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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박기석 신부 / 제12회 마르 2,13-28 갈릴래아 논쟁 2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9-10-28 조회수1,439 추천수1 반대(0) 신고

박기석 신부 / 제12회 마르 2,13-28 갈릴래아 논쟁 2



 

"예수님께서는 다시 호숫가로 나가셨다."(마르 2,13) 지난 시간 1-2절처럼 지금 두 번째 논쟁을 시작하면서 13절의 장면의 변화를 좀 서술하고 있죠. 이런 장면의 변화는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겠다는 것입니다. 중풍 병자의 치유로 일어났던 감동이 가라앉자 예수님이 호숫가로 다시 가십니다. 갈릴래아 호수입니다. 갈릴래아 호수가 지리적 배경으로 부각되고 있는데요. 1장에서 갈릴래아 호수는 어떤 곳이었어요? 예수님이 공생활을 시작하기 전에 당신을 도울 네 명의 어부를 부르시던 곳이었습니다. 

 

* 갈릴래아 호수 : 예수님께서 당신을 도울 네 명의 제자를 부르시던 곳 

 

아, 그렇다면 여기서 또 다른 제자를 부르시는구나. 하나의 소명 사화가 전개된다는 거죠. 이번엔 레위를 제자로 부르시는 장면이 14절에 나옵니다. "그 뒤에 길을 지나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부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마르 2,14) 그런데 카파르나움을 지나 갈릴래아 호숫가를 따라 놓인 길 이 길은 로마 제국을 대신해서 헤로데 안티파스와 그의 동생 필리포스가 그 영토를 다스리고 있었던 길로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 경계선을 두고 특히 카파르나움은 헤로데 안티파스가 다스리던 국경 도시예요. 따라서 고을로 들어가거나 나갈 때 상품에 대해서 세금이 징수되어야만 했습니다. 이곳 세관에서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리(세관원)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레위를 보시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죠. "나를 따라라." 이 역시 이전의 어부들을 부르신 것과 같습니다. 레위 역시 베드로, 안드레아, 야고보, 요한처럼 '즉시' 예수님을 따라 나서지요. 예수님께 즉시 응답을 합니다. 


"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마르 2,14) 이전의 어부들을 부르신 것과 같습니다. 레위 역시 베드로, 안드레아, 야고보, 요한처럼 '즉시' 예수님을 따라 나서지요. 예수님께 즉시 응답합니다. 그런데 레위는 첫 제자들과 좀 다른 모습이에요. 앞선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아 형제, 야고보와 요한 형제와 같은 듯하면서도 다른 모습이 여기서 전해진다는 겁니다. 앞선 네 명의 제자들이 '버리다' 곧 그물을 버리고, 아버지를 버렸다면, 지금 레위는 어떻습니까? '일어서다'는 표현을 쓰죠. 일어서다를 통해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을 하고 있어요. 


 


세관에서 세리가 앉아 있다가 일어났다. 세리가 해야 하는 일을 하다가 일어났다. 즉, 그만두었다는 얘기에요. 그 이전의 삶의 방식을 완전히 버렸다는 겁니다. 물론 여기서 우리가 1장에서처럼 '버림'과 '뒤따름'의 관계를 또한 발견하게 됩니다. 하지만 더 강한 의미가 있다는 거예요. 어부들은 상황이 바뀌면 그물을 버렸다가도 다시 먹고 살기 위해서 그물을 잡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부활하기 전 모든 걸 포기하고 다시 그물을 잡고 고기를 잡으러 가는 장면을 요한 복음 21장에서 볼 수 있거든요. 하지만 세리는 달라요. 한 번 사표를 쓰고 나오면 다시 복직이 안 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결연한 의미로 예수님을 따랐다는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이런 특성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그 당시 세리라는 직업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로마제국이 거둬들이는 세금들은 일반적으로 제국이 백성의 반응을 고려해서 유다인 세금 대납 업자가 걷도록 하였습니다. 이런 일을 하는 거를 세관원(세리)이라고 했던 거죠. 이를테면 이들은 로마의 청부업자인 셈이에요. 그런 가운데에서 이들은 수많은 세금은 징수함은 물론 빈번하게 수탈을 자행했기 때문에 유다인들에게는 아주 증오받는 직업이었습니다.


