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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늘나라를 위한 고자 이야기 (마태 19;1-12)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0-01-09 조회수2,189 추천수1 반대(0) 신고

2020. 1 . 9.

하늘나라를 위한 고자 이야기

(마태 19;1-12)

1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들을 마치시고 갈릴래아를 떠나, 요르단 건너편 유다 지방으로 가셨다. 2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라오자 그분께서는 그곳에서도 그들을 고쳐 주셨다. 3 그런데 바리사이들이 다가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하고 물었다. 4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는 읽어 보지 않았느냐? 창조주께서 처음부터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나서, 5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하고 이르셨다. 6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7 그들이 다시 예수님께, “그렇다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려라.’ 하고 명령하였습니까?” 하자, 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너희가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9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륜을 저지른 경우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는 자는 간음하는 것이다.” 10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아내에 대한 남편의 처지가 그러하다면 혼인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모든 사람이 이 말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허락된 이들만 받아들일 수 있다. 12 사실 모태에서부터 고자로 태어난 이들도 있고, 사람들 손에 고자가 된 이들도 있으며, 하늘나라 때문에 스스로 고자가 된 이들도 있다.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받아들여라.”

 

 보건복지부의 발표에 의하면 한해  결혼 대비 이혼율이 무려 49%에 육박했다고 합니다. 물론 통계청의 통계와 보건복지부의 통계 산출방식이 조금 다르기 때문에 그걸  다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아무튼 결혼 대비 이혼율의 폭발적 증가는 전 세계적인 트렌드임이 분명해요.

 이혼율은 앞으로 더더욱 폭발적 증가 추세를 견지하게 될 거고, 결혼이라는 것의 의미도 점점 경솔히 여겨지게 될 것입니다. 그건 성경을 올바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예견할 수 있는 거예요. 우리는 그러한 현상 속에서 단순히 결혼의 의미 상실과 이혼의 폭발적 증가로 인해서 가슴 아파해야 할 것만이 아니라 그러한 현상이 구속사 속에서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인지를  알아야 돼요.

 

우리는 오늘  이야기를 통해서 결혼은 소중한 것이라느니 성도에게 있어서 이혼이라는 것은 절대 불가한 것이라는 등의 조잡한 결론을 맺으면 안 됩니다. 그런 것은 성경이 이야기하는 바가 아니에요.

여러분이 성경을 읽으실 때에 정말 주의해야 할 것은, 성경 속에서 인간과 종교와 도덕과 윤리에 대한 교훈을 얻겠다는 생각을 버리는 거예요. 우리가 성경을 읽고 공부할 때 반드시 배제되어야 하는 것이 인간, 종교, 도덕, 윤리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경에서 인간 도덕 종교 윤리만 읽어 내요. 엉터리로 읽는 거죠. 성경은 그런 것들에 대한 교훈을 하고 있는 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하느님의 은혜만을 이야기하고 있는 책이에요. 따라서 본문 속에서도 예수를 찾아낼 생각을 하셔야지 이혼을 해야 되는냐 말아야 되느냐라는 류의 가난한 교훈에 집착하시면 안 됩니다.

 이 이야기를 올바로 해석을 해내기 위해서는 먼저 이 이야기가 어떤 문맥 속에 담겨 있는지를 파악해야 돼요. 오늘 본문은 18장 서두에 어린아이 이야기와 이 본문 바로 밑에 붙어 있는 또 다른 어린아이 이야기로 샌드위치처럼 쌓여 있어요  병행 구절이 들어있는 마르코복음에서도 이 이혼의 이야기는 똑같이 어린아이의 이야기로 앞뒤로 쌓여 있어요. 이게 아주 중요한 거예요 해석의 키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히브리 문학의 샌드위치 구조는 그 양쪽의 빵이 속을 강화하거나 샌드위치의 속 부분이 양쪽의 그 빵 부분을 구체화하는 식의 구조죠 따라서 오늘 본문은 그 양쪽의 어린아이 이야기와 뗄래야 뗄 수 없는 아주 긴밀한 연계성을 구축하고 있는 거예요.

 

마태복음 181-5절 보세요. 1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하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 하고 물었다. 2 그러자 예수님께서 어린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에 세우시고 3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사람이다. 5 또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게 앞에 부분 빵이에요. 샌드위치의 앞부분 빵. 누가 큰 자인지를 놓고 다투던 제자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큰 자입니까? 제자들이 누가 큰 자인지를 놓고 싸웠다는 걸 너무 쉽게 폄하해서는 안돼요. 그들이 누가 훌륭한 자인지를 겨뤘다는 거고 그건 누가 더 열심있는 종교행위를 내어 놓고 누가 더 열심있는 선한 삶을 사는 자인지를 겨루고 있었다라는 뜻이거든요.

 오늘날로 따지면 누가 더 교회일에 열심을 내고 누가 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성취물을 많이 내어 놓았는가를 자랑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게 나쁜 건가요우리가 다 하고 있는거 아닙니까? 그걸로 사람들 막 평가하잖아요. 주님은 그러한 제자들의 다툼과 물음 속에 어린아이 하나를 투입시켜요. 그리고는 이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 하늘나라에 못들어간다라고 말씀을 하세요. 그렇다면 지옥에 들어갈 사람들이 이제 그 대척점에 그려지죠. 어린아이같지 않은 사람들!

