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한상기님의 둥둥 북소리 120
작성자김명순 쪽지 캡슐 작성일2009-03-30 조회수487 추천수1 반대(0) 신고

오늘의 묵상입니다.[사순 제5주간 월요일]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1-11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올리브 산으로 가셨다. 2 이른 아침에 예수님께서 다시 성전에 가시니 온 백성이 그분께 모여들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앉으셔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3 그때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에 세워 놓고, 4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5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6 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여 고소할 구실을 만들려고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몸을 굽히시어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기 시작하셨다. 7 그들이 줄곧 물어 대자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어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8 그리고 다시 몸을 굽히시어 땅에 무엇인가 쓰셨다. 9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다. 마침내 예수님만 남으시고 여자는 가운데에 그대로 서 있었다.

10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고 그 여자에게, “여인아,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 하고 물으셨다. 11 그 여자가 “선생님, 아무도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 복음은 요한복음서에만 기록된 복음이지만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이 말씀은 아마 성경에서 제일 많이 인용되는 구절이어서 성경을 접하지 못한 일반인들도 모두가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앉으셔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사하실 때에도 군중들에게 자리를 잡고 앉으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자리를 잡고 앉는다는 것은 모든 것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수용하는 자세이며 명상하는 자세입니다. 지혜를 가르치기위해서는 이렇듯 모든 것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지혜를 가르쳐야 합니다.

반대로 지식을 가르치거나 선동을 하기 위해서는 꼿꼿하게 선 자세에서 행하여야 합니다. 열변을 토하는 목사들에게 앉아서 설교를 하라고 하면 그런 열변을 토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 열변을 토하는 것은 지혜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고 어떤 사실을 믿도록 선동할 때나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모든 것을 가라 앉혀야합니다. 권력을 가진 자도 그 권력을 내려놓아야 하고, 이에 비분강개하는 뜻있는 사람도 자신의 감정을 내려놓아야 하고, 가진 자는 가진 것을 내려놓아야 하고, 일어나라! 싸우자!를 외치는 자도 모두 제 자리를 찾아서 앉아야합니다. 부동산 거품도, 금융투기 거품도, 망국적인 교육 열풍도 모두 가라 앉혀야합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차분히 가라 앉히는 것이 현대 종교가 해야 할 입니다.  

금강경의 첫 장을 펴면 '敷座而坐(부좌이좌)'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자리를 깔고 앉으신 후에 이 경을 말씀하셨다는 얘기입니다. 우리 교회도 예수님의 가르침에 충실하려면, 말씀을 강론하실 때에는 자리에 앉으셔서 강론하셔야 함을 묵상하게 합니다. 아마 이렇게 강론하면 교회가 절간이냐고 또 난리가 날 것입니다. 예수님도 자리에 앉으셔서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강론하셨음에도 말입니다.

한 여인이 간음죄로 붙잡혀 왔습니다. 율법을 어겼으니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예수님을 시험하고 있습니다. 간음죄는 양쪽 모두를 처벌하는 쌍벌죄입니다. 그리고 간음죄의 확실한 증거가 되기 위해서는 간음한 남자가 있어야 합니다. 이런 객관적 증거가 없을 때에는 보충적으로 부득이 증언이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그것도 두 사람 이상의 증인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간음한 남자는 잡아오지 않았습니다. 간음한 남자가 도망갔다 하더라도 목격자가 있었을 것이므로 그 사람이 누군 인지는 알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그 여인만을 데리고 온 것은 선동에 의한 것임을 예수님은 간파하셨습니다. 오늘 제1독서인 다니엘서의 말씀은 이런 억울한 경우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땅에 무엇인가를 쓰고 계셨습니다. 무엇을 쓰셨을 까요? 그리고 왜 즉답을 안 하시고 땅에 무엇을 쓰고 계셨을까? 오늘은 이를 묵상해야 할 것 같습니다. 선동에 의해 동원된 사람들의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려면 침묵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고개를 숙이게 만들어야 합니다. 땅에 무엇인가를 쓰고 계셨으므로 군중들은 무엇을 쓰셨는가를 봐야 하므로 자연히 고개가 숙여질 수밖에 없습니다. 고개가 숙여져야 흥분을 가라앉힐 수 있고 자신의 잘못을 깨달을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병을 다스리는 방법 중 하나는 以熱治熱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작심하고 율법을 주장하는 자에게는 율법으로 맞설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예수님처럼 곤경에 처했다면 저는 이렇게 땅에 썼을 것입니다. '너희들 율법에는 거짓 증언을 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 여인이 언제, 어디서, 누구와 간음하였는지를 먼저 자세하게 밝혀라, 이를 밝히지 못하면 너희들은 거짓 증언을 하였으므로 율법에 의해 처형되어야 한다.' 그리고 더 기록할 수 있다면 '너희들이 죄가 없다면 죄를 면죄받기 위하여 왜 성전에 제물을 바치느냐?'

이렇게 땅에 쓰고 난 후에 성전에서 죄를 면죄 받을 필요가 없는 사람부터 즉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하겠습니다. 이 말씀에 모두들 떠나갔습니다. 죄인들은 모두 예수님 곁을 떠나갔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늘 함께 하지 못하고 순간순간 예수님을 떠나 생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떠난 그 순간, 우리는 모두 이런 죄인들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하셨습니다. 예수님도 단죄하지 않는다 하였음에도 우리 교회는 수없이 많은 사람을 이단으로 단죄하였습니다. 모든 종교가 앞장서서 자비를 실천하여 단죄라는 단어만 사라지게 하여도 지구촌에는 항구적인 평화가 구축될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며 오늘 묵상을 마칩니다.  

대자대비하신 아빠 하느님!
성자 우리 예수님은 오늘도 어려운 시험을 이겨냈습니다.
하지만 제 자신도 극복하지 못한 제가 어떻게 남의 시험을 이겨낼 수 있겠습니까?
저는 남의 시험을 이겨낼 자신이 없습니다.
오직 바라는 것은 단죄보다는 용서하는 마음하나만이라도 고이 간직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 저를 불쌍히 여기시어 언제나 성령으로 이끌어주시옵기를
성자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