* 세리 : 유다인의 세금 징수와 많은 수탈을 자행해 유다인에게 증오 받는 직업 


그들은 동족의 피와 땀을 착취하는 배신자로 낙인 찍혔고, 본인 뿐만 아니라 그 가족들까지도 미움과 경멸의 대사이었죠. 세리들은 그래서 유다 사회의 공동체에서 철저하게 배제되었습니다. 회당 예식에도 참여할 수 없었고 법정에서 증인으로도 인정되지 않았어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눈에는 이들 세리들이 세금징수로 동족을 착취할 뿐만 아니라 직업상 이방인들과도 접촉이 잦았기 때문에 불결한 사람, 즉 율법이 규정하고 있는 정결 규정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로 보았던 겁니다. 


그런데 마르코는 분명 주님을 따르는 제자로서 레위의 모습을 아주 분명하게 전해주고 있죠. 그가 세관 내의 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는 모습을 결연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처음 부르심을 받았던 어부들보다 더 많은 것을 포기한 레위에요. 그런 면에서 오히려 이 소명 사화는 더욱 현실성을 갖추었다고 하겠습니다. 


이 같은 장면을 전해주는 마태오 복음에서도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어떤 이름이죠? 마태오라고 전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마태 9,9) 


그래서 성 베다 사제는 자신의 복음서 강해를 통해 다음과 같이 주해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돈벌이에 대한 탐욕으로 가득 찬 그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가 받은 새 이름은 마태오였습니다. '마태오'라는 히브리 이름은 라틴어로 도나투스(donatus - 선물 받은 사람)인데, 이 이름은 거룩한 은총의 위대한 선물을 받은 사람에게 딱 어울립니다." [ 복음서 강해 (성 베다 사제)] 


* '마태오' 도나투스(donatus) - '주어졌다' 


이렇듯 마태오라는 이름이 라틴어로 선물- 주어졌다, 주어진 사람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레위가 하늘의 은총으로 주어진 사람임을 인지한다면 바로 이어지는 장면에서 예수님이 레위의 집에 초대되어 함께 식사를 하는 장면을 이해할 수 있다는 거에요. 이 정도로 1장의 네 명의 어부들을 부르심과 다소 차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거기 덧붙여지지 않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과의 논쟁이 소명 사화에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기억해야 돼요. 2장은 지금 갈릴래아 논쟁의 다섯 가지의 이야기죠. 지난 시간에 중풍 병자의 치유와 함께 논쟁으로 이어졌어요. 예수님의 죄에 대한 용서의 권한. 지금도 부르심 이야기지만 논쟁으로 이어지는 거예요. 이 1장의 부르심과 다릅니다. 요 차이가 있어요. 어떤 논쟁이 벌어지냐? 이게 이걸 봐야 되겠지요. 


"예수님께서 그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게 되었는데, 많은 세리와 죄인도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이런 이들이 예수님을 많이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마르 2,15-16) 


이 구절 안에 '세리와 죄인', '죄인과 세리'라는 이 표현이 세 차례나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행동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당혹감과 함께 화를 내고 있는데요. 왜 화를 내느냐?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다인들의 고대 근동의 밥을 같이 먹는다는 것의 의미를 우리가 좀 이해를 해야 됩니다. 그들이 어떤 의미를 부여했는가? 근동 특히 팔레스티나에서 식사는 사람들 사이의 일치를 가장 강하게 드러내는 때라고 생각했어요. 


즉, 유다인들에게 한 식탁에 앉아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그 자리에 있는 사람과 우정을 나누는, 그 우정과 존중을 크게 표시하는 일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다인들은 식탁의 축복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금 예수님께서 함께 어울려서는 안 되는 사람, 같이 밥을 먹어서는 안 되는 죄인, 부정한 자의 초청을 받아서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한다는 거죠. 