그 말은 어린아이처럼 순수하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 이런 뜻이 아니에요. 어린아이가 뭐가 순수해요? 그렇게 악당들이 없잖아요. 애기 보는걸 베이비 싯팅이라 그랬죠. 깔고 앉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면서 보는 거죠. 지금 그 말은 자기를 낮추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는 그런 협박이 아니에요. 주님은 지금 하늘나라의 존재양식에 대해 설명하고 계시는 거예요. 하늘나라는 어린아이처럼 누가 크고 작은 가와 전혀 무관하게 사는 곳임을 설명해 주시는 거예요. 크고 작음의 구별이 있는 곳은 타락한 이 세상이죠. 거기가 바로 어른들의 세상이에요. 어른들이란 세상이 창안하고 요구하고 있는 고착된 사고체계를 갖고 사는 이들을 어른들이라고 해요. 아이들에게는 그게 없어요. 그게 다른 거예요. 그래서 어른들은 크고 작음의 그 가름 전쟁 속에서 큰 자에 속하기 위한 전투를 하며 살게 돼요. 모든 어른은 다 그래요.

그런 면에서 이 땅의 인간들의 삶은 모두가 게임이고 경기에요. 땅을 많이 차지해야 이기는 바둑. 상대편의 왕을 먼저 제거해야 이기는 장기. 상대방을 먼저 때려 눕혀야 이기는 수많은 격투기 경기. 경마, 축구, 야구, 포커, 노래방, 미술대회, 음악 경연 대회,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전부 모든 게임이 다 어른들의 고착화된 사고체계의 정체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들이에요.

 

인간들의 삶 전체를 그러한 것들이 작게 모형하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이겨야 하고 크게 돼야 하고 먼저 때려 눕혀야 하고 먼저 성공을 해야 돼요. 그러한 게임에는 절대 용서와 사랑과 믿음과 화해가 가입이 되면 안 됩니다. 그러면 게임이라는 거 자체가 성립이 안돼요 그게 어른들의 세상이에요. 어른들의 세상은 그 자체가 게임이에요. 그래서 그 속에서는 진정한 용서와 사랑이 있을 수가 없어요

그런 어른들의 세상의 큰 자 싸움이 종교와 일상으로 들어오게 되면 거기서도 경쟁이 일어납니다. 누가 더 열심히 기도하는가, 누가 더 착한 일을 많이 하는가, 누가 더 봉사를 많이 하는가 등등...그리고 그 성취 정도에 따라 반대 급부 그 보상을 바라게 되는게 타락한 인간들의 세상이에요. 어른들에 세상이에요그래서 교회에서도  '내가 이만큼 했으니까 상급이 더 크겠지?  하늘나라에 가서 나에게 하느님이 상을 더 많이 주겠지?' 고 인간들이 지옥 갑니다. 그게 어른들의 세상의 사고체계거든요 하늘나라에는 상급 없어요. 그런거 기대하시는거 자체가 여러분은 은혜를 모른다라는 거예요.

 

지금 제자들이 바로 그런 경쟁을 하고 있는 거예요. 누가 더 큰 자처럼 살고 있는 자인지를 따지고 있고 잘난척하고 있단 말이에요. 그것으로 말미암아 하늘나라에서 누가 높은 자리에 앉게 될 것인가를 점치고 있는 거예요. 제자들이... 주님은 그들에게 그 부모 의존적 존재로서의 어린아이를 보여주시는 거예요. 어린아이가 착해서가 아니라, 거기에서 어떤 메시지를 받으라라는 거예요. 어린아이는 세상에 고착화된 사고체계로 세상을 바라보지 않죠? 그래서 어린아이들에게 딱지가 소중한 거예요. 딱지를 소중하게 여기는 게 잘하는 거란 뜻이 아닙니다. 어른들의 세계관과 가치관 속에서 딱지는 무가치하고 무용한 거죠. 그런데 아이들에게는 그러한 고착화된 세계관과 가치관이 없단 말이에요. 계산이 없단 말이에요.

 성도는 그렇게 어른들의 고착화된 가치관과 사고체계에 의해 힘과 가치로 규정되어진 그런 것으로 자신의 위상을 높이고 자랑하는 자가 아닌 어린아이와 같은 세계관과 가치관으로 사는 자들이라는 거예요. 거기가 하늘나라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늘나라은 하느님의 은혜로 건설이 되고 하느님의 은혜로 운영이 되며 하느님의 은혜로 통치가 되는 곳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곳에 하느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이들이 사는 거예요따라서 하늘나라에서는 절대 큰 자와 작은 자의 구별이 있을 수도 없고, 상급 같은 개념이 있을 수가 없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은혜이기 때문에... 상급이라는 것은 내가 한 행위에 의한 보상이잖아요? 근데 하늘나라에 그런 것이 없단 말입니다. 한마디로 자기가 한 행위에 대해 합당한 대우를 요구하거나 받을 수 있는 곳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만을 구하고 바라보며 사는 곳이 하늘나라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렇게 어른들의 큰 자 싸움의 일환으로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모든 열심히 겉으로 보기에는 기특해 보인다 할지라도, 오히려 그게  하느님 나라를 삼켜 버리는 행위다라고 이야기를 해요.

