿고 구하는 기도는 앓는 사람을 낫게 할 것이며…, 그가 지은 죄가 있으면 그 죄도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야고 5,14-15) 이렇게 마르코 복음에서 예수님에 의하여 예시되고 야고보 사도에 의해서 결정된 것이 병자성사입니다.


병자성사는 병자인 경우에는 어느 누구나, 그리고 어느 때든지 받을 수 있습니까?
병자성사는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있는 나이, 즉 첫 고해성사를 받을 수 있는 나이에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철들지 않은 어린이나 전면적인 정신장애인은 병자성사를 받지 못합니다. 일반적으로 가벼운 병이나 죽을 위험이 없는 만성병 환자는 받지 못 합니다.

그리고 죽음이 임박해도 사형수나 파선 중인 배의 승선자나 전쟁 중의 군인들은 병자성사를 받지 않고 고해성사와 영성체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병자성사는 의인의 성사이므로 의식이 있고 말을 할 수 있으면 고해성사를 먼저 받아야 합니다. 따라서 고해성사를 거절하면 병자성사를 받을 수 없습니다.


또 어떤 사람이 병자 성사를 받을 수 있는지요?
정례서에는 다음과 같은 특별한 경우에 있는 신자들도 병자성사를 받을 수 있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즉 위험한 병 때문에 외과수술을 받아야 할 때 병자가 수술 전에, 또 노환으로 말미암아 기력이 쇠진해지는 노인들은 병세의 위험성이 목전에 나타나지 않더라도 병자 성사를 받을 수 있습니다. 병세의 위독 상태에서는 그 정확성에 대해서 지나치게 엄격하지 말고, 필요한 경우에는 의사의 의견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병자성사를 받을 사람이 병세가 더 악화될 단계까지 너무 오래 기다리지 말고 병자가 위험해지기 시작하려 할 때 바로 성사를 받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조건부 병자성사에 대하여 들은 기억이 있는데 어떤 경우입니까?
조건부 병자성사에 대한 규정은 없어졌으며, 이런 경우 병자성사는 일상적인 형식으로 집전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병자가 이성을 잃어 무의식 상태에 빠졌을 지라도 고백을 듣고 성체를 영해 줄 수는 없지만 병자성사를 주어야 합니다. 사제가 환자에게 갔을 때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라면, 그를 위하여 하느님께 그의 모든 죄를 사해 주시고 자비로이 천국으로 받아들여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하지만 병자성사를 주지 말아야 합니다. 죽은 사람에 대한 조건부 병자성사는 금지됩니다.


환자가 회복되었다가 다시 중병에 빠지면 이 성사를 다시 받을 수 있는지요?
병자 성사는 환자가 전의 중병으로 회복된 후 새로운 중병을 앓거나 오랜 지병 중에 환자의 상태가 악화되는 경우 다시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법은 같은 병을 앓고 있는 환자의 상태가 점차 악화되더라도 병자성사를 받는 것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병자가 임종하였을 때 어떤 조치를 하여야 합니까?
병자가 임종하면
첫째, 즉시 본당에 연락하고 이웃 교우들에게 알려 연도하게 하고
둘째, 본당에서 장례미사를 드리기 위하여 준비하고
셋째, 교회(묘지)의 사용 허가 수속을 하고
넷째, 가족들이 화목하고 정중하게 고인에게 맞갖은 예의로 그러나 허례의식을 없애고 신앙을 바탕으로 장례의식을 준비하고,
다섯째, 연도와 위령미사를 바치며 고인의 유지를 따라 살도록 다짐하고, 가문과 사회와 교회에 기여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이 고인을 위하는 일입니다
.

(GoodNews의 7성사 중 병자성사에서)






사제는 땅위의 천사


우리가 사제의 신성한 직분을 이해한다면 미사의 무한한 위대함을 보다 풍부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 순교자 이냐시오 성인은 사제직은 세상의 모든 직분중 가장 숭고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에프렘 성인은 사제란 무한한 존엄의 직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로부터 온 성직의 존엄이신 사제는 모든 이해를 넘어서는 존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카시안은 하느님의 사제는 모든 지상의 주권자들과 모든 천상의 직들 위에 높이 들어 올려져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사제보다 높이 계시는 분입니다.

* 교황 이노슨트 3세 성하는 "사제란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놓인 존재입니다. 하느님보다는 아래에 인간보다는 위에 사제의 직분이 있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 데니스 성인은 사제는 성스러운 인간이며, 사제직은 성스러운 직분이라 명하셨습니다.

