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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느님의 시험 -악마의 유혹- 2013.2.17 사순 제1주일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13-02-17 조회수486 추천수5 반대(0) 신고

2013.2.17 사순 제1주일 신명26,4-10 로마10,8-13 루카4,1-13

 

 

 

 

 



하느님의 시험

 

-악마의 유혹-

 

 

 

 

 


본격적인 강론에 앞서 잠시 '맛'과 '시험'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맛의 신비는 인간의 신비입니다.

참으로 다양한 맛이며 사람마다 미각의 정도도 다 다릅니다.

또 누구나의 공통적인 맛입니다.


중병이 걸려 맛을 잃은 경우 말고는 누구나 맛을 압니다.

 

하여 맛없는 음식은 아무도 손대지 않습니다.


맛없는 음식, 맛없는 삶 뭔가 깊은 연관이 있어 보입니다.

 

여러분은 무슨 맛으로 삽니까?


가끔 제가 받는 질문이고 또 제가 피정하는 분들에게 하는 질문입니다.

아무리 고기가 좋아도 적절한 양념이 가해지지 않으면

맛이 없어 누구도 먹지 않을 것입니다.


양념이 잘 가해져야 맛있는 음식이듯 삶의 음식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맛없는 광야인생이기에

온갖 세상맛을 추구하며 맛나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특히 요즘은 겨울 풍경이 맛없는 광야인생을 상징합니다.

참 담백하고 단순한 맛없는 풍경입니다.

이처럼 맛없는 광야인생에 믿음, 희망, 사랑의 세 필수 양념이

적절하게 가해져야 맛있는 삶입니다.

 


단순, 담백한 겨울 풍경도 참 맛이 없어 보입니다.

이 또한 마음에 믿음, 희망, 사랑이 있어 마음으로 보고 느끼고 맛볼 때

맛있는 풍경이 됩니다.


그러나 결국 음식 맛도 세상맛도 사라지고 영원히 남는 것은

믿음, 희망, 사랑의 하느님 맛 하나뿐입니다.

 


결론하여 하느님 맛이 맛있는 삶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살코기 같은 인생도, 믿음, 희망, 사랑의 양념이 빠져 버리면

맛없고 허무한 광야인생이 되어버립니다.

 

 

 


또 하나는 시험에 대한 묵상입니다.

시험이 없는 세상을 누구나 꿈 꿀 것입니다.

제가 초등학교에서 또 가톨릭대학에서 얼마동안 가르치면서

가장 난감했던 것이 시험입니다.

 


모두가 원하는 90점 이상을, A학점을 줄 수 있다면 문제가 없겠는데

그리할 수 없으니 고민이 큽니다.


가르치는 것은 좋은 데 시험을 보고 채점할 때는

학생들 못지않게 스트레스를 받는 선생님들입니다.

 

학생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배우고 공부하는 것은 좋아해도

시험 좋아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세상에 태어나기도 만만치 않고 태어나서부터 계속되는 시험이요

죽어야 끝나는, 시험에서 시작하여 시험으로 끝나는 광야인생입니다.

 


생존경쟁이 치열할수록 시험 역시 강도가 높아질 것입니다.

시험 없는 세상은 이상이요 환상일 뿐

시험은 광야인생의 엄연한 현실이요

인류가 존속하는 한 시험은 영원히 지속될 것입니다.


사실 시험이 없다면 무료하고 따분하기 이를 데 없어

저절로 타락하여 무너져 내릴 것입니다.

 


이런 시험이 가리키는바 정작 가장 중요한 하느님의 시험입니다.

세상의 시험에 통과하지 못해도 하느님의 시험은 통과해야 합니다.

 

 


평생 계속되는 하느님의 시험이요

이 시험에 통과해야 비로소 성공인생입니다.

 


과외공부하지 않고도 영원한 멘토 이신 성령의 도움으로

평생 하느님의 말씀 공부만 충실히 하면

누구나 하느님의 시험을 통과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시험에 통과해 갈수록

지금 여기 삶의 광야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살게 되고,

또 성숙되어

본연의 하느님의 모상대로 맛있는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시험이 무엇입니까?