시편 6910절 보세요. 10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불태우고 당신을 모욕하는 자들의 모욕이 제 위로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교회 안에서 열심을 부리는 그 열심이 여러분을 삼킬 수 있다라는걸 잊지 마세요. 그 열심이 하느님의 은혜에 의한 열심이 아니라 나를 자랑하고 나를 높이기 위한 열심이였을땐 그게 반드시 여러분을 삼켜 지옥으로 끌고 간다는 거예요.

11 제가 단식하며 눈물을 흘린 것이 저에게는 우셋거리가 되었습니다. 곡을 하고 단식을 했어요. 종교행위를 죽어라고 했는데 그것이 도리어 나의 욕이 되었으며 12 자루옷을 의복으로 삼은 제가 저들에게는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회개했다라는 거예요. 다윗이 자신의 성전에 대한 열심이 오히려 자신을 삼켰다고 말을 하고, 기도와 단식이 오히려 자신에게 욕이 되었다 그래요.

주님께서 옛 성전에 들어가셔서 그 속에서 행해지는 행위를 전부 때려 부수셨을 때 제자들이 바로 이 구절을 떠올렸다 그러죠. 요한복음에 나오잖아요.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그들이 그토록 열심을 부리면서 와글와글와글 성전에서 뭔가를 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행위를 예수님이 기각해 버린건 너희들의 행위는 너희들을 지금 삼키고 있는 행위다 라고 선언해 버린거란 뜻이에요.

율법과 제사와 선행이라는 인간의 행위가 복음과 연계되지 않을땐 반드시 그 열심있는 행위가 그를 삼켜 지옥으로 끌고 가게 돼요. 하늘나라는 그렇게 계산하여 사는 곳이 아니라는 거예요. 오직 은혜로만 살게 되는 곳이라는 곳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어린아이를 모델로 해서 하늘나라를 설명하고 계신 거예요. 그런데 재미있는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해서도  어린아이들아 라고 부른다는걸 아세요?

마르코복음 1024절 보십시오. 24 제자들은 그분의 말씀에 놀랐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거듭 말씀하셨다. “얘들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이게 지금 고 어린아이 이야기 바로 밑에 나오는 이야기거든요. 여기에서 얘들아 테크논이란 단어가 어린아이들 이란 뜻이에요.

그러니까 마태복음 18장 서두의 어린아이 이야기는 세상의 어린아이들인 제자들 앞에서 진짜 어린아이가 등장하여 그 세상의 어린아이들을 하늘의 어린아이로 끌어들이는 구속의 그림인 거예요.

마태복음 185절로 다시 한번 가볼게요. 여러분 되게 중요한 거니까 잘 보세요. 5 또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예수님은 지금 당신을 어린아이에 비유하고 있죠. 나를 받아들이는 거라 그러잖아요. 어린아이를 받아들이면... 그러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어린아이처럼 오셨다라는 거예요. 어린아이로 오셨다는 거예요. 세상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밟고 오셨다는 거예요. 그래서 연약한 순으로 싫어 버리신바 되시는 몸으로 구유로 오시는 거예요.

왕이 세상의 가치관과 세계관에 의하면 그런 모습으로 오면 안 되잖아요. 그런데 그 세상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밟고 오셨기 때문에, 하늘왕이  연약한 모습으로 오신 거예요. 어린아이로 오신 거예요. 그리고는 결국 인간들의 처음자리인 어린아기로 연약하게 죽어 버린 거예요. 십자가에서... 그러한 어린아이로 오신 예수의 삶을 이해하고 그 무익해 보이는 어린아이로서의 예수를 받아들이는 자만이 하늘나라의 어린아이로 편입이 된다는 거예요. 거기에 믿음이 필요한 거예요.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했어요? 저런 어린아이 같은 예수는 필요 없다 그랬죠? 민속 메시아사상 강력한 군주로 오는 메시아를 기다렸잖아요. 그러니까 어린아이를 때려죽인 거 아닙니까? 그런 자들은 안된다라는 것입니다. 마르코복음으로 가보면 예수님께서 뒤쪽 샌드위치 빵에 어린아이를 궂이 단수로 쓰시는 장면이 나와요.

마르코복음 1013-16. 13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들을 쓰다듬어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었다. 14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보시고 언짢아하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16 그러고 나서 어린이들을 끌어안으시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축복해 주셨다.

 

예수님은 이 땅에 하느님의 어린아이로 오셨어요. 완전한 하느님 절대 의존자의 삶을 사셨어요. 그게 어린 아이잖아요. 부모가 없으면 애기는 죽어요. 그런 어린아이로 오셨다는 거예요. 절대 순종하고 절대 의존하는 자로 오셨다는 거예요. 아버지가 시키는 말만 했고 아버지가 시키는 일만 하셨어요. 그게 어린아이에요. 딴 일하면 아버지한테 매 맞잖아요. 말 안 들으면 매 맞잖아요.

