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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상기님의 둥둥 북소리 57
작성자김명순 쪽지 캡슐 작성일2009-01-06 조회수629 추천수4 반대(0) 신고

오늘의 묵상입니다. [공현 후 화요일]

<빵을 많게 하신 기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예언자로 나타나셨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34-44

그때에 34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35 어느덧 늦은 시간이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늦었습니다. 36 그러니 저들을 돌려보내시어, 주변 촌락이나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 것을 사게 하십시오.” 37 예수님께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고 이르시니, 제자들은 “그러면 저희가 가서 빵을 이백 데나리온 어치나 사다가 그들을 먹이라는 말씀입니까?” 하고 물었다.

3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가서 보아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알아보고서, “빵 다섯 개, 그리고 물고기 두 마리가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39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명령하시어, 모두 푸른 풀밭에 한 무리씩 어울려 자리 잡게 하셨다. 40 그래서 사람들은 백 명씩 또는 쉰 명씩 떼를 지어 자리를 잡았다. 41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셨다. 42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43 그리고 남은 빵 조각과 물고기를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44 빵을 먹은 사람은 장정만도 오천 명이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 복음은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행한 기적 중에서 우리 그리스도 교인이 아닌 일반인들도 많이 알고 있는 기적은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 우리 가톨릭에 입교하기 전부터 알고 있는 복음서의 기적 중에서 유일하게 알고 있었던 기적은 바로 오병이어의 기적이었습니다. 제가 입교전에 오병이어의 기적을 알고 있었다는 것은 어떤 현상을 설명하는데 많이 인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성경에 기록된 기적들이 다른 어떤 현상을 설명하는데 인용되고 있다는 것은 기적 내용을 꼭 문자 그대로 해석하지 않고 그 의미를 중요시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실제 예수님이 이런 기적을 행사하였다고 문자 그대로 믿어버리면 성경을 묵상할 필요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로 전지전능한 분이므로 어떠한 일도 다 할 수 있다고 믿으면 그뿐이고 오히려 일부에서는 이를 더 선호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성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이 바로 맹신일 것입니다. 묵상은 성경말씀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하는 것이고, 또 묵상을 권장하는 것은 성경말씀이 우리에게 알려주고자 하는 의미를 각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라는 뜻이므로 오늘 기적이 실제 일어난 실제적 사실인지 그 여부는 묵상에 있어서는 이제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 오병이어의 기적은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 중에서 유일하게 4복음서에 모두 기록된 기적입니다. 그만큼 오병이어의 기적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의식주문제입니다. 의식주문제부터 먼저 해결하고 나서 그 다음 문제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며칠을 굶어서 당장 죽어 가는데 종교를 논하고, 인생을 말하고, 철학을 얘기해서 뭘 하겠습니까? 수염이 석자라도 먹어야 살고,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하였습니다.