 


바로 악마의 유혹이 하느님의 시험입니다.

바로 오늘 말씀 묵상 중 깨달은 진리입니다.


유혹이 없다면 얼마나 좋을까?

왜 사랑의 하느님께서 유혹을 만드셨나?

물을 수도 있지만 이건 정말 짧은 생각입니다.


유혹의 시험들이 없다면

이 무미건조한 광야인생 무슨 맛으로 살 수 있겠습니까?

 


유혹의 시험이나 시련 없이는 성장도 성숙도 없습니다.

유혹의 시험을 탓할게 아니라

멘토이신 성령의 도움을 받아 통과할 수 있는 실력을 쌓아야 할 것입니다.

 


악마도 하느님의 수중에 있고

하느님은 악마를 이용해 우리를 시험하시고 시련하십니다.

우리 예수님도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셨지만

유혹에 떨어지지는 않으셨습니다.

 


40일간의 광야피정 후

하느님은 당신의 아드님, 예수님께 최고의 강도 높은 시험을 부과하십니다.

 


아담과 하와가 악마의 유혹에 떨어져 하느님의 시험에 불합격한 후

예수님이 유혹의 시험을 치릅니다.


바로 예수님이 유혹을 받으시기 전 구절(루카3,38ㄴ)이 의미심장합니다.

 

위로 거슬러 올라가는 예수님의 족보는

‘아담은 하느님의 아들이다.’로 끝납니다.

 


하느님의 아들인 아담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한 하느님께서 비장의 카드,

예수님을 뽑아들었다는 의미를 함축했음을 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기대에 어긋남이 없이

세 차례의 어려운 유혹을, 시험을 통과했습니다.


참으로 위대한 인간은

영원한 참 사람의 모델인 예수님 한 분 뿐임을 봅니다.


이런 예수님이 없다면 우리는 누구에 기준을 맞춰야 하겠습니까?

 

악마의 유혹에서 3회나 KO승을 거두신 후

공적활동에 들어가는 예수님이셨지만 악마의 유혹은 끝난 것이 아닙니다.

 


‘악마는 모든 유혹을 끝내고 다음 기회를 노리며 그분에게서 물러갔다’

합니다.

이후로도 악마의 공격은 집요하게 계속됩니다.

 


베드로를 통한 예수님의 유혹에 실패했지만,

유다는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 급기야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베드로도 세 차례 예수님을 부인했고,

십자가 수난 현장 마지막 장면에서도 악마는 사람들을 통해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는 유혹을 받았지만

예수님은 끝까지 악마의 유혹을, 하느님의 시험을 통과했으며

이를 목격한 백인대장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고백했습니다.

 


우리도 똑같습니다.

죽을 때까지 우리에게도 악마의 유혹은,

아니 하느님의 시험은 계속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만이, 믿음만이 하느님의 시험인, 악마의 유혹을

통과하게 합니다.

 


도대체 하느님의 말씀이 없으면

악마의 유혹인지 식별도 불가능하니 악마의 유혹에 빠지고 말고도 없습니다.

 


세상이 온통 악마의 놀이터가 된듯합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아니라 사탄의 나라가 된 현실 같습니다.


머리가 좋아도 하느님 말씀을 생활화하지 않으면

악마의 하수인이 되기 십중팔구입니다.

 


오늘날 회자되는 멘붕이란 말 역시

악마의 유혹에 떨어진 현실을 상징합니다.


가치관의 상실, 진리의 상실, 삶의 기준, 삶의 의미를 상실한 현실을

상징합니다.

 


말씀과 믿음으로 살아가는 이들은 결코 멘붕을 겪지 않습니다.

악마의 유혹을 퇴치하는 방법은,

하느님의 시험에 통과하는 정답은 하느님의 말씀뿐입니다.