자신의 계획, 자신의 계산. 자신의 가치관과 세계관과 전혀 무관한 행보를 걸어요. 그래서 그분은 어른들의 세상이 가치로 규정하고 있는 것들을 하나도 소유하지 않고 온 거예요. 그게 이사야서 53장이에요.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딱지나 구슬처럼 보이는 것들 그 연약함 만을 입고 오셨단 말이에요. 어린아이처럼... 그러니까 사람들이 그러는 거예요. 어른들이... 이 세상 어른들이 '에이 저게 뭐야 딱지하고 구슬을 갖고 잘난척하고 있네?' '저게 뭐야?'  어른들의 세상은 절대 그 천국의 어린아이의 행색이나 행보를 이해하지 못해요. 그래서 무시하고 때려죽이는 거예요.

그런데 창조이전에 하느님께서 택한 자들만이 그 어린아이의 삶 십자가와 수난의 삶을 이해하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는 그 어린아이를 받아들이고 똑같은 어린아이의 삶으로 투입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를 세워 놓으시고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이라고 이야기하시는 거예요. 어린아이로 끌어당기는 거예요. 우리를 초청하시는 거예요. 호세아서로 가보면 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어린아이들로 부르셨는지가 조금 더 명확해져요. 호세아서 111-31 이스라엘이 아이였을 때에 나는 그를 사랑하여 나의 그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2 그러나 내가 부를수록 그들은 나에게서 멀어져 갔다. 그들은 바알들에게 희생 제물을 바치고 우상들에게 향을 피워 올렸다. 3 내가 에프라임에게 걸음마를 가르쳐 주고 내 팔로 안아 주었지만 그들은 내가 자기들의 병을 고쳐 준 줄을 알지 못하였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린아이들로 부르고 계세요. 그런데 하느님의 은혜를 입기 전에 어린아이들은 이 모양이래는 거예요. 하느님의 은혜를 입기 전에 어린아이들은 아버지의 말을 전혀 듣지 않아요. 심지어 아버지가  치료를 해주려고 해도 그게 무엇인지를 모른대요 그게 누굽니까? 아담이었잖아요. '나도 하느님처럼 되겠다' 그런데 그 어른흉내내는 아이들을 하느님 아버지께서 내치지 않고 고쳐내시고야 마는 거예요. 바로 그 이야기를 지금 예수님이 그림으로 보여주는 거예요.

호세아서 118절 보세요. 8 에프라임아, 내가 어찌 너를 내버리겠느냐? 이스라엘아, 내가 어찌 너를 저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처럼 내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츠보임처럼 만들겠느냐? 내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른다. 9 나는 타오르는 내 분노대로 행동하지 않고 에프라임을 다시는 멸망시키지 않으리라. 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다. 나는 네 가운데에 있는 거룩한 이분노를 터뜨리며 너에게 다가가지 않으리라.

 

 하느님은 이렇게 어른 흉내를 내고 있는 당신의 어린아이들을 진노로 멸하지 않으시고 하늘나라의 어린아이로 고쳐내시는 거예요. 그런데 그 방법이 참으로 신비합니다. 진짜 하느님의 아기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그 아기 속으로 어른 흉내내고 있는 철없는 아기들을 끌어당기는 거예요.

이사야서 95-6절 보세요. 5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났고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습니다. 왕권이 그의 어깨에 놓이고 그의 이름은 놀라운 경륜가, 용맹한 하느님, 영원한 아버지 평화의 군왕이라 불리리이다. 6 다윗의 왕좌와 그의 왕국 위에 놓인 그 왕권은 강대하고 그 평화는 끝이 없으리이다. 그는 이제부터 영원까지 공정과 정의로 그 왕국을 굳게 세우고 지켜 가리이다. 만군의 주님의 열정이 이를 이루시리이다.

 

 만군의 야훼의 열심이! 우리의 열심이 아니란 말입니다. 바로 이 아기가 창세기 315절의 그 여인의 후손으로 난 그 아기인 거고, 갈라디아서 316절의 그 자손인 거예요. 그 씨 제라 후손 이게 다 같은 단어라 그랬습니다.

갈라디아서 316절 보세요. 16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약속을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을 뜻하는 후손들에게가 아니라, 한 사람을 뜻하는 너의 후손에게라고 하셨습니다. 이분이 곧 그리스도이십니다.

창세기 17장에 그 자손이 단수였다라고 바오로가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여기서도 후손들이 아니라 후손이라는 단수를 쓰잖아요. 우리가 조금 아까 마르코복음에서 읽었던  내용과 흡사하죠? 거기서도 단수인 어린아이가 나오고 복수인 어린아이들이 나온다 말입니다. 그게 하늘의 어린아이인 거예요. 예수가 바로 하늘의 어린아이인 거예요. 그 어린아이로 지금 제자들 앞에 그 예수님 앞으로 나왔던 어린아이가 예수님의 모형으로 서 있는 거예요.