자, 율법 학자들의 예수님에 대한 분노, 의아해함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죠. 지난 시간에 첫 번째 논쟁에서도 죄의 용서에 대한 권한 듣고 그때는 속마음으로 자기들 스스로 자문했었는데(마르 2,6-7) 이번에는 달라요. 공개적으로 물어봅니다. 하지만 여기서도 단계를 밟아요. 직접 예수님께 대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이 질문은 답을 구하고 싶어하는 순수한 차원에서 던지는 질문이 아니라 불만을 표출하는 수사학적 질문이지요. 


*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마르 2,16) 

⇒ 불만을 표출하는 수사학적 질문 


그런데 답은 일단 제자들이 하지 않아요. 질문은 제자들이 받았는데 답은 제자들이 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답변하는 것으로 마르코는 서술하고 있습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17)


예수님께서는 죄인들과 식사하시며 그들과 함께 하는 즉, 연대감을 표시하는 행동, 바로 그분의 행동에 불만을 표출하는 바리사이파와 율법 학자들의 질문에 답변을 하십니다. 여기서 '의사'라는 인물이 강조된 게 아니에요. '병든이와 환자'의 처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죄인을 강조하고 있는 거죠. 


* 의사라는 인물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병든이, 환자의 처지를 강조하고 있는 것 

* '예수님은 죄인들의 죄를 치유, 즉 용서하러 오신 의사'


예수님은 죄인들의 죄를 치유하는 것 즉, 용서하러 오신 의사입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과 지닌 사명감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오히려 적대자들이 강하게 사용했던 언어인 '죄인, 의인'이라고 하는 표현을 당신의 언어로 사용하고 계시죠. 여기서 '의인'이란 엄밀한 의미에서의 참다운 의인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의인이라고 자칭하는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 바로 자신들과 같은 사람들이죠. 


* '의인' : 스스로 의인이라고 말하는 바리사이, 율법 학자, 바로 자신들과 같은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보다는 자기 자신의 정의에 만족해서 결국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분의 정체성을 알아보지 못하고 살아계신 하느님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멀어진 사람들입니다. 또 그들은 이미 자기들이 종교적으로 완전한 경지에 도달했다고 생각해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무한한 사랑으로 죄인 모두를 포용하시는 분이시죠. 선한 이에게나 악한 이에게나 햇빛과 비를 주시는 그야말로 대자대비하신 분이십니다. 


* '하느님은 무한한 사랑으로 죄인 모두를 포용하시는 분'


따라서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받으시는 아드님이신 예수님은 죄인들을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고, 마치 의사가 병자에게 한 것처럼 죄인들에게도 꼭 필요한 분으로 이 세상에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마르코는 바로 이 점을 분명하게 우리 안에 그려놓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과 행동으로 당신 자신이 아닌 아버지 하느님을 증언하고 그분의 사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종교지도자들에게 자신들의 율법주의와 엄격주의에 바탕을 두고 만들어 낸 거짓 하느님 상을 버리고 예수님의 삶을 통해서 소개되는 참된 하느님의 모습, 여기에 눈을 돌리라고 촉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 예수님의 삶을 통하여 소개되는 참 하느님의 모습에 눈을 돌리도록 촉구하고 계시는 것 


◆ 갈릴래아 논쟁 3 '단식 논쟁'(마르 2,18-22)  


자, 이어지는 예수님과 반대자들 사이에 일어난 갈리래아 논쟁 중 세 번째 논쟁입니다. 단식 논쟁이죠. 그런데 이 단식 논쟁은 다섯 개의 논쟁의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지요. 그러면서 나머지 이야기들을 해석해 주는 역할을 해 줘요. 앞선 두 개는 중풍 병자 그리고 죄인들, 레위 그리고 죄인들과 식사하는 장면은 죄의 용서라고 하는 공통점이 있었어요. 이 세 번째 논쟁부터는 안식일 규정, 단식 규정과 연결이 됩니다. 이어지는 이야기들, 나머지 논쟁들 가운데서 징검다리 역할을 해 준다는 거죠. 사실 단식과 안식을 규정은 1세기 유다이즘, 유다교의 어떤 신학 체계에서 중요한 어떤 토대를 이루는 거예요. 


