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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단 하나의 기도" - 2007.10.10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07-10-10 조회수487 추천수5 반대(0) 신고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07.10.10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요나4,1-11 루카11,1-4

                                                        
 
 
"단 하나의 기도"
 


날마다 새롭게 떠오르는 태양, 새롭게 시작되는 하루입니다.

날마다 공동으로 세 번, 아침기도 때, 미사 때 저녁 기도 때
공동체가 마음을 모아 바치는 주의 기도입니다.
이외에도 알게 모르게 수없이 바치는 주님의 기도입니다.
 
삶이 진실하고 단순하면, 간절하고 절실하면
글도, 말도, 기도도 짧고 순수하기 마련입니다.
 
베네딕도 성인도 그의 규칙에서
‘하느님의 은총에서 영감을 받은 열정으로 길어지는 경우가 아니라면
  기도는 짧고 순수해야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단 하나의 기도만 있을 뿐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주님의 기도입니다.
말 그대로 부수적인 것들 다 떨쳐버린 짧고 순수한 본질적인 기도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삶이 그만큼 간절하고 절실하였음을 입증합니다.
세상의 모든 기도들이 주님의 기도 안에 응축 요약되어 있기에
주님의 기도를 온 마음과 온 몸으로 바치기만 한다면 다른 기도는 필요 없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예수님이 아니셨다면 하느님을 어찌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가 살아가는데 꼭 필요로 하는 모든 소원이
이 짧은 기도 안에 모두 함축되어 있음을 봅니다.
 
온전히 아버지 중심의 기도입니다.
아버지 중심의 본질적 삶일 때 삶도 단순 진실해져
삶의 현실에서도
‘일용할 양식’, ‘죄의 용서’, ‘유혹에 빠지지 않는 것’
세 가지 본질적인 요소만 남게 됩니다.
 
사실 이 셋은
아버지 중심의 삶에 충실하면 부수적으로 저절로 따라오는 열매들이기도 합니다.

이 주님의 기도가
미사전례 중 참 절묘한 위치에 자리 잡고 있어 늘 고마움을 느낍니다.
 
사실 주님은 이 주님의 기도를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었기에,
개인기도용이기보다는 공동체가 함께 바치는 공동기도용으로,
공동전례기도 중에 포함되는 것이 마땅합니다.
특히 우리는 거룩한 미사 전례 안에 이 주님의 기도가 온전히 실현됨을 깨닫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드러나는 시간이자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는
은총의 미사시간입니다.
 
우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의식적으로, 또 진심으로 용서하고
주님의 용서를 받는 시간이며
유혹에서 모두 벗어나는 미사시간입니다.
이어 우리는 일용할 양식인 주님의 성체를 모시고 평화의 인사를 나눕니다.
 
말 그대로 미사 중 주님의 기도를 함께 바치며
개인은 물론 공동체를 안팎으로 깨끗이 대청소함으로
화해와 치를 이루는 우리들입니다.

한 번이 아닌 날마다,
공동체가 함께 평생 온몸과 마음으로 바쳐야 하는 주님의 기도입니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
날마다 주님의 기도를 새롭게 바치며 하루를 기도대로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여 주님의 기도는 우리의 몸과 마음에 배게 되어 제2천성이 되고
우리 자신을 통해 주님의 기도는 점차 실현됩니다.

이때 비로소 우리도 1독서의 요나처럼 온전히 하느님 현존 안에 살 수 있습니다.

이 세상 모든 피조물이 우리를 위한 하느님 교육의 방편임을 깨닫습니다.
 
바다 속 깊은 데 큰 물고기를 시켜 요나를 삼키게 하셨다가
다시 분부를 내리시어 육지에 뱉어내게 하신 하느님이요,
아주까리 하나를 마련하시어 요나 위로 자라게 하시고,
이어 벌레 하나를 마련하시어 쏠게 하시어 시들게 하시며,
이어 뜨거운 동풍을 보내어 요나를 기절할 지경으로 만드신 하느님이십니다.
 
저절로 우리들을 웃음 짓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요나서에 나오는 하느님 참 장난이 심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만큼 요나와 격의 없이 지내셨던 하느님이심을 깨닫습니다.
 
하느님과 친밀히 지내는 이들 결코 심심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나는 몰랐겠지만
하느님은 온갖 피조물을 총 동원하여
요나를 최선, 최상의 길로 인도하지 않습니까?
 
요나의 양면성이,
즉 구원되기를 바라며 내심 망하기를 바라는 양면성이 의미심장합니다.

“...이제 주님, 제발 저를 저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것이 났겠습니다.”

니네베가 보기 좋게 멸망하기를 내심 바랐는데
그렇게 되지 않아 화가 난 요나의 모습,
바로 우리의 부끄럽고 어둔 내면의 모습 같기도 합니다.
 
회개하여 돌아 온 니네베 사람들에게 하느님께서 재앙을 거두시자
실망하여 하느님을 비아냥거리며 투정하는 요나를
‘네가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 채근하시며,
끝까지 그를 교육하시어 깨우쳐 주시는 참 자상하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런데 하물며 오른쪽과 왼쪽을 가릴 줄도 모르는 사람이
  십이만 명이나 있고,
  또 수많은 짐승이 있는 이 커다란 성읍 니네베를
  내가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마치 루가복음 15장 되찾은 아들의 비유 중 마지막 부분,
큰 아들을 타이르는 자비로운 아버지의 말을 연성케 합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하느님 현존 안에 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하느님 수중에 있는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께 복종하며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교육수단입니다.
 
주님의 기도가 우리의 제2천성이 되어 우리를 통해 온전히 실현될 때
이런 진리를 더욱 잘 깨닫게 될 것입니다.
 
매일의 미사은총을 통해
온 세상에 확산되는 거룩히 빛나는 아버지의 이름이요 아버지의 나라입니다.  

“주님, 당신께 제 영혼을 들어 올리니, 당신 종의 영혼을 기쁘게 하소서.”
(시편86,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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