 

 하느님은 창조이전에 당신의 어린아이들을 택하세요. 하느님의 백성은 하느님의 자녀들로 택함을 받아요. 어린아이들이에요. 그래서 어린아이여야 되는데 하느님 아버지만 의존하여 살아야 하는 그 존재 어린아이들이, 그들이 선악과를 따먹고 이 세상에서 스스로 선악의 판단을 하면서 어른 흉내를 내며 사는 거예요. 그게 어른 흉내를 내며 사는 어린아이들...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선악을 판단하고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많은 성취를 한 사람을 잘 산다고 이야기를 하고 또 이 세상의 힘을 많이 소유한 사람을 강한 자라고 이야기를 하고 자기들끼리 판단을 해버리는 거예요. 선악의 판단! 누가 큰 자인 지를 겨루고 그 성취와 업적의 정도에 따라서 보상도 기대하며 살아요. 그 어른들에게서 한 아기가 태어나는 거예요. 그게 요한묵시록 12장의 이야기예요. 거기서 여자가 어른이 아기를 낳잖아요? 그 아기가 누구예요? 예수였죠. 어른 흉내내는 교회가, 교회가 여자잖아요. 어린 아기를 낳는데 그 아기가 잉태되는 순간 어른 흉내내는 어미가 아기에게 먹히는 거예요.

 

잘 생각해 보세요 지금 여기 아기가진 사람 있어요. 그 아기가 그 어미의 뱃속에 잉태가 되면 그 아기에 의해 어미의 옛사람이 먹히는 겁니다. 어미의 몸이 망가지고 어미의 영향분이 아기에게로 뺏기게 돼요. 먹히는 거예요. 그렇게 먹히고 먹히다가 어미가 결국 거반 죽죠. 그게 출산의 현장이에요. 거반 어미가 죽고 결국 생명이 탄생이 되는 거예요 교회가 예수를 낳는다는 건 바로 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교회는 어른 흉내내고 있는 어린아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함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서 그 아기에게 먹혀 결국은 아기가 되는 거예요. 교회는 예수를 낳고 예수는 교회를 낳는 거예요 그러한 하늘나라의 현실을 다윗이 이렇게 노래하죠.

시편 1311절 보세요. 1 주님, 제 마음은 오만하지 않고 제 눈은 높지 않습니다. 저는 거창한 것을 따라나서지도 주제넘게 놀라운 것을 찾아 나서지도 않습니다. 2 오히려 저는 제 영혼을 가다듬고 가라앉혔습니다. 어미 품에 안긴 젖 뗀 아기 같습니다. 저에게 제 영혼은 젖 뗀 아기 같습니다. 3 이스라엘아, 주님을 고대하여라, 이제부터 영원까지.

 

이렇게 젖뗀 아기가 아버지만을 의지하여 사는 것처럼 하느님의 백성들이 막 젖을 뗀 아기가 되어서 아버지의 세계관과 아버지의 가치관으로 선악을 구별하며 아버지의 은혜로만 존재하고 살아가는 그곳이 바로 하늘나라인 거예요 나중에는 젖뗀 아기 정도가 아니라 어머니의 자궁 속에 아기가 되어서 어머니의 생명선이 닿지 않으면 도저히 존재가 불가능한! 완전한 하느님 절대 의존적 존재로 완성이 되는 거예요. 그걸 다른 말로 죽은 흙의 자리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하느님을 의존하지 않으면 요만큼도 존재할 수 없는 그런 죽은 자의 자리,

이렇게 누가 크냐를 재는 이 세상의 사고방식과 오직 은혜라는 하늘의 사고방식은 절대 화해될 수 없는 거예요. 바로 이 이야기가 오늘 본문을 양쪽에서 감싸고 있는 샌드위치 빵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단순히 이혼은 하면 안된다라는 그러한 유치한 이야기가 아니란걸 미루어 짐작하실 수 있겠죠.

 

 성경에서 우리가 반드시 배제하고 읽어야 될게 인간 종교 도덕 윤리에요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혼을 해야 되나요 말아야 되나요? 이런 교훈 안 한다 말입니다. 성경은요... 그러니까 도덕책 수준으로 성경을 배워왔기 때문에 그 수준을 못 벗어나는 거예요.

마태복음 186-10절 보세요 6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달고 바다 깊은 곳에 빠지는 편이 낫다. 7 불행하여라,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많은 이 세상! 사실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은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을 하는 사람! 8 네 손이나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던져 버려라. 두 손이나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불구자나 절름발이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9 또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 두 눈을 가지고 불타는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한 눈으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10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여기에서 작은이는 당연히 앞서 언급이 된 어린아이죠. 그러니까 작은이잖아요. 따라서 그 작은이는 지금 이게 쭉 연결되는 이야기에요그들은 이 세상에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 등의 연약한 모습으로 무기력한 모습으로 보여지게 되요. 은이니깐요.

그런데 하느님 나라의 존재양식은 각 개체가 완전히 비워지고 약해지는 가운데 그릇으로 존재하는 가운데 하느님의 생명력이 가득 채워짐으로 완료가 되는 거예요. 존재로서 완료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느님 나라의 존재라는 건 그 자체로서 존재가치가 있는게 아니라, 그 존재는 그릇으로 비워지고 하느님의 생명력이 부어져서 비로소 존재로 완료가 되는 거라 말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 세계관과 가치관으로 작은이를 어린아이를 그저 약한 작은이로 업신여기고 무시하는 것은 연자 맷돌을 목에 걸고 바다에 빠지는 멸망을 자초하는 거예요. ? 하느님 나라의 삶의 원리 존재 양식을 이해 못하는 거니까!

