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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한상기님의 둥둥 북소리 60
작성자김명순 쪽지 캡슐 작성일2009-01-09 조회수548 추천수3 반대(0) 신고

오늘의 묵상입니다. [공현 후 금요일]

<곧 그의 나병이 가셨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12-16

12 예수님께서 어느 한 고을에 계실 때, 온몸에 나병이 걸린 사람이 다가왔다. 그는 예수님을 보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이렇게 청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13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곧 나병이 가셨다.

14 예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에게 분부하시고,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령한 대로 네가 깨끗해진 것에 대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하셨다. 15 그래도 예수님의 소문은 점점 더 퍼져, 많은 군중이 말씀도 듣고 병도 고치려고 모여 왔다. 16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외딴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를 치유한 내용입니다. 각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행하신 표징은 마르코 복음서에 21회, 루카와 마태오 복음서에는 각각 17회, 요한 복음서에서는 6회가 있습니다. 이들 표징 중에서 중복된 것을 제외하면 총 30회 표징을 보여주셨습니다. 일부에서는 요한 복음서에서 7번의 표징을 행사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으나 이는 해석상의 문제로  차이가 생긴 것 같습니다.

요한 복음서의 표징을 6회로 볼 것인지 아니면 7회로 볼 것인지,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은 '파스카 축제 때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는 동안, 많은 사람이 그분께서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고 그분의 이름을 믿었다.' (요한 2,23)를 표징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예수님의 일반적인 복음 선포 활동으로 볼 것인가에 따라 달라질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를 표징으로 간주하게 되면 복수의 표징을 행사하였으므로 이를 1회로 계산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표징을 기적 또는 이적, 표징으로 혼용하여 사용하고 있으나 제 생각은 표징이 더 옳을 것 같습니다. 기적은 극히 이례적인 것으로 우연성이 전제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번 일어난 기적을 다시 재현하려고 하면 재현할 수 없는 것이 기적입니다. 이적도 사전적인 의미로는 기적과 동일한 뜻이지만 이적은 마술이나 요술과 같은 선입관 때문에 어감이 별로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표징은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는 것으로 필요하면 어느 때나 재현할 수 있고, 자신의 능력 중에서 극히 일부를 타인에게 보여주는 행위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능력을 기적으로 이해하면 '우연의 일치'로 우리 스스로가 인정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 됩니다. 하지만 표징은 예수님의 전지전능한 능력 중에서 극히 일부를 보여주는 행위이므로 얼마든지 재현이 가능한 것이 되므로 표징이 더 적합한 용어 선택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병 환자를 고쳐드리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서 고쳐드린다는 뜻으로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하셨습니다. 평안감사도 자기가 하기 싫으면 못하는 것이므로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예수님도 치유하기 싫으면 치유해 주지 않는다는 뜻이므로 일부에서는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예수님이 병을 치료해 주지 않는다고 오늘 복음을 악용할 우려가 있어 보입니다. 

이 말씀은 먼저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고위 성직자분들은 중병에 걸리면 예수님께 기도만 하고 병원에서 치료를 받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으며 병마를 극복하기 위하여 투병생활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 어떤 고위 성직자도, 하느님과 예수님을 지극히 섬기는 그 어떤 사람도 병의 치유는 예수님께만 의탁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신심이 강하고 오늘 복음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사람들은 병이 들면 병원치료를 거부하고 예수님께만 의탁해야 할 것입니다.

또,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중병에 걸렸지만 회복하는 사례는 숫자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있습니다. 다만 우리 그리스도교 환우들은 자신의 의지를 더 굳건히 하기위하여 하느님에게, 예수님에게 기도하며 힘겨운 투병생활을 극복해 나갈 것입니다. 오늘 복음인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이 말씀에서 주어는 물론 예수님입니다. 그러나 저는 주어를 바로 '내 자신'으로 이해하여 우리의 자율의지를 강조하신 말씀으로 묵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내재성'이란 말을 많이 애용하고 있습니다. 불가에서는 우리 모두에게, 도처에 佛性이 있다는 뜻으로 처처불성(處處佛性)이라 합니다. 내 안에 내재된 예수님과 나와 일치를 이룰 때에는 예수님이 따로 계시고 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매사를 예수님처럼 할 수 없지만 어느 한정된 부분에서는 예수님과 동일한 생각과 행동을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극히 한정된 부분에서는 내가 바로 예수님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내재성은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또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요한 14,20)로 알려 주셨습니다. 하느님과 예수님은 일체이시며 우리의 생각과 행위는 주님과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는 뜻이므로 오늘 말씀에서 주어는 물론 예수님이지만 내재성의 관점에서 묵상하면 주어는 우리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결코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복음을 묵상할 때에는 경우에 따라서는 예수님을 내 자신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 따로, 내 따로'가 되므로 실천의지가 생겨날 수 없습니다. 일반 책을 읽을 때도 책 속의 주인공을 바로 내 자신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 책에 몰입할 수 없는 것처럼 복음을 묵상할 때에는 예수님은 곧 내 자신으로 생각하고 묵상하고 있습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를 오늘도 행동으로 저희에 보여주시며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령한 대로 네가 깨끗해진 것에 대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하셨습니다.

이는 사제가 믿고 있는 하느님은 너희 병을 치료해 주지 못하였지만 아빠 하느님은 병을 깨끗이 치료해 주셨으니 사제들이 믿고 있는 하느님은 잘못된 하느님임을 그들에게 알려 주라는 뜻으로, 그리고 불자들이 事事佛供 하듯이 우리는 매사를 하느님께 감사하라는 말씀으로 오늘 복음을 묵상하였습니다.

대자대비 하신 아빠 하느님!
성자 우리 주 예수님은 아빠 하느님을 믿고 병마를 극복하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도 병마와 싸우는 모든 환우들에게 용기를 심어주시고
저희도 잘못된 몸과 마음을 늘 정결히 하여 몸과 마음이 병들지 않도록
언제나 저희를 성령으로 이끌어 주시옵소서
성자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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