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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상기님의 둥둥 북소리 62
작성자김명순 쪽지 캡슐 작성일2009-01-12 조회수469 추천수3 반대(0) 신고

오늘의 묵상입니다. [연중 제1주간 월요일]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4-20

14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15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16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17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18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19 예수님께서 조금 더 가시다가,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는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보시고, 20 곧바로 그들을 부르셨다. 그러자 그들은 아버지 제베대오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그분을 따라나섰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공생활의 시작을 알려주고 있으므로 우리 그리스도교의 실질적인 태동을 알리는 서곡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기 전에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어제 복음과 오늘 복음 사이에 길지도 않은 두 구절이 생략되어 묵상의 연속성을 단절시키고 있는 점입니다. 따라서 부득이 생략된 두 구절을 옮겨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습니다.

생략된 두 구절은 '그 뒤에 성령께서는 곧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또한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셨는데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마르 1,12-13) 입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계신 것은 성령의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에 이끌러 광야에서 홀로 수행을 하고 계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을 받으셨다 하였습니다. 사탄의 유혹을 받았지만 오늘 복음에서는 사탄의 유혹을 어떻게 물리쳤는지에 대하여는 전혀 설명이 없습니다. 물론  다른 공관 복음에서는 자세한 설명이 따로 있지만 오늘 묵상에서는 고려하지 않겠습니다. 사탄은 하느님의 어전 회의에 참석하여 하느님과 대화를 나누는 하느님의 사람임을 욥기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욥 1.6-12). 

사탄을 악으로, 악을 사탄으로 규정하여 응징하려는 이런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바로 이런 생각이 집착이며 이런 집착이 내 자신의 평화는 물론 세상의 평화를 깨뜨리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전쟁은 악을 응징한다는 명분아래 일어났습니다. 인간의 모든 다툼은 선악의 다툼이 아니라 아이러니하게도 선과 선의 다툼입니다.

서로 내가 선하고 상대편이 악하다고 생각하기에 다툼이 생겨서 평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를 해결하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 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가능한 것입니다. 내가 없으니 유혹도 없는 그런 상태가 되므로 사탄이 예수님을 유혹하였지만 예수님은 깨달음을 통하여 사탄의 유혹을 전혀 개의치 아니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늘 자신을 먼저 생각하기에 사탄의 유혹에 집착하게되어 사탄의 유혹을 통과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선악의 분별은 우리 인간의 몫이 아니어야 합니다. 선악을 분별하는 선악과를 따 먹었기에 우리 인간은 에덴 동산에서 쫒겨났습니다. 우리는 선악의 분별은 잊어버리고 오직 사랑과 자비만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하느님의 크신 자비만을 실천하시고 이를 알려 주시려고 다시 갈릴래아로 오셨습니다.

지금 가자지구에서 고통 받고 있는 그들은 그들이 선이고 이스라엘이 악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선이고 팔레스타인을 악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유대교적 선악의 이분법적 믿음이 잘못된 근본주의 믿음이며 가진 자가 약자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으면 이를 불의라 할 것입니다. 이런 불의에 대하여 예수님은 회개를 요구하였습니다.

광야에 계시다가 요한이 잡혀간 사실을 알고 갈릴래아에 가시어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라며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요한이 잡혀가지 않았으면 예수님의 복음 선포는 더 늦어질 수 있었음을 배제할 수 없는 구절이고 이처럼 자비가 없는 세상에 자비를 알려주기 위하여 복음을 선포하기로 결심하였던 것 같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첫 제자를 모으시며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로 만들어 주겠다는 말씀은 눈 먼 고기를 잡는 일과 비교할 수도 없는, 사람을 바르게 인도하는 일을 가르쳐 주겠다는 뜻입니다. 고기를 잡는 어부는 상징적인 표현으로 이해하여 요즘처럼 물욕이나 탐내는 그릇된 삶을 청산하고 사랑의 실천으로 사람을 감동시키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뜻으로 묵상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의미에서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글씨도 모르는 무지한 사람도 다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는 그런 자비의 가르침이므로 지식보다는 순수한 마음이 더 요구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생각하면 온갖 잡다한 지식으로 오염된 사람들은 오히려 제자의 자격으로는 부적합 한 것으로 판단한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늘 어린아이처럼 되라고 하신 것 같습니다.

요즘은 종교와 철학은 갈수록 경계가 모호해 지고 있습니다. 종교의 여러 영역은 철학, 윤리학, 과학, 의학, 환경생태학, 심리학 등 독립된 학문들에 의해서, 또 불의에 항거하는 시민단체들의 활동에 의해서 모든 영역에서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현대 종교는 이제 사랑과 자비의 실천으로 구분되어 질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 몰리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리스도교 입장에서 보면 그리스도교를 최대 위험에 빠뜨린 사건은 프랑스 시민혁명으로 기록 될 것이며 사상적으로는 니체의 의한 서양 철학의 획기적인 발전을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랑과 나눔을 실천함에 있어서는 지식은 필요치 않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함에 있어서는 무엇보다 불쌍히 여기는 측은지심이 발현되어야 하고 지식은 쓸모가 없는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는 사회봉사보다는 교회봉사에 더 많은 시간을 뺏기고 있습니다. 아마 아런 경우를 보고 주객이 전도된 경우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봉사마저도 아쉬운 실정입니다.  

우리 모두는 사랑의 실천으로 사람을 감동시키는 사람이 되어야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을 찬미하며 오순도순 사이좋게 살아갈 수 있음을 묵상하였습니다.

대자대비하신 아빠 하느님!
성자 우리 주 예수님은 사람 낚는 어부가 되어라 하셨습니다.
저희들도 언제나 그런 삶을 살아서 우리 모두가 하느님을 찬미하며 살아 갈 수 있도록
성령으로 이끌어 주시옵소서!
성자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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