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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상기님의 둥둥 북소리 63
작성자김명순 쪽지 캡슐 작성일2009-01-13 조회수452 추천수1 반대(0) 신고

오늘의 묵상입니다. [연중 제1주간 화요일]

<예수님께서는 권위를 가지고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1ㄴ-28

 〔카파르나움 마을에서〕, 21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22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23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소리를 지르며 24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25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26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 27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라,“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하며 서로 물어보았다. 28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곧바로 갈릴래아 주변 모든 지방에 두루 퍼져 나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수님은 북 이스라엘 갈릴래아지방에서 사마리아를 거쳐 예루살렘을 마지막 목적지로 정하고 북에서 남으로 길 따라 계속 내려가시며 복음을 선포하고 계십니다. 한 장소에 안주하여 찾아오는 사람을 상대로 복음을 선포하지 않고 곳곳을 직접 찾아다니시며 복음을 선포하시고 자비를 실천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 교회는 예수님처럼 곳곳을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찾아오는 사람을 상대로 복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지금 교회는 예수님과 다른 방식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으므로 교회건물도 필요하고 교우가 늘어나면 또 교회를 지어야 하고, 건물을 신축하고 유지 관리하느라 많은 비용이 소요되고 있으므로 우리의 봉헌금이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하는 데 사용되기 보다는 교회 자체 소요경비를 충당하는데 거의 모두 사용되고 있습니다.

지금은 복음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널리 전파되어 있으므로 이제는 복음의 전파보다는 복음을 실천하기 위하여 가장 낮은 곳을 찾아 다녀야 하므로 사실 그많은 교회 건물도 필요치 않을 것 같습니다. 우리 선조들은 교회 건물이 있어서 복음을 전파한 것도 아니고 교회 건물을 지키려고 그많은 선조들이 순교하지도 않았습니다. 요즘은 동네에 교회를 짓는다면 주민들의 집단 민원이 발생되는 실정이므로 우리가 모르는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교회는 복음을 실천하는 곳이므로 주민들이 서로 유치하려고 유치경쟁을 해야 하는데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회당에 모인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모두 놀랐다 하였습니다. 그들이 놀란 이유는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고 계셨기 때문이라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무슨 지위도 없었으며 그렇다고 이제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셨으므로 명성이 자자하신 분도 아니고, 외모는 화려한 수단으로 치장하기는커녕 남루한 의복을 걸치시고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새로운 가르침에 모두 놀랐고 참된 가르침에 권위를 인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가식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참된 깨달음을 통하여 참 하느님의 뜻을 전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깨달음의 세계를 불가에서는 반야(般若)라 하는 것 같습니다. 분별의 세계에서 필연적으로 생겨날 수밖에 없는 탐진치와 생로병사의 번뇌를 모두 소멸시켜서 분별이 없는 상태에 이른 경지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참 지혜인 반야에 이르고 난 이후에 그 다음에는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뜻인지, 이런 의문이 생겨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분별하는 모든 마음을 소멸시켜서 괴로움과 번민에서 벗어나서 혼자 성불하여 독야청청하겠다는 뜻이라면 그런 득도는 필요 없다고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내 마누라와 내 자식이 고통 받고 있는데 내만 성불한다면 물론 저는 그런 득도를 하지 못할 뿐더러 그런 득도는 하지 않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런 득도는 또 다른 무엇을 위한 것입니다. 득도 이후에 또 다른 앎이 필요하며 이를 후득지(後得智)라 합니다. 후득지는 나를 완전히 버린 깨달음의 세계에서 다시 분별의 세계인 俗世로 돌아와서 중생들이 고통과 괴로움에서 벗어나도록 자비를 베푸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참 지혜의 최종 목적지는 바로 자비의 실천에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도 모든 깨달음에 이른 다음에 후득지를 깨닫는데 1주일이 더 소요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부처님이 불법을 설법하신 것과 광야에서 갈릴래아로 돌아오셔서 복음을 선포하신 예수님의 삶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필연적으로 같을 수밖에 없습니다. 불가의 가르침을 통하여 저는 예수님의 말씀과 자비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깨달음 이전의 상태에서는 Ego라는 존재가 있었지만 복음을 선포하시고 자비를 베푸시는 공생활을 시작하시는 지금은 Ego라는 존재가 이미 사라진 상태입니다.

더러운 영은 언제나 我와 함께 하고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비의 실천으로 我를 없애라는 가르침을 주시고 계시므로 더러운 영들은 이제 더 이상 발붙일 곳이 없기 때문에 발악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부처님과 예수님처럼 고생고생하며 득도를 한 후에 다시 깨달아 자비를 실천하는 이런 어려운 코스를 밟을 필요 없이 바로 자비를 실천하면 모든 것을 한 번에 이룰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비밀의 문을 열 수 있는 자비의 열쇠를 우리에게 알려 주셨으나 그럼에도 또 열쇠를 달라고 기도만 하고 있지는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복음을 우리가 그대로 리바이벌 한다하여 우리에게는 권위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나의 존재를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된 권위는 나를 버림으로써 생겨 나는 것임에도 머지않아 물거품처럼 사라질 권력과 지위와 직분으로 권위를 내 세우려 한다면 하느님께서는 그런 모습을 보시고 ‘참 좋았다’고 하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권위는 우리들의 마음속에 잠복해 있는 더러운 영을 쫒아 내 줄 수 있는 그런 가르침속에서 생겨난다는 것을 오늘 복음을 통하여 묵상하였습니다.  

대자대비 하신 아빠 하느님!
성자 우리 주 예수님은 우리 속에 잠복해 있는 더러운 영을
참된 가르침으로 내 쫒으셨습니다.
지금 우리는 이런 참된 권위가 참으로 아쉬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자신을 버리고 묵묵히 음지에서 일하시는 참된 자녀들이 존경받는 사회가 될 수 있도록
저희 모두가 참된 권위를 분별할 수 있도록 성령으로 이끌어 주시옵소서!
성자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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