* 단식과 안식일 규정 

⇒ 1세기 유다이즘의 신앙 체계에서 중요한 토대 


그러니까 보이는 성전이 파괴되고 나서 바빌론 유배 이후에 유다교(유다이즘)가 태동되면서 보이는 성전 대신 이제 성전이 없기 때문에 다른 것으로 대치되는 게 시간과 공간의 중요성에 신성을 부여하는 거거든요. 유배를 갖기 때문에 시간을 거룩하게 하기 위해서 안식일 규정을 강화한다든지, 내가 하느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할례를 강조한다든지 이런 것들이 태동하면서 발전하는 것이 유다이즘, 유다교예요. 


그러기 때문에 단식과 안식일 규정은 유다인들에게, 특히 예수님 시대에 성전이 재건되면서 새롭게 만들어졌지만 유다교는 계속해서 이어져 나왔거든요. 그게 그들 정신에, 그들 생활의 종교에 단신과 안식일 규정은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이것에 대해서 예수님이 논쟁 속에서 새롭게 새로운 규정 새로운 완성을 보여주신다는 게 여기의 강조점이 있습니다. 단식에 관한 이 논쟁은 독자들에게 결코 작지 않은 배경을 먼저 제공하죠.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 즉, 사람 출신의 배경이에요. 그다음 또 하나의 배경을 주는데 단식에 관한 전통. 유다인들에게 있어서 두 가지 배경을 먼저 제시합니다. 

 

모세가 전해 준 율법은 속죄일에 즉, 일 년에 한 번 단식하는 것을 요구하고 있어요. 우리도 재의 수요일에 단식하죠. 또 성금요일에 단식하잖아요. 이렇게 단식하는 게 유다교에서는 일 년에 한 번 단식히는 것을 속죄일에 요구하고 있는데요. 하지만 일부 유다인들은 다양한 이유로 단식을 추가해서 지키고 있었어요. 다이어트 때문에 한 게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유다인들이 단식을 추가적으로, 자발적으로 했다는 거예요. 

 

분명 지금 마르코가 언급한 요한의 제자들, 사람 출신의 배경이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단식했다. 자, 세례자 요한에 대해서는 마르코 복음 2장 18절에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단식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마르 2,18) 이렇게 전해줬죠. 

 

즉, 세례자 요한이 단식을 자주 했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스승이 그렇게 하면 제자들도 따르는 거죠. 아,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단식을 자주 했는데 세례자 요한이나 그의 제자들이 단식을 한 것은 죄의 회개를 위해서 한 겁니다. 여하간 세례자 요한과 그의 제자들이 단식을 자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고요.  뿐만 아니라 바리사이들도 단식을 했다는 거예요. 하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율법 준수와 이를 통해 자신들의 뜨거운 신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내가 신앙이 뛰어나다, 내가 잘났어. 이걸 드러내기 위해서 단식을 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본 정신하고 완전히 다른 거죠. 즉 해마다 정해진 날 외에도 보통 월요일과 목요일을 규칙적으로 단식을 했습니다. 

 

자, 이 부분은 마르코복음 보다 루카복음에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가 있어요. 세리는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루카 18,13) 이렇게 기도했지만 바리사이는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사람들이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마르 18,11-12) 그러니까 바리사이들이 당시에 단식을 추가적으로 많이 했구나 하는 걸 알 수 있지요. 

 

이 얘기는 결국 뭐죠? 아까 세례자 요한이 단식했으면 그러니까 스승이 하면 제자들도 한다고 그랬어요. 그런데 이 질문 안에서 거꾸로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예수님께 물어요. 이 질문은 "스승님, 당신은 어떻습니까?" 하고 묻는 거잖아요. 제자들이 하지 않는 거는 결국 스승이 하지 않으니까 안 하는 거 아니에요. 결국 예수님은 단식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걸 질문한 겁니다. 

