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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모님의 눈물을 가슴으로 느끼는 자녀가 되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0-01-01 조회수1,583 추천수1 반대(0) 신고

정한모 시인의 어머니라는 시에 보면 어머니는 눈물로 진주를 만드신다.’라는 시구가 있습니다. 아름다우면서도 가슴이 짠한 표현입니다. 시인은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어머니의 눈물을 진주에 비유합니다. 진주는 조개의 몸속에서 만들어집니다.

 

조개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아시죠? 조개 몸속으로 이물질인 모래가 들어오면 조개는 고통을 느낍니다. 조개는 어미닭이 알을 품듯이 자기 몸의 일부처럼 품어서 결국에는 조개의 그러한 인내의 고통이 진주인 보석을 만들어냅니다.

 

어머니의 눈물이 진주가 되었다는 시적 표현은 그 눈물 속에는 이 세상 모든 어머니가 자식을 위해 희생하며 흘리는 눈물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눈물입니다.

 

잠시 시의 일부분을 감상해보실까요.

 

어머니는 눈물로

 

眞珠(진주)를 만드신다.

 

그 동그란 광택의 씨를

 

아들들의 가슴에

 

심어주신다.

 

씨앗은

 

아들들의 가슴속에서

 

벅찬 자랑

 

젖어드는 그리움

 

때로는 저린 아픔으로 자라나

 

드디어 눈이 부신

 

진주가 된다.

 

어머니는

 

오늘도

 

어둠 속에서

 

조용히

 

눈물로

 

진주를 만드신다.

 

 

시를 한번 보면 어머니는 눈물로 진주를 만든다고 합니다. 그 진주를 아들의 가슴에 심어 주신다고 합니다. 어머니의 눈물을 아들의 가슴에 넣어 준다고 하는 뜻입니다.

 

근데 그 씨앗은 또 아들의 가슴속에서 그리움과 아픔으로 자라서 눈부신 진주가 되고 태양이 된다고 합니다. 저는 이 시에 나오는 어머니를 성모님이라고 감정이입해서 성모님의 마음을 헤아려보고자 합니다.

 

어머니의 눈물은 인류의 죄를 짊어지신 어린 양인 당신의 아들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한 마리 약하디 약한 슬픈 양을 보며 흘리는 눈물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노래합니다. 그 어린 양은 주님 앞에서는 가까스로 돋아난 새순 같다고 합니다. 그는 멸시만 받았고 우리도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또 그를 하느님으로부터 천대받은 자라고 여겼습니다.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었습니다.

 

어린 양의 상처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습니다. 학대받고 천대받았지만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털 깎는 사람 앞에 잠자코 서 있는 어미 양처럼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왜 입을 열지 않으셨을까요?

 

아무런 죄도 없지만 죄인들의 그 죄를 당신이 온전히 감당을 하시면서도 티끌만치의 원망과 후회가 없는 사랑으로 당신 스스로 그 고통을 온전히 당신 몸으로 받으시겠다는 것을 몸으로 말씀해 주시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악행 때문에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렇게 하신 건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자신이 속죄 제물이 된다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진다고 하셨으니 그 뜻에 순종을 하였습니다. 어린 양과 어미 양은 다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어린 양은 어미 양의 모습을 닮았습니다. 왜 성경은 아비 양은 묘사를 하지 않았을까요?

 

어린 양은 누가 낳았을까요? 바로 어미 양이 낳았을 겁니다. 생명이 탄생하는 데에는 반드시 산고가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어미 양을 성모님이라고 묵상을 한번 해봅니다.

 

어린 양은 예수님을 상징하니 그렇게 연상을 해봅니다. 첫 화와는 불순종의 역사를 만들었습니다. 성모님은 두 번째 화와로 왔습니다. 화와는 모든 산자의 어머니라고 했습니다. 두 번째 오신 화와는 그 삶 자체가 철저히 순종의 삶을 살으셨습니다.

 

생명을 잉태하는 존재는 그 생명이 새로운 생명으로 탄생되는 데에는 산고가 반드시 따릅니다. 성모님께서 흘리신 눈물은 아들의 처절한 죽음을 바라봐야 하는 단장의 고통에서 나오는 눈물이지 않겠습니까? 애끓는 모정의 눈물일 겁니다. 여자만이 느낄 수 있는 고통일 겁니다.