그래서 그들은 작은이를 그냥 작은이로 연약한 자로 밖에 인정하지 못한다 말입니다. 자 그러한 자들을 '야 이렇게 연약한 것에 하느님의 생명력이 부어져서 비로소 존재화가 되는게 하늘나라구나'를 아는 건 믿음에 의해서만 알 수 있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걸 모른다라는건 믿음이 없다는 이야기이므로, 그들은 목에다가 연자 맷돌 달고 바다로 저주의 바다로 빠지는 거랑 똑같다란 거예요. 멸망받는다란 뜻입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에...

10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하잖아요.

그건 주님께서 히브리 사람들의 수호천사 개념을 들어서 설명을 하시는 거예요. 수호천사가 있다는 말이 아니라, 히브리 사람들은 다 믿었단 말이에요 수호천사가 있다고 히브리 사람들은 하느님의 백성들에게는 각자의 수호천사가 있다고 믿었어요. 그래서 사도행전 12장에 보면 베드로가 감옥에서 나와서 예루살렘 교회에게 가잖아요. 그때 비자가 나와서 '어 베드로네?' 그러고 가갖고 베드로가 왔어요. 그러니까 교회가 뭐라 그래요? 거기 모인 사람들이? '베드로의 천사겠지' 그러잖아요. 그렇죠? 예 교회까지도 그렇게 수호천사를 믿고 있었단 말이에요. 당시에는...

우리에게는 수호천사 정도가 아니라 하느님이 직접 들어와 계신다 말이에요. 그러니까 무슨 수호천사에요. 수호천사는... 하느님이 지금 뭔가를 설명하기 위해 그들이 갖고 있는 철떡같이 믿고 있는 어떤 개념을 들어서 설명하고 있는 거예요. 뭔가를...

지금 주님은 이 세상에서 작은이로 어린아이로 약자로 보인다고 해서 그걸 약함으로 못남으로 판단하지 말아라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들의 천사들이 하느님의 나라에서 하느님을 뵙는다라는 건, 그 작은이들이 하느님의 보호하심 아래에 있다라는 말씀을 에둘러 표현을 하시는 거예요. 그들은 자신의 몸과, 자신의 행위, 자신의 열심과, 노력을 자기 것으로 챙기죠. 어떻게 해서든 자기 스스로 자신을 하느님의 자리로 올려놓아야 하기 때문이에요.

그런 자들이 종교에 귀의를 하게 되면 자신들의 죄를 발견할 때마다 자신의 가능성을 부인하지 못하고 무력함을 인정하지 못하는 자들은 반드시 열심을 부리게 돼요. 그런 열심이 종교인으로 들어오게 되면 인간들이 자신의 죄를 발견할 때마다 손을 찢고 발을 찢고 눈알을 뽑는 기특한 열심을 부리게 되는 거예요. 그게 종교행위입니다. 율법주의의 전형이에요 그런 자들이 작은이들을 없신여기는 거예요. 나는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너는 왜 여전히 어린아이같이 그 모양이야?' 판단하게 된다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해서 온몸이 다 짤려나가서 대가리만 하나 남았어요. 그런다고 하늘나라 갑니까? 그 안에 있는 죄성이 해결돼요? 아니란 말입니다. 그렇게 손발을 찍는 열심으로 죄를 경계하라는 말이 아니에요. 그렇게 해도 너희는 못 들어간다라는 거예요. 너희들은 이 작은자로 오신 예수를 받아들여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라는 것을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손발이 찍혀야 할 때 바보같고 어린아이같은 우리 주님의 손발이 찍힌 거고, 우리의 눈알이 뽑혀져야 할 때 십자가 위에서 우리 주님의 눈이 뽑힌 거예요. 그 무력한 십자가를 의지하는게 작은이를 대접하는 거예요.

'이 작은이 어린아이로 오신 예수가 날 위해 그런 고난을 당하셨구나!' 그걸 믿음으로 받아들이는게 작은이를 대접하는 거예요. 어린아이를 받아들이는 거예요. 그래서 이 어린아이 작은이를 받아들이는게 나를 받아들이는 거다라고 연결을 하시는 거란 말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십자가의 길을 가는 작은이가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성도의 삶인 거예요. 그러나 비록 그 길이 힘들고 어렵지만 하느님께서 그들을 직접 보호하시니까 걱정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들의 천사가 하느님 나라에서 하느님 얼굴을 뵈옵는다라는 의미인 거예요.

