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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3월 11일 야곱의 우물- 마태 20,17.20-28 묵상/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예수
작성자권수현 쪽지 캡슐 작성일2009-03-11 조회수485 추천수3 반대(0) 신고
예루살렘으로 향하신 예수

(필자가 묵상한 구절을 중심으로 싣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과 함께 예수님께 다가와 엎드려 절하고 무엇인가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부인이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쪽과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다른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그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겼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마태 20,17.20-­28)
 
 
 
 
◆유다 민족들에게 예루살렘은 희망의 상징이자 절망의 나락이었지요. 바빌론 포로(BC 586년) 이후 남의 나라에 종노릇하며 살았으나 예루살렘을 통해 다윗 왕국의 재건을 꿈꿨지요. 하지만 현실의 예루살렘은 종교의 이름으로 사회적 불의가 묵인되는 곳이었고 권력자가 백성을 억압하는 현장이었지요. 예수님 당시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로마의 후견 하에 이스라엘 왕 헤로데가 불의한 권력을 휘둘렀고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 역시 백성들의 고통을 가중시켜 자신의 부를 축적하던 곳이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발길을 옮기신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본래 예언자들이 소망했던 하느님 나라를 예루살렘에서 이루기 위함이었지요. 그러니예루살렘으로의 길은 죽음을 각오한 길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예수님은 ‘불편한 진실’로서 공존하기 어려운 존재였던 것이지요. 그것을 알았음에도 예수님은 예루살렘 회복을 위해 제자들과 함께 죽음이 기다리는 그곳으로 발길을 옮기셨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를 따르던 제자들은 어머니까지 동원하며 헛된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없이하려한 예루살렘의 허상에 사로잡혔던 것이지요. 더 높은 자리를 탐하는 제자들이 예루살렘의 지도자가 된다 한들 예루살렘이 달라질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에 예수님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렇게 물으시지요.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새 예루살렘을 위해 죽음의 길을 결단하신 예수께서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제자들에게 그 길에 동참할 것을 바라며 그들의 마음가짐을 바르게 고쳐주십니다. 크고자 하면 작은 자가 되고 으뜸이 되려면 종이 되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이 땅에 죽임을 당하려 오셨음을 분명하게 말씀하면서 말이지요.
 
그리스도교는 죽어야 사는 종교이지요. 그러나 그 옛날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처럼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예수가 불편해지지는 않는지요? 2009년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예수님이 향했던 예루살렘의 길이 무엇을 뜻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정배 목사(감리교 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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