 

자, 그런데 이것은 굉장히 곤란한 질문이에요. 사람들이 기대치라는 게 있잖아요. 예수님께 가졌던 대중의 폭넓은 지지도.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시고 가르침이 있는 곳에 사람들이 계속 모여들었거든요. 그런데 예수님이 단식을 잘하지 않는다고 하면 대중의 지지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겁니다. 생각보다 후폭풍이 큰 문제에요. 단식이 갖고 있는 의미를 생각한다면 이건 충분히 이해가 되는 부분입니다. 

 

단식은 구약 성경에 보면 하느님의 진노를 피하는 첩경이고 죄의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 달라고, 도와 달라고 하는 절박한 기도였습니다. 물론 회개의 상징이기도 했고요. 그러기 때문에 단식은 유디인에게 있어서 종교 행위였습니다. 하느님과 가까이 하기 위해서, 하느님께 머물기 위해서 하는 게 단식이었습니다. 단식을 자주 한다는 것은 하느님 곁에 머문다는 의미가 되는 것인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단식을 자주 안 해요. 바리사이와 세례자 요한보다. 그 얘기는 예수님도 단식을 안 한다는 얘기잖아요. 따라서 예수님의 단식에 대한 주장 혹은 당신 자신이 단식을 어떻게 하시는가? 이건 종교 지도자들이 상당히 중요했던 내용입니다. 

 

자, 이때 예수님이 어떻게 말씀하세요?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느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 복음에서 혼인 잔치는 자주 등항하는데 요한복음에 보면 공생활을 시작하지 전에 첫 기적을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시작을 하십니다. 그만큼 혼인잔치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중요해요. 예식 행위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것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남자 여자가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을 축하해 주는, 새로운 사람을 시작하는 부분을 위해 연회(잔치)를 베풀었던 겁니다. 그래서 이 혼인잔치는 성경에서 종말론적 구원을 상징하는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 혼인잔치 : 종말론적 구원을 상징 

 

그러기에 예수님이야말로 구약의 약속이 실현되어 종말론적 구원을 이루시는 분이심이 바로 마르 2,19-20절 내용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우리 곁에 계시니까 단식할 이유가 없는 거예요. 잔치 때예요. 지금 예수님이 함께 계시는 상황에서는, 잔치의 상황에서는 먹어야 돼요. 그러나 예수님이 분명히 말씀하시죠.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즉, 예수님 당신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서서히 암시를 하시는 겁니다. 당신이 제거되는 날, 사람들 손에 넘겨질 날이 올 것이다. 그때는 즉, 신랑을 빼앗기는 날에는 주님을 따르던 이들이 깊은 슬픔에 젖어 단식을 할 수밖에 없게 될 날이 올 것이다.  

 

* 신랑을 빼앗길 날 : 당신이 죽음에 처해질 것임을 희미하게 언급 

 

마치 구약 성경 유딧기에 보면, 유딧이 남편 므나쎄를 잃고서 슬피 울며 단식했던 것처럼(유딧 8,4-6) 그런 날이 올 것이다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이죠. 그래요. 신부를 맞이한 신랑의 존재 이유가 축하해 주는 사람들이 함께 즐거움을 나누는 잔치의 목적이지요. 그러기에 단식은 혼인잔치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러 오신 분, 바로 하느님의 아드님이 지금 나와 함께 있는데, 그분이 나에게 구원을 주러 오셨는데 왜 비탄과 애도의 표시인 단식을 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단식에 대해서 가르침을 주시지 않았던 이유를 설명하기에 상식적인 차원에서 두 개의 논평을 하세요. 바로 21절과 22절이죠.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헌 옷에 댄 새 헝겊에 그 옷이 당겨 더 심하게 찢어진다.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도 부대로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시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르 2,21-22)

 

이렇게 세 번째 논쟁 사화를 마무리 짓는 21-22절에는 생활의 지혜가 담겨 있어요. 옷이 헤진 것에 대해 덧단을 대는 경우와 발효되기 전의 포도주를 가죽으로 만든 새 자루에 담는 것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새 것, 새로움에 대한 이야지죠. 새 시대를 맞으려면 새로워져야 한다는 것인데, 과연 어떻게 하면 새로워질 수 있는가? 예수님의 새로움에 대한 강조는 사람들이 질문한 단식 논쟁에서 언급되어졌습니다. 혼인잔치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느냐? 여기서 새 포도주를 신랑과 연결해 본다면 헌 가죽 부대가 단식을 뜻하고 새 가죽 부대는 혼인잔치를 의미하는 것이지요.