 

그리고는 길 잃은 양의 이야기가 등장해요. 지금 쭉 이어지는 거예요. 역시 어린아이 작은이라는 단어가 계속 이어져요. 12절 보세요 12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13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14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지금 어린아이의 이야기로 시작해서 계속 어린아이의 이야기로 이어지고 있어요. 그리고 거기에 이혼 이야기가 붙어있다 말입니다. 그거 놓치지 마시란 말이에요. 그 문맥을! 거기에서 주님은 길을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작은이에 비유하고 계시죠? 그 작은이가 목자에 의해 찾아질 때 하늘 아버지가 기뻐하신다는 거예요. 그러면 거기에서 작은이의 정의가 내려지죠? 작은이는 자기의 능력을 발휘하여 길을 안 잃는 그러한 열심과 노력과 어떤 성취를 내놓는 자가 아니라, 자신은 길을 잃어버린 자였는데 그렇게 연약한 자인데 아버지에 의해 찾아진 자다라는 은혜와 자비를 인식하고 있는 자가 작은자라는 뜻이에요. 그게 잃어버렸다 찾은 양이란 말입니다. 나머지 99마리는 '내가 왜 길을 잃어버려 나는 잃어버린 적 없어!'라는 율법주의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하느님은 99이라는 숫자나 그들이 가진 길을 잃지 않을 수 있는 힘을 중요하게 보시는게 아니란 뜻이에요. 하느님은 당신의 은혜 앞에 무릎을 꿇고, '나는 아버지가 찾아주시지 않았다면 영원한 멸망에 처해질 수밖에 없었던 자!'라는 것을 올바로 인식하고 고백하는 걸 소중히 보신다는 말이에요. 그게 작은이예요. 그런데 그렇게 잃어버렸던 양을 찾는 데 잃어버린 양이 투입이 되는 거예요. 엄밀히 말해서 하느님으로부터 잃어버림을 당할 수 있는 분은 하느님과 하나였던 하느님의 아들뿐이에요. 잃어버림 이라는 개념 자체가 하나였음 소유라는걸 전제하는 개념이잖아요. 그래야 잃어버릴 수 있죠

 

마태복음 18장에는 이미 양쪽으로 분류가 된 형제와 가라지들을 분별해내야 하는 교회의 이야기로 맥을 이은 후에 용서의 비유로 건너가요. 그 용서의 비유에는 임금과, 일만 달란트 빚진 자, 백 데나리온 빚진 자 이렇게 세 층이 나와요. 그리고 층과 층 사이에는 관계라는게 성립이 되죠 그래서 임금과 일만 달란트 빚진 자와의 관계가 설정이 되고, 일만 달란트 빚졌다가 탕감을 받은 자와 일백 데나리온 빚진 자와의 관계가 설정이 돼요. 두 관계가 나와요. 세 층이 나오고.

먼저 임금과 일만 달란트 빚진 자와의 관계는 용서와 은혜의 영역 안에서 성립이 되죠? 임금이 용서를 한다 말이에요. 임금은 용서하는 분이고 일만 달란트 빚진 자는 용서받는 자예요. 그렇게 관계가 성립이 돼요. 그리고 그 관계의 우산 아래로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자와 일백 데나리온 빚진 자와의 관계가 또 등장하죠. 그런데 그 관계에 임금이 개입을 하고 나서는 거예요. 그게 중요한 거예요.

임금을 일만 달란트 빚진 자를 탕감해 주는 것으로 빠지는게 아니라, 그 탕감받은 자가 맺고 있는 관계에까지 참견을 하신다 말이에요. '너 왜 용서 안 해?' 이렇게, 임금은 자기가 빚을 탕감해준 어떤 존재가 독자적인 질서체계 독자적인 어떤 관계 그 관계를 따로 챙겨갖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거예요. 임금으로부터 빚을 탕감받은 존재는 그 임금과의 용서의 관계속에서 다른 관계를 바라보아야 한다라는 그런 말이에요.

그건 단순히 내가 용서를 받았으므로 다른 이도 용서를 해야한다라는 식의 그런 용서의 촉구를 말하는게 아닙니다. 내가 용서받았으므로 나도 용서를 해야 된다라는 이야기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 일만 달란트 빚진 자는 자기가 20만년을 일해도 갚을 수 없는 엄청난 빚을 진 자예요. 그건 갚을 수 없는 무한의 빚인 사망의 빚을 상징하는 거예요. 그는 무릎을 꿇는 간절함과 가족들 모두를 동원하는 열심 등으로도 그 빚을 갚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요. 그래서 그런 그림이 그려 있는 거예요. 그런 그가 그 빚을 갚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채권자가 거저 빛을 없애주는 방법밖에 없어요. 거저 빚을 없애 주는 방법밖에 없어요.

임금은 그렇게 해줬습니다. 그런데 그가 자기에게 빚진 자를 만났어요. 일만 달란트에 비하면 소액이에요. 그런데 그 빚을 반드시 받아내고야 말겠다는 일념에 그 소액 채무자를 감옥에 넣어버리는 거예요. 그는 지금 임금과 자신과의 용서의 관계가 자신의 일을 간섭하신다라는.... 자신의 삶을 간섭하신다라는 사실을 잊고, 독자적인 질서 체계 속에서 관계를 구축하고 있는 거예요. 그게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한 인간의 선악구조라는 거예요. 임금과의 그 용서에 관계가 그에 따른 관계와 전혀 이렇게 상응하지 못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비유를 듣고 내가 나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날 감옥에 넣으실지도 몰라라고 초조해하면서 용서가 안되는데도 '용서해야 돼. 하고야 말 거야! 나는 반드시 할 거야!' 요렇게 초조해 하는거 자체가 감옥에 들어갈 일이다라는 뜻이에요. 왜 니가 임금과 너와의 관계 그 관계의 우산을 벗어나서 왜 스스로 니가 독자적인 질서체계를 구축하고 거기에서 관계를 설정하느냐는 거예요.

