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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작년에 윤지충 바오로 압송로를 걷고 나서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19-10-26 조회수915 추천수1 반대(0) 신고

작년에 진산길 걷고 와서 스페인에 계신 신부님께 제가 보내드린 글입니다. 아는 신부님이십니다. 지금 보니 글만 번지르르하지 글의 내용처럼은 살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다시 그때 마음을 한번 다잡아 보려고 합니다. 그때 뒤풀이 할 때 이영춘 신부님께서 하신 말씀도 있으셨습니다. 씻고 쉴 수도 있다는 내용을 맥주 한 잔 건배하실 때 하신 말씀입니다. 그걸 바탕으로 해서 한번 나름 그때 느낀 점을 적었는데요 저는 글처럼 살지는 못하지만 조금이나 도움이 될까 싶어서 올려드립니다. 글 내용만 보면 신심이 좋은 것 같지만 실상은 형편없습니다. 저의 신앙은 부족하지만 혹시나 작으나마 울림이 되었으면 합니다.
많은 분들이 이 길을 걸을 수 있도록 홍보하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윤지충 바오로 복자 압송로를 도보순례하며

우리나라 최초의 순교자이며
복자품에 오른 윤지충 바로로와
권상연 야고보 두 분이 진산에서 전주
전동성당까지 압송된 길을 걸으면서
그분들의 신앙을 생각하며
저의 신앙도 한 단계 성숙된 신앙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며
마지막으로 부모님의 영혼을 위해
보속하는 심정으로 압송로를 걸었습니다.


사실 도보순례를 하면서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효과는 나타나지는 않지만
제가 보기엔 눈에 보이지 않는 효과가
있다는 걸 느낍니다. 이런 걸 한다고 해서
신심이 더 돈독하고 강해질지는 미지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어떤 시련이나
난관에 만약 봉착하게 되면 그때 효과가
나타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때 이런 분들이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하느님께 자신의 삶을 바친 여정을 생각한다면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생길 것 같습니다.
저희 같은 오늘의 순례자들은
순례를 마치면 힘은 들지언정 따뜻한 물로
씻을 수도 있고 피로를 풀 수 있는 여유가
있지만은 그때 그당시 순교자들은
한마디로 죽으러 가는 길이기에
압송이 되면서도 변심을 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하느님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봉헌한 걸 보면 지금 저희의 신앙과
비교한다면 정말 이런 비유가 적절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기서 신부님은
수도자이시니까 배제하고 말씀드립니다.


오늘날의 일반 신앙인은 어쩌면
하느님을 믿는다는 게 일로 말하자면
부업이고 하나의 장식품인 악세사리 신앙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느님을 일 순위에 두고
하는 신앙이 아니라 우선 인간적인 세상일을
일 순위에 두고 그저 신앙은 하나의 장식품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고등교육 역사 교육에서도 천주교 박해의
제일 시발점이고 윤지충 복자의 모친상 때
신주를 불에 태운 걸로 그당시 조선 조정에서
박해의 빌미를 제공하게 되었던 것인데
그렇게 본다면 전체적인 천주교가
복음이 전래되는 시초였고
그런 시점에서는 모든 게 종교적인 자리나
신앙이 아직 결실을 맺기에는 역부족인
시간이이였을 텐데도 그런 믿음을
가졌다는 건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약 60 킬로미터를 옛날 역사적인 기록과 고증에
근거해서 최대한 그대로 재현했습니다.


저는 마산교구이고 또 참가자 중에서
윤지충 바오로와 가장 근접한 나이대여서
옛날 죄수복을 입고 도보했습니다.
그런 죄수복을 입고 도보를 하다 보니
좀 더 실감났습니다. 그때는 그런 생각을
못했는데요 지금 느낌과 감회를 쓰면서
문득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사실 60킬로미터를 걷는 다는 게
쉽지 않습니다. 고통이 좀 따릅니다.
순례하면서 이런 고통을 하느님께 봉헌하지
않습니까? 신부님,

이렇게 고통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의미가
어떤 의미가 있을지에 대한 생각입니다.
지금 현세에서 자신이 신앙의 길을 걷다가
봉착하는 십자가라든지 모든 괴로움을 달게
참아 받아 봉헌한다면 나중에는 그 고통에
비례하는 열매를 상급으로 하늘나라에서
분명 되돌려 주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순례는 육체로 드리는 기도라고도 누군가는
말하더군요. 그 고통의 의미는 일반 그냥
아무런 의미없는 세상의 도보순례 때의
고통과는 차원이 다를 겁니다. 순례 때
육체의 고통이 따르지만 그에 부과해서
정신적인 고통도 따르는데 그걸 감수하는 건
하느님을 향한 마음이 수반되지 않으면
할 수 없기에 결국 그 고통으로 인해
영혼 속에 들어있는 불순물이 걸러지는
그런 느낌을 받는 건 사실이었습니다.
이게 도보순례에서 얻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은총인 것 같습니다.


이 세상에서 살면서 일어나고 부딪치는
모든 십자가 속에 고통이 일어나겠지만
지금은 그 고통이 힘들겠지만 그걸 고통으로만
여기면 부질없는 고통으로 끝나겠지만
그 고통을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맡겨놓은
과제와 같은 십자가로 생각해 하느님께
기꺼운 마음으로 봉헌한다면 그 봉헌의
결실이 이 현세에서 고통의 가치에
비해서 몇 배의 몇 백배의 축복으로
되돌아올 것이라는 믿음으로 신앙생활을
한다면 좀 더 다른 곳에 한눈팔지 않고
더 하느님 중심으로 믿음생활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신부님,, 정리가 된 느낌이 없는 글입니다.
그래도 대충은 제가 뭘 말씀드리려고
하는지는 아실 수 있을 겁니다.
아무튼 이번 순례를 통해서 어차피 살면서
고통이 따른다면 그 고통을 달리 해석해서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도록만 한다면
그것도 하나의 은총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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