오병이어는 우리 인간이 굶지 않고 모두 함께 사는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오늘 모인 군중들이 모두 배불리 먹었듯이 오늘 모인 군중을 나라 전체로 확대하고 전 세계로 확대하면 이 지구상에는 굶어죽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전 세계가 보유한 식량을 모두 모아서 전 인류에게 공평하게 나눠준다면 아마 굶어 죽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절대 식량이 부족하여 그래도 부족하다면 경작할 면적을 더 늘려서 생산을 더 확대하면 온 인류는 절대로 굶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느님은 우리에게 충분한 자원의 은총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의 최종 목적지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인간이 만든 인위적인 분별이 없는 그런 나라입니다. 우리 그리스도교의 모태가 된 초기 공동체는 바로 이렇게 내 것 네 것의 구분이 없는 그런 공동체였습니다. 그런 초기 공동체의 모습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교회의 모습입니다. 이를 지금도 실현하고 있는 곳이 있다면 수도원이 그 정신을 이어받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실제로 이런 공동체가 가능할까를 우리는 의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믿음은 바로 이런 의심을 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러한 믿음의 의미를 지금은 종교적으로 이용하여 일부 교회에서 목사가 믿쑵니까! 하면 신자들은 믿쑵니다!로 화답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뭘 믿쑵니까!를 강요하고, 뭘 믿쑵니다!로 화답하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이런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가 바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야만 가능합니다. 그렇지 않고 인간의 탐욕이 존재하는 한 불가능한 공동체입니다. 마르크스 레닌주의에 의한 공산주의가 실패한 것은 바로 이런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기 보다는 오히려 하느님을 부인하는 유물론적 공산주의를 채택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뜻을 바르게 알아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유신론적 공산주의를 채택하였다면 우리 인류 역사는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였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오병이어의 참 뜻은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버림으로써 우리 모두가 함께 사는 길' 임을 알려주는 소중한 가르침으로 묵상하고 있습니다. 내 것을 모두 버리면 우리 모두가 살 수 있다는 뜻을 지금 최대한 관용적으로 해석하는 입장이 바로 나눔의 실천입니다. 이러한 나눔의 의미로 이해하는 것조차도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지 않고 임의대로 해석한다고 공격을 받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 실정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을 이러한 나눔의 실천으로 최초로 의미를 부여한 사람은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로 1880년에 발간된 그의 저서 ‘교의신학 해부 비판’에서 ‘모든 사람들은 모두가 제 먹을 것을 준비하기 마련이며, 그것을 내놓고 나눠 먹으면 오히려 남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부활의 의미도 그의 소설 ‘부활’을 통하여 새롭게 알려주었지만 당시로서는 많은 비판과 박해를 받았으며 러시아 정교회로 부터 파문까지 당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톨스토이가 새롭게 해석한 부활의 의미는 이제는 보편적 해석기준이 되고 있습니다.

또 오늘 말씀은 말씀의 양식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말씀의 양식으로 이해하면 비단 오천 명뿐만 아니라 2천년 동안 수천억 인구가 말씀의 양식을 배불리 먹었으며 앞으로도 계속하여 배불리 먹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다른 각도에서 생각하면 복음 전파를 위하여 예수님의 위대성을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기술하였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예수님의 위대성을 알리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있었습니다. 그 산은 역대의 모든 예언자보다 더 위대하다는 사실을 민중들에게 알려줘야 하고, 예언자들이 치유 기적을 행사하였다면 예수님은 그 이상의 치유 기적을 행사해야 하고, 어느 예언자가 부족한 식량으로 많은 사람을 배불리 먹였다면 예수님은 이보다 더 큰 기적을 행사하여야 합니다.

오늘 오병이어와 비슷한 이적은 구약에서는 엘리사 예언자가 행사한 적이 있습니다.
그의 시종은 “이것을 어떻게 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 앞에 내놓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엘리사가 다시 말하였다. “이 군중이 먹도록 나누어 주어라. 주님께서 이들이 먹고도 남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하여 그것을 사람들에게 내놓으니, 과연 주님의 말씀대로 그들이 먹고도 남았다. (2열왕 4,43-44)

오늘 복음을 어느 관점에서 이해하는가는 각자의 몫입니다. 그러나 묵상은 늘 합리적인 이유도 함께 생각하여야 하며 이런 합리적인 이유가 결여된다면 성경을 임의로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제가 오늘 복음을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버림으로써 우리 모두가 함께 사는 길'이라는 뜻으로 묵상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준 키워드는 '열두 광주리'이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전체를 상징하는 12지파로 이해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의 가족공동체가 되어 양식을 모두 공평하게 나눠 가진다면 12지파가 모두 배불리 먹고도 남는다는 뜻으로, 우리 사회도 모두가 공평하게 부를 배분하면 아마 배곯아 굶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가진 인간들의 생각으로는 천부당만부당한 생각이라 하겠지만 하느님의 뜻과 탐욕에 가득찬 인간들의 뜻이 같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늘 나라를 실제로 건설할 수 있을까를 의심하는 바로 이 순간에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하시는 주님의 음성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대자대비 하신 아빠 하느님!
성자 우리 주 예수님은
우리 온 인류가 기아선상에서 헤어날 수 있는 길을 알려주셨습니다.
저희는 하느님의 뜻이 아닌 인간의 뜻대로 살아가고 있으므로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지 못하여 이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성령으로 저희 모두를 이끌어 주시옵소서!
성자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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