 

* 헌 가죽 부대 = 단식 / 새 가죽 부대 = 혼인잔치 

 

사실 단식 논쟁이 있기 직전에 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서 식사를 하셨어요. 같은 장면을 전해주는 마태오복음 9장에서 마르코복음에 언급되지 않는 구약 성경의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호세 6,6절의 말씀인데요.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다."(호세 6,6)

마태오복음 9장 13절입니다. 

 

* 단식보다는 혼인잔치! 제사보다는 자비가 필요!

 

자, 이 말씀을 놓고 또 마르코복음을 같이 생각해 본다면, 이 경우에는 헌 가죽부대를 제사로 새 가죽 부대를 자비로 생각해 볼 수 있겠죠. 예수님께서는 단식보다 혼인잔치가 제사보다는 자비가 필요하다는 것. 그것이 새로운 시대, 하느님 나라에서 필요하다는 겁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드러난 새 것은 바로 하느님 나라에요. 하느님 나라에는 무엇인가 새로움이 담겨 있습니다. 

 

* 새 것은 하느님 나라 

 

예수님 당신과 더불에 하느님의 사랑을 크게 기리는 잔치에 우리 모두 참여하라고 우리를 부르시고 계세요. 그래서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어울려 식사를 하셨고 이렇게 마련된 식사는 혼인잔치와 같았습니다. 이 하느님 나라의 혼인을 통해 인간은 바로 하느님과 다시 하나가 되는 거죠. 이를 위해 신랑이신 예수님은 손님들을 위해 최고의 포도주를 내어놓으신 겁니다. 하느님 나라의 새 포조주는 바로 사랑에서 솟아나는 기쁨, 그 기쁨의 음료입니다. 달리 얘기하면 자비에요. 새 포도주를 마시면 믿는 바를 행하게 되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자비입니다. 

 

* 하느님 나라의 새 포도주는 사랑에서 솟아나는 기쁨의 음료 

 

따라서 하느님 나라에서 신랑과 함께 잔치를 즐기며 하느님과 하나가 될 수 있는 자는 단식을 행하느냐, 마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포도주를 마시고 마시고 무엇을 할 것인가에 달려 있는 거예요. '아버지 하느님이 자비로우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사람이 되어라."(루카 6,37) 예수님의 말씀은 새 포도주를 마시는 우리에게 이렇게 자연스럽게 드러나야 합니다. 


◆ 갈릴래아 논쟁 4 : 안식일 지침에 대한 논쟁(마르 2,23-28)  


이제 마지막으로 오늘 살펴 볼 논쟁의 마지막으로 다음 주에 하나 더 있지요. 오늘은 논쟁 중에 네 번째입니다. 안식일 지침 논쟁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예수님과 그 일행이 걸어가세요.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배가 출출했는지 아니면 입이 심심했는지 밀이삭을 뜯기 시작한 거죠.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질러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길을 내고 가면서 밀 이삭을 뜯기 시작하였다."(마르 2,23)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겁니다. 


* 안식일에 대한 율법 (탈출 20,8-11; 신명 5,12-15)


왜냐하면 탈출기와 신명기에 안식일에 모세의 율법에 보면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특별히 10계명 중 제3계명에 따라 안식일에 노동을 해서는 안 돼요. 게다가 제자들의 행동은 안식일에 금지된 39가지 노동 중 '탈곡'을 위반하는 거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이삭을 뜯은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그것에 대한 시비를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이 걸자 1사무 22,2-7의 예를 드신 겁니다. 