 

낙타는 모성애가 강한 동물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몽골의 고비사막에 사는 낙타는 몽고 유목민에게는 동물의 차원을 넘어 가족과 같은 존재입니다. 보통의 경우 낙타는 모성애가 강하지만 때론 모성애가 없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새끼를 출산할 때 산통이 극도로 심할 경우 새끼를 출산한 후에는 그 새끼에 대한 애정이 잘 없다고 합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합니다. 원래 생물학적으로 보면 자연계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에는 근본적으로 모성본능이 있다고 합니다.

 

동물의 경우 실험을 해보면 무통분만으로 새끼를 낳을 경우 자연분만으로 낳은 경우보다 상대적으로 새끼에 대한 모성본능이 적다고 합니다. 이 말은 산고의 고통이 바로 모성본능으로 나타나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미 낙타는 자신의 산고가 너무나 고통이다 보니 그런 모성본능도 잊을 만큼 산고의 고통이 심했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이때 몽고인들은 대대로 이어져오는 그들만의 독특한 비법이 하나 있습니다.

 

몽골인들의 전통악기인 마두금을 연주하는 것입니다. 보통 몽고인 중에서 산파의 경험이 많은 노파가 낙타를 어루만지면서 노련한 악사가 마두금을 연주하게 되면 마두금에서 나오는 애잔하고 구슬픈 악기소리에 어미 낙타가 눈물을 흘린다고 합니다. 정말 감동적인 일입니다.

 

유튜브나 낙타의 눈물이라는 영화를 보면 볼 수 있습니다. 낙타가 눈물을 흘리면 그때 어미에게 새끼를 보내면 젖을 물립니다. 이 장면을 보게 되면 감동적인 장면이라 그만 눈물이 날 경우도 있습니다.

 

어미 낙타의 눈물은 무엇을 상징할까요? 잠시 동안이었지만 새끼를 낳을 때 그 고통 때문에 새끼를 피하고 싶은 마음을 가진 거에 대해 어미로서 가져서는 안 되는데 그렇게 하게 되어 어미로서 미안함과 슬픈 마음을 나타내는 게 아닐까 하고 저는 상상을 한번 해봅니다.

 

마두금에서 나오는 소리가 어떻게 해서 어미 낙타의 모성을 자극할 수가 있었을까를 상상해봅니다. 악기에서 나오는 구슬픈 소리가 새끼 낙타가 어미의 정을 그리워하며 울부짖는 소리처럼 들려 그 소리에 그만 모성본능이 자극이 되어 울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새끼 낙타는 어미 낙타가 흘리는 눈물을 알지 못할 겁니다. 바로 우리가 이 새끼 낙타랑 너무나 흡사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성모님의 첫 번째 산고는 예수님을 낳으셨을 때일 겁니다. 저는 또 한 번의 산고가 있었다고 상상을 해봅니다. 바로 예수님의 죽음에서 부활에 이르는 과정 속에서 성모님께서 겪게 되는 심적 고통이 또 하나의 산고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성모님의 산고는 아들의 죽음 때문에 왔고 그 아들의 죽음은 바로 우리의 죄 때문이니 그렇다면 저희들 때문에 성모님께서 대신 산고를 치르신 것이라고 저는 상상을 해봅니다. 성모님의 산고가 있었기에 우리가 훗날 하느님 나라에 가게 될 수 있을 겁니다. 왜 그럴까요?

 

성모님의 산고로 예수님께서 다시 죽음에서 부활의 몸을 입으셨으니까 그렇습니다. 어머니의 눈물이 진주가 되었다는 시의 표현처럼 성모님의 눈물이 죽음의 강에서 생명의 강으로 건너가는 강물이 되어 우리의 영혼을 정화하는 정화수가 된다면 성모님께서는 오늘도, 내일도 계속 저희를 위해서 조용히 눈물로 진주를 만드실 겁니다.

 

그 진주는 저희의 영혼이 맑을 땐 시에서 나오는 표현처럼 태양처럼 빛날 겁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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