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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산책 (막시밀리아노 콜베)
작성자박상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3-08-14 조회수1,620 추천수7 반대(0) 신고

◎ 2003년 8월 14일 (목) - 연중 제19주간 목요일

 

▣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

 

다른 날과 똑같이 어느 날 아침 아우슈비츠 수용소에는 수많은 죄수들이 열을 지어 점호를 받고 있었다. 독일장교는 지휘봉으로 죄수를 찍기 시작하였다. "너!", "너!" ... 간밤에 한 명이 탈출을 시도한 대가로 10명이 목숨을 치러야 했던 것이다. 이렇게 임의로 찍힌 10명의 죄수들은 아사형(餓死刑)으로 죽어야 했다. 마지막 열 번째 사나이가 지목을 받자, 그는 "난 죽기 싫소, 나에겐 자식과 아내가 있소!" 하고 소리를 지르며 그 자리에 꼬꾸라졌다. 바로 그 옆에 콜베 신부님이 서 계셨다. 아무 머뭇거림 없는 신부님의 행동이 이어졌다. 장교 앞으로 한 발짝 나선 신부님, "내가 이 사람을 대신해 죽겠소" 하고 말했던 것이다.

 

오늘 축일의 주인공인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신부는 1894년 1월 8일 폴란드의 즈둔스카-볼라에서 태어났다. 그의 세례명은 라이몬드이며, 1911년 형과 함께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여 막시밀리안이란 이름을 얻었다. 1912-1919년 로마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였다. 수학 중에 1917년 죄인들과 미신자들의 회개를 목적으로 하는 "성모의 기사회"(Militia Immaculatae)를 조직하였고, 1918년 사제로 서품되었다. 1919년 고향으로 돌아와 바르샤바 근처 니에포칼라노우에 수도회를 건설하여 사업확장을 위한 일환으로 월간 "성모의 기사"를 창간하였다. 1927에는 "무염성모의 마을"도 세웠다. 1930년 교황 비오 11세(1922-1939)의 요청으로 4명의 동료들과 함께 일본(나가사키)에 파견되었고, 그곳에 선교를 위한 지부를 만들어 열심히 일했다. 1936년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1939년 9월 1일 폴란드에 대한 독일의 선전포고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전쟁피난민들과 희생자들, 특히 유대인들을 돌보게 된다. 그후 나치에 반대한 혐의로 비밀경찰에 체포되기도 한다. 1941년 2월 17일 유대인들과 폴란드 지하조직을 도왔다는 죄목으로 4명의 동료들과 함께 다시 체포당했다. 바르샤바 감옥을 거쳐 결국은 섬멸수용소(Vernichtungslager)로 이름난 아우슈비츠(Auschuwiz)로 끌려갔고, 여기서 프란치셰크 가요프니체크를 대신하여 목숨을 내놓는다. 10일간의 식음전폐에도 불구하고 또렷한 정신과 얼굴에는 광채를 보였다고 한다. 1941년 8월 14일 결국 수용소 장교의 지시로 페놀 주사를 맞고 죽었으며 화장되었다.

 

콜베 신부는 1971년 10월 17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복자(福者)로 선포되어 독일 나치를 통한 희생자들 가운데 로마 가톨릭 교회로부터 시복(諡福)된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1982년 10월 10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하여 시성되었다.

 

[오늘의 복음]  마태 18,21-19,1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 주어라.>

 

21) 그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와서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하고 묻자 22)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23) 하늘 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왕이 자기 종들과 셈을 밝히려 하였다. 24) 셈을 시작하자 일만 달란트나 되는 돈을 빚진 사람이 왕 앞에 끌려왔다. 25) 그에게 빚을 갚을 길이 없었으므로 왕은 ’네 몸과 네 처자와 너에게 있는 것을 다 팔아서 빚을 갚아라’ 하였다. 26) 이 말을 듣고 종이 엎드려 왕에게 절하며 ’조금만 참아 주십시오. 곧 다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애걸하였다. 27) 왕은 그를 가엾게 여겨 빚을 탕감해 주고 놓아 보냈다.

28) 그런데 그 종은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밖에 안 되는 빚을 진 동료를 만나자 달려들어 멱살을 잡으며 ’내 빚을 갚아라’ 하고 호통을 쳤다. 29) 그 동료는 엎드려 ’꼭 갚을 터이니 조금만 참아 주게’ 하고 애원하였다. 30) 그러나 그는 들어주기는커녕 오히려 그 동료를 끌고 가서 빚진 돈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어 두었다.