* 제자들의 행동 : 안식일에 금지된 39가지의 노동 중 '탈곡'을 위반한 것 


이스라엘의 첫 번째 임금 사울은 경쟁자인 다윗을 추격했죠. 도망치던 다윗 일행이 그 과정에서 배가 고팠고 결국 성전의 하느님 앞에 진설된 빵에 손을 대고 말았던 겁니다. 하느님의 집 제대에 진설된 제사 빵은 12개였다고 해요. 그래서 안식일 규정에 따라 새로운 빵은 봉헌되었고 이제 진설되었던 빵은 사제는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 다윗은 사제가 아니에요. 사제는 레위 지파에서 나왔으니까요. 다윗은 유다 지파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사울의 공격을 피해서 도망치다가 배가 고프니까 먹었단 말이예요. 하느님의 빵을 먹었던 겁니다. 

 

다윗에 대한 일화를 바리사이들의 질문에 답하시려는 예수님이 과연 지금 무엇을 강조하는지 우리는 지금 여기서 봐야 됩니다. 예수님은 앞선 계시된 논쟁에서 신랑이라고, 새 가죽 부대, 새 포도주 얘기를 하셨어요. 새로운 가르침을 강조하는 거를 1장에 놓고 본다면 당신의 가르침은 새로웠어요. 사람들의 반응에서도 드러났습니다. 

 

* 배고픔과 굶주림 앞에서 일단 배를 채워야만 하는 인간의 조건에 더 무게를 두고 계신 것 

 

그렇다면 지금 다윗에 대한 일화도 인간의 조건 즉, 사제의 몫으로 되어 있는 제사상에 진설된 빵의 기적보다 인간의 현실적 필요성, 지금 배고픔과 굶주림 앞에서 배를 채워야 하는 인간의 현실적 어려운 조건에 더 무게를 둔다는 새로운 가르침을 주신다는 거죠. 새로운 해석을 해 주시는 겁니다. 즉, 지금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복잡하고 엄격한 안식일 규정이 아무리 많이 있어도 안식일의 정신은 사람을 살리는데 있다는 것이죠. 

 

* '안식일의 정신은 사람을 살리는 데 있다.' 

 

즉 안식일 법은 상대화하고 사람을 중요시하는 인본주의적 법 이념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핵심을 놓치고 작은 일에 목을 매지 말라는 말이지요. 즉, 율법 규정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권한을 예수님이 갖고 계시다는 것도 이 안에서 드러나는 겁니다. 인간 사랑이 강조되고 있고 또 하느님의 아들로서 예수님의 권위를 또한 강조하는 내용이 네 번째 논쟁이에요. 즉, 인본주의적 결론과 그리스도론적 결론이 합쳐진 내용. 이것이 오늘 우리가 살펴보는 네 번째 논쟁에서의 핵심 내용이라고 하겠습니다. 

 

* <갈릴래아 논쟁 4>의 핵심 : 마르코복음서 -2장 27절 '인간 사랑'을 강조 / 2장 28절 '예수님의 권위'를 강조


예수님이 세례 받으실 때 하느님께서 "너는 내가 사랑하는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고 하셨습니다.(마르 1,11) 하느님의 이런 고증 안에서 새로운 권위를 가지고 새로운 가르침을 주시는 예수님.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논쟁 안에서 예수님은 새로운 권위를 가진, 하느님의 권위를 가지신 분으로서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또한 밝혀 주시는 거죠.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마르 2,28) 


자, 죄의 용서에 대한 권한과 안식일 규정에 대한 권한 이 모든 권한의 새로운 완성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예수님의 모습을 우리는 오늘 살펴보았고, 다음 주에는 이제 3장을 보는데 3장은 갈릴래아 논쟁의 마지막 사건으로 시작을 합니다. 이 새로운 가르침으로 드러나는 예수님의 권한 그러나 그와 맞서는 반대자들의 어떤 음모들을 계속해서 우리가 살펴보게 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http://cafe.daum.net/bible100weeks/UJbt

 

http://www.cpbc.co.kr/CMS/tv/program/pro_sub.php?src=%2FCMS%2Ftv%2Fprogram%2Fview_list.php%3Fprogram_fid%3D8095%26menu_fid%3D8096&program_fid=8095&menu_fid=8096&cid=&yyyymm=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박기석 신부, 갈릴래아 논쟁, 세리, 레위, 마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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