* 요한 크리소스톰 성인은 사제를 존경하는 이는 그리스도를 존경하는 축복받은 사람이고, 사제를 모욕하는 이는 그리스도를 모욕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토마스 성인의 말씀에 따르면 사제직의 존엄은 천사의 존엄보다 더한 것이라고 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 : "죄인을 용서하는 것은 하늘과 땅을 창조하는 일보다 더 위대한 것입니다. 단 하나의 죄를 용서하는 데도 주님의 모든 전능하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니 사제의 능력이란 어떤 것이겠습니까?"

* 순교자 이냐시오 성인 : 사제는 교회의 영광이며 기둥입니다. 또 천국의 문지기이기도 합니다.

* 치쁘리아노 성인 : 하느님의 진정한 영을 받아서 사제직을 받도록 신탁된 사람들은 경외감과 두려움에 떨게 됩니다.

* 에피파니우스 성인 : 저는 사제의 직분을 기꺼이 수령하고자 하는 사람을 한 명도 보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사제 직분은 두려울만큼 성스러운 것입니다.


천사와 사제를 한자리에서 만나게 된다면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은 자주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천사와 사제를 한자리에서 만나게 된다면, 저는 우선 사제에게 머리를 숙여 인사를 드리고 그 다음에 천사께 인사하겠습니다."
성인은 끝까지 성직을 받아들이지 않으셨습니다
.


하느님은 사제를 돕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십니다

아일랜드의 한 작은 마을에 가난한 상인이 부인과 아이들과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이 가족은 세속적인 것들은 많이 갖지 못했지만 매우 독실한 신앙을 가지고 있어서 가능한한 많은 미사에 함께 참례하곤 했습니다.
가까운 교구에 허약한 체질에 너무 공부를 많이 하다 정신적 균형에 문제가 생기고 더 이상 사제직을 수행할 수 없게 된 한 젊은 사제가 있었습니다. 이 사제는 다른 사람들에게 해가 안 되는 한에서 이곳 저곳을 떠돌며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착한 상인은 아내에게 자기 집에 작은 방을 정돈하여 신부님께 묵으시도록 하고 음식을 마련해 드리자고 제안하였습니다. 젊은 사제도 이 부부의 친절한 초대에 기꺼이 응해, 수년간 편한 마음으로 한동안 이 집에 머물다 떠나곤 하였습니다.
이 사제는 죽음의 때에 이르러 의식을 온전히 회복했습니다.  사제는 침상에서 일어나 앉아 가장 절실한 기도로 이 선한 사람들에게 주님의 풍성한 은총을 내려주십사 청하였습니다.
"오! 주여, 이 사람들이 당신의 사제인 제게 베푼 것에 수천배로 갚아주십시오. 이 착한 당신의 자녀들에게 정신적인 축복과 물질적인 축복을 함께 베풀어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를 마친 후 신부님은 돌아가셨습니다. 그 후로 얼마나 놀라운 일들이 벌어졌는지 들어보십시오. 이 가난했던 상인은 굉장히 장사가 잘 되서 부유하게 되었고, 그의 아들은 백만장자가 되었습니다. 상인의 여동생 중에 네 명이 수녀가 되었으며, 부인의 형제 중에 네 명이 역시 수녀가 되었습니다. 이 상인은 건강하게 오래 살다가 평화로운 죽음을 맞았다고 합니다.

사제가 되고자 하는 학생들의 교육을 위해 기쁜 마음으로 봉헌하는 신자들은 큰 보상을 얻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 좋은 사제를 봉헌하는 것보다 더 대단한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경건한 사제만큼 주님께 큰 영광을 드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미사의 신비)






하느님께서는 주시는 사명의 확신은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하느님께서는 모든 믿는 자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사명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느님을 향한 비전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명의 확신을 무엇으로 알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여기 이 짧은 글로서 표현하는 것이 사실은 쉽지 않습니다.
사명은 자기의 은사에 대한 인식과 자각이 있는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기적이나 이상으로 이런 부르심을 받았다, 이런 사명을 받았다고 하는 경우는 제외합니다). 보통 사람의 경우,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달란트가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사명을 말할 순 없습니다. 또한 사명은 신앙을 기본으로 합니다. 신앙 없는 사람은 사명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고, 신앙인이면서 사명을 받지 않은 사람도 없습니다.

사명에는 우선 내적 확신이 필요합니다. 어떻게 확신하느냐고 물으신다면, 그건 그 개인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각 사람마다 천차만별입니다. 그러나 틀림없는 것은 사명에 대한 내적 확신이 없는 사람의 신앙 생활은 힘이 없습니다.
두 번째로 사명은 '은사'와 함께 주어집니다. 즉, 하느님께서는 바오로에게 유대인들을 맡기지 않으셨고, 베드로에게 유대인들을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바오로에게는 이방인을 위해 일할 사명을 주셨죠. 그것은 바오로가 가진 은사와 그의 여러 가지 여건이 그 일에 더 적합하기 때문이며 하느님께서 그렇게 준비시켜 주신 것입니다.