31) 다른 종들이 이 광경을 보고 매우 분개하여 왕에게 가서 이 일을 낱낱이 일러바쳤다. 32) 그러자 왕은 그 종을 불러들여 ’이 몹쓸 종아, 네가 애걸하기에 나는 그 많은 빚을 탕감해 주지 않았느냐? 33) 그렇다면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할 것이 아니냐?’ 하며 34) 몹시 노하여 그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그를 형리에게 넘겼다.

35) 너희가 진심으로 형제들을 서로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실 것이다." 19,1)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마치시고 갈릴래아를 떠나 요르단 강 건너편 유다 지방으로 가셨다.◆

†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복음산책]  용서는 권리가 아니라 의무다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공동체설교를 통하여 제자들과 교회공동체에 내리시는 마지막 일곱 번째 규범으로서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21-22절)는 것이다. 물론 이 규범의 의미는 "용서의 무한정"이다. 예수께서는 "무자비한 종의 비유"(23-35절)를 통하여 믿는 이들 사이에 "무한정 용서의 규범"이 얼마나 합리적인가를 밝혀주신다.

 

이미 언급하였지만 마르코나 루가복음이 교회의 규범이 될만한 예수님의 말씀들을 이곳 저곳에 흩어 기록한데 비하여 마태오는 공동체설교 안에 잘 엮어 놓았다. 루가복음은 "잘못한 형제를 바로잡아 주어라"는 규범과 "용서하라"는 규범을 한데 묶어 "조심하여라. 네 형제가 잘못을 저지르거든 꾸짖고 뉘우치거든 용서해 주어라. 그가 너에게 하루 일곱 번이나 잘못을 저지른다 해도 그 때마다 너에게 와서 잘못했다고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루가 17,3-4)고 말한다. 그러니까 죄를 지은 형제를 바로잡기 위하여 우선 꾸짖었을 때, 그가 뉘우치기만 하면 언제든지 용서해 주라는 것이다. 마태오복음은 이 둘을 분리시켜 전자는 전체교회와 관련된 죄를 견책(譴責)하라는 것이고, 후자는 신자들간에 개별적으로 빚어지는 잘못에 대하여 무조건 용서(容恕)하라는 것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루가는 죄인이 뉘우치기만 하면 언제든지 용서를, 마태오는 뉘우침과 관계없이 무조건 용서를 지시하고 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베드로를 보자. 베드로는 스스로를 아주 마음이 넓은 사람인양 "형제가 나에게 잘못을 저질렀을 때 일곱 번 정도 용서해 주면 되겠지요?" 하고 예수께 묻는다. "용서해 주면 되겠지요?" 하고 묻는 베드로의 말속에는 이미 용서가 자기의 권리로 드러나고 있음에 주의해야 한다. 예수님의 대답은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것이다. 이 말씀을 490번 용서하라는 뜻으로 알아들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말씀은 분명히 용서의 무한정을 의미한다. "용서하여라" 라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는 "용서"가 "해 줄 수 있는 권리"가 아니라 "해야만 하는 의무"라는 강력한 뜻이 내포되어 있다. 예수님의 의도를 따르자면, 잘못을 저지른 형제를 언제 어느 때나 그 잘못의 크고 작음을 막론하고 "용서해야 한다"는 결론이다. 즉 용서는 권리가 아니라 의무라는 것이다. 그러나 쉽지 않다. 우리들 일상 체험은 무조건적인 용서가 거의 불가능함을 말해 준다. 용서를 놓고 사람들은 가지각색의 태도를 취한다. 어떤 사람은 "자기 사전에 용서는 없다"고 하며, 또 어떤 사람은 "이번에는 용서하지만 다음엔 국물도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 마태오는 다른 복음서에서 찾아볼 수 없는 "무자비한 종의 비유"(23-34절)를 들어 무조건적인 용서의 합리성을 밝혀주면서, 용서가 의무임을 강조한다.

 

각양각색의 죄상이 판을 치는 오늘날, 왜 이 세상이 망하지 않느냐고 한탄하지 말라. 죄를 지은 사람들을 용서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용서는 죄악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선(善)으로 악을 이겨내는 일이다.(로마 12,21) 용서는 우리의 권리가 아니라 의무이기도 하지만, 용서는 패배가 아니라 승리이며, 하느님 은총의 선물이요 선행이며, 용기 있는 결단이다.◆[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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