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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어떻게’ 라고 따져 묻지 말고 ‘왜’를 깨달아야 - 윤경재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9-01-12 조회수525 추천수3 반대(0) 신고
 
 

‘어떻게’ 라고 따져 묻지 말고 ‘왜’를 깨달아야 - 윤경재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아버지 제베대오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그분을 따라나섰다.” (마르 1,14-20)

 

 교회는 올해를 바오로의 해로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 근본 취지는 바오로 탄생 2000 주년을 기념하자는 뜻에 맞추어 우리도 그분처럼 뜨거운 회심과 선교에 뛰어들자는 데 있습니다. 가톨릭교회가 직면한 과제가 무엇인지 통찰하신 교황님께서 미지근한 회심과 부족한 선교 정신으로는 선교 삼천 년대를 헤쳐 나가기 어렵다고 판단하시고 내리신 결정입니다.

  세례받으시고 유혹의 단련을 거치시고 나서 갈릴래아에서 복음 선포를 시작하시는 오늘 복음말씀을 묵상하며, 혹시 그저 전대사를 받는 기회로 삼고 있지나 않는지 반성하게 됩니다.

  사도 바오로께서 제2차 전도여행 때 교육과 지성인의 도시 아테네와 환락과 타락의 도시 코린토를 연이어 방문하고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아마 바오로는 지성인들의 도시 아테네에서 큰 수확을 얻으리라 생각했나 봅니다. 그래서 날마다 광장(아고라)에 나가 사람들과 토론하였고 또,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들과도 토론하였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학문에 대한 호기심에 먼저 알고 싶다고 설명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유명한 아레오파고 연설을 하게 되었습니다.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예를 들어가며 그들이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이야기하자 청중의 태도가 돌변하였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생길 수 있느냐는 의심이 들었던 것입니다. 머리로 방법을 따져 묻는 순간 그들의 마음이 닫혀버린 것입니다. 겨우 몇몇 사람만 믿게 되었습니다. 더 머물 수가 없었습니다.

  이와는 달리 코린토에서는 논리정연하고 유명한 연설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아퀼라와 브리스킬라 부부와 천막 짓는 생업을 하며 함께 지냈을 뿐이었습니다. 비록 유대인의 반대를 겪었지만, 일 년 육 개월 동안 머물며 가장 커다란 공동체를 이룩하였습니다. 코린토 사람들 스스로 죄인이라고 여겼고 복음이 자신에게 왜 필요한지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도 바오로를 생각할 때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영성이 하나 있습니다. 코린토 후서 12,7절에 나오는 ‘바오로의 가시’입니다. “내가 자만하지 않도록 하느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으로, 나를 줄곧 찔러 대 내가 자만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병이나 어려움을 겪으면 우선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의사를 찾든가 해결방법을 모색합니다. ‘어떻게’ 하면 그 위기를 벗어날까 하는 생각에 빠집니다. 그래서 기도에 매달립니다. 기껏 기도한다는 내용이 이렇습니다. 이 병을 치료해 주시고 이 고난을 벗어나게 해주시면 제가 ~을 어떻게 하겠습니다. 마치 조건을 걸고 거래하듯이 하느님께 매달립니다. 그러다가 적지 않은 사람들이 실망하여 하느님께 탓을 돌리며 사탄의 하수인에게 넘어가고 맙니다.

  바오로의 자세는 이때 병과 고난이 ‘왜’ 생겼는지 물으라고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누구의 탓도 아니라 사탄이 벌인 일이지만, 하느님께서 허용하신 까닭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자신이 자만하지 못하도록 허용하셨다고 깨달았습니다. 이제 우리도 바오로처럼 가시를 인정하고 사탄의 유혹에 걸려 넘어지지 않을 힘을 주십사하고 지속적으로 기도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느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복음 선포는 바로 나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하느님나라가 ‘어떻게’ 왔느냐가 아니라 ‘왜’라고 물을 때 비로소 우리는 자신이 매달렸던 일터에서 부르시는 주님의 목소리에 응답하게 됩니다.

  열두 제자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 주님을 따랐습니다. 바오로는 생업을 통해 자립하면서 아무 보수도 바라지 않으면서 험난한 선교 여행을 평생 다녔습니다. 누구에게도 손을 벌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생업에 복음을 이용하지도 않았습니다. 언제나 떳떳할 수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자유롭게 주님의 종이 되어 오직 주님만 선포하였습니다.

 우리도 어떤 길을 걷든 간에 ‘왜’냐는 깨달음만 지킨다면 타오르는 복음 선포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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