형제자매님은 사명에 대해서 고민하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형제자매님은 하느님을 위하여 무엇을 잘 하실 수 있습니까? 즉,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형제자매님의 달란트, 재능이 무엇입니까? 그곳에 사명이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엿장수에게 엿을 팔라고 하십니다. 하느님은 그 사람이 잘 할 수 있는 것을 그 사람에게 사명으로 주십니다.
요약하면, 사명에 대한 확신은 그 개인의 신앙에 따라 그 강도가 다르고, 그 방법과 확신의 과정이 다릅니다. 분명한 것은 확신이 없으면 그리스도인답게, 사명자답게, 직분자답게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 사명은 이미 주신 은사와 달란트, 재능의 범위 내에서 주신다는 것입니다.

("창골산 봉서방"에서 hijjang)






조지 뮐러의 대답



영국의 조지 뮐러(1805~1898)는 

일생을 고아를 위해 헌신하여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어떤 사람에 말년에 뮐러에게 와서 물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평생을 그런 일을 할 수 있었습니까?"

갑작스런 질문에 조지 뮐러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 조지 뮐러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평판, 선택, 좋은 것, 싫은 것, 원망
이런 것들에 대해서 내가 죽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이 세상의 칭찬이나 비난에도 나는 죽었습니다.

제가 두려워했던 것은 하느님의 책망이었고
제가 원했던 것은 하느님의 칭찬이었습니다.

그러자 나의 인생이 나도 모르게 바뀌었습니다.
달라졌습니다』



조지 뮐러의 대답은 간단한 대답이지만
가장 중요한 대답인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자기 부인" 이라는 기초위에서 시작됩니다.

자기를 부인할 때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자비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죽을 때 비로소
성경적인 진정한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자아의 죽음은 매일, 매순간마다 계속되어야 합니다.
내 속에는 선한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나를 쳐서 날마다 죽이는 것이 나의 의지로는 불가능합니다.
오직 기도와 은총, 성령충만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너무도 많은 신자들이 "자기부인"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날마다 죽는다는 것" 과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 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나는 지옥에 가야 마땅한 죄인입니다" 라고
생명으로 고백하는 신앙이 되어야 하고,
자기를 부인하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       







임신하지 못하는 부부를 위한 기도


우리 조상들의 주 하느님, 주님은 진흙으로 아담을 만드시고 하와를 그에게 동무로 주시어 주님을 위하여 이 세상에 인류를 번식하게 하시고, 그들을 주님께 대한 거룩한 두려움을 가지고 살게 가르치셨습니다.

주님의 축복과 자비를 가지고 내려오시어 원수가 간음과 실망이라는 두 가지 죄로 이끌어가기 위하여 닫아 놓았던 태를 열어 수태시켜 주십시오.

지극히 높으신 조물주, 거룩하신 아버지, 이 두 자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이들을 행복하고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아내는 포도나무와 같이 번식력이 있게 하시고, 남편은 그를 받쳐주는 지주(支柱)와 같이 그의 보호자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오 생명이여, 내려와 생명을 주십시오. 오 불이여, 내려와 다시 따뜻하게 하십시오. 능하신 분이여, 내려와 행하십시오. 내려오십시오! 

올해의 풍성한 수확에 대한 찬미의 축제를 위하여 이들이 산 곡식다발을, 즉 주님께 바라는 자들에게 복을 내리시는 영원하신 주님께 봉헌된 그들의 맏아들을 바치게 해 주십시오.


그리스도의 시 )


( 이 모든 것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기도드립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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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연옥 영혼들과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과 하느님을 반대하는 사람들과 다른 신들을 믿는 사람들과 쉬는 교우들을 위해서” 라는 지향을 미사에 참례때 혹은 기도하면서 붙이면 매우 큰 선행과 보속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인의 통공 교리를 생활화 한다면 지상에서 행할 수 있는 선행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과 예수님과 성령께 찬미와 흠숭을,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와 성가정의 수호자이신 요셉께 사랑을!

 

http://예수.kr ,  http://마리아.한국)

 


자비의 예수님, 양점상 마리아와 장한상 요셉과 장가브리엘과 모든 거룩한 연옥영혼에게 구원의 은총 속에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교회와 교황님과 사제와 수도자와 온 세상의 모든 이들과 태아에게도 은총과 자비를 베푸소서. 온 세상과 우리 나라에도 사랑과 평화와 축복이 가득하게 이끌어주소서. 성모 마리아님과 배필이신 성 요셉과 성인의 통공 안의 모든 가족들은 하느님께 빌어주소서. 이 모든 것을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돌아가신 양점상 마리아와 장한상 요셉과 장가브리엘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천국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하소서. 주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여, 양점상 마리아와 장한상 요셉과 장가브리엘를 위해 하느님께 자비를 빌어주소서.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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