 


성령으로 가득 찬 상태에서

유혹의 시험을 겪으신 예수님께 성령은 바로 그분의 멘토이심을 봅니다.

 


성령이 우리를 일깨워 하느님의 말씀을 깨달아 알게 하고 살게 합니다.

 


그 말씀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 입과 우리 마음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악마의 유혹을 이기는 장면이 자랑스럽고

우리에게 무한한 힘과 격려가 됩니다.


말 그대로 인간승리의 모범입니다.

 

 

 

빵(밥)과 돈이 우상이 된 세상입니다.

빵의 유혹에 결연히 말씀으로 맞섭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


빵만이 아닌 말씀으로 산다는 것에 강조점이 있습니다.

굶어 죽을지언정 빵의 유혹에 넘어가 하느님을 배신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믿음의 표명입니다.

 


밥에, 돈에

하느님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영혼을 파는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바로 말씀의 밥에 대해 깊이 묵상하라 주어진

사순시기의 단식임을 깨닫습니다.

 


밥에 배고파하듯 하느님 말씀에 배고파하라는 단식이 주는 가르침입니다.

악마의 유혹이 참 간교합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운을 떼면서 예수님의 에고를 부추깁니다.


예수님은 절대 여기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두 번째 유혹을 물리치는 장면도 참 통쾌합니다.


세상 권세와 명예와 영광을 다 주겠으니

자기에게 경배(절)하라는 유혹입니다.

 

십계명의 다음 말씀이 생각납니다.


‘우상을 섬기지 못한다. 그 앞에 경배(절)하며 섬기지 못한다.’

 


경배할 분은, 절할 분은 오직 한 분 하느님뿐인데

악마는 자기에게 절하라는 것입니다.


아무한테나 절하지 마십시오.

하여 우리는 꼭 제대 앞에서 하느님께만 절합니다.

 


그러나 세상 권세와 명예, 영광을 얻기 위해

악마에게 절하며 영혼을 파는 사람들은 얼마나 많습니까?


권세와 명예와 영광을 준다면

악마에게 경배는 문제도 삼지 않을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악마의 세상이, 놀이터가 된 세상입니다.

 


주님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말씀으로 두번째 유혹을 물리치십니다.


오늘 신명기에서 모세 역시 당신 백성들에게 봉헌할 때

감사의 고백에 이어 다음과 같이 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그런 다음에 너희는 그것을 주 너희 하느님 앞에 놓고,

  주 너희 하느님께 경배드려야 한다.”

 


악마의 유혹을, 하느님의 시험을 통과하는 답은 하느님 말씀 하나뿐입니다.

말씀 없이는
하느님의 뜻과 악마의 유혹을 분별하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유혹은 황당한 기적을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사랑의 기적이었지

이런 호기심을 부추기는, 초능력을 보여주는 과시의 기적이 아니었습니다.

 


눈 만 열리면 온통 하느님 사랑의 기적인데

새삼 이런 황당한 기적이 무슨 소용이 되겠는지요.

 

악마도 간교한 지혜로 성경을 인용합니다만 힘이 없습니다.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하신 말씀이 성경에 있다.”


한 말씀으로 유혹하는 악마를 격퇴하신 예수님이십니다.

 

유혹하는 악마를 격퇴한 위의 성경말씀은

모두 이스라엘 40년 광야 여정사인 신명기에 나오는 말씀들입니다.

 

 

 

 

 


악마의 유혹은 하느님의 시험입니다.

 

죽을 때까지 평생 계속되는 하느님의 시험, 악마의 유혹입니다.

 


말씀만이 유혹하는 악마를 격퇴시킬 수 있고,

말씀만이 우리 믿음을 굳게 하여 영적전쟁에 승리를 거둘 수 있게 합니다.

 


말씀과 믿음으로 무장하여 요지부동, 유혹하는 악마를 격퇴하고

하느님의 시험에 통과한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당신을 받들어 부르는 모든 이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한 말씀과 성체의 은총으로,

믿음으로 우리를 무장시키시어 광야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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