 

그 용서의 비유가 어떻게 시작이 돼요? 베드로가 스승님 우리가 용서를 몇 번이나 해야 됩니까? 일곱 번까지 하면 됩니까?라고 물어요. 그때 주님이 일곱 번씩 일흔번 하라 그래요. 그러면 491번째는 용서 안 해도 된다는 말인가요? 490번까지만 용서해 줘야 돼요?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7이라는 숫자는 완전수라 그랬습니다. 일곱번씩 일흔 번이라는건 7곱하기 7곱하기 10 거기에 완전수 10이 하나 더 보태지는 거예요. 완전한 용서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7곱하기 7하면 생각나는거 없으세요? 희년이잖아요. 희년. 모든 채무가 변제되고 노예가 풀려나고 안식의 절정을 이루게 되는 희년. 7년마다 안식년 안식년 안식년 가다가 일곱번째의 희년이란 말이에요. 그 희년을 완성하기 위해 예수님이 오신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회당에 들어가서 바로 그 희년.... 이사야서의 이야기를 읽어 주죠. 내가 바로 그 희년을 완성하러 온다라고 이야기하시잖아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몇 번이나 용서를 해야 합니까?라고 묻는 베드로에게 '너는 용서를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용서를 받아야 하는 존재다'라는 것을 가르치고 계시는 거예요. 전한 용서 희년 그걸 완성하신 분은 예수밖에 없어요. 마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누가 내 이웃입니까? 내가 확 가서 사랑해 버릴께요.'라고 했던 율법사에게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냐?'를 물음으로 해서 '너는 강도만난 자야! 거반 죽은 자야 !......그런데 네가 누구를 사랑해? 너는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온 예수에 의해 사랑을 받아 영생에 이르러야 하는 자야!' 라고 말씀해 주신 그 이야기와 똑같은 그림인 거예요.

  

진짜 용서 영원한 용서는 하느님께만 속한 거라는 거예요. 인간은 절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용서를 할 수가 있는 존재가 아니에요. 버릴 수는 있어요. 기억력이 안좋아서 잊어 버릴 수는 있지만 우리가 용서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렇게 나의 모든 죄가 하느에 의해 완전하게 용서가 되었다는 것을 희년의 개념으로 완전하게 용서가 되었다라는 것을 올바로 인식하고 있는 이들에게 이 세상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작은 문제들이 백 데나리온 짜리(2000원 짜리)로 여겨지게 되는 거예요. 거기에서 진짜 용서가 되는 거예요. '용서해야지 용서해야 하느이 나를 용서하실 거야 그러니까 난 반드시 용서하고야 말 거야' 벼르고 벼르다가 나중에 죽이는 거예요. 인간은 그래요. 그들이 감옥간다는 이야기예요. '내가 너를 용서했는데 니가 왜 용서해야 돼 용서해야 돼..... 아니면 감옥에 쳐 넣어 버려 나를 바로 니가 이 용서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한 불신자다.' 그래서 그를 영원한 감옥에 넣으시는 거예요.

 

이 모든 이야기 끝에 붙어 있는 비유가 오늘 본문의 이혼에 관한 충고와 고자의 비유란 말이에요. 그리고 그 밑에 어린아이의 이야기로 밑에 빵이 딱 붙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빵속에 들어있는 속은 전부가 다 일관성이 있는 맥을갖고 있다라는 것을 잊으면 안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렇게 일관성있는 십자가와 은혜의 이야기를 이어가시던 주님께서 갑자기 니들 이혼하면 절대 안된다라는 이야기로 주제를 바꾸시겠어요

오늘 본문을 보시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모세의 율법을 들어서 이혼문제를 거론해요. 모세는 이혼증서를 써주면 이혼을 해도 된다고 했는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냐는 거죠. 고대시대에는 남성 우월주의가 극에 달한 시대였어요. 그래서 여자는 인구계수에도 끼지 못할만큼 천대를 받았습니다. 남자의 부속품 정도였어요. 그래서 남자가 죽으면 부장품으로 여자를 산 채로 순장하기도 한 거예요. 남자의 물건이니까...히브리 남자들은 모세의 율법에 나오는 이혼규례를 자기들 마음대로 해석을 했어요.

신명기 241절 보세요. 1 “어떤 남자가 여자를 맞아들여 혼인하였는데, 그 여자에게서 추한 것이 드러나 눈에 들지 않을 경우, 이혼 증서를 써서 손에 쥐어 주고 자기 집에서 내보낼 수 있다. 2 그 여자가 그의 집을 떠나가서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었는데, 3 두 번째 남편도 그 여자를 싫어하여 이혼 증서를 써서 손에 쥐어 주고 자기 집에서 내보낸 경우나,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인 남자가 죽은 경우, 4 그 여자가 이미 더럽혀졌으므로, 그를 내보낸 첫 남편은 다시 그를 아내로 맞아들일 수 없다. 그런 일은 주님 앞에 역겨운 짓이다.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상속 재산으로 주시는 땅에 죄를 끌어들여서는 안 된다.”

 

이 이야기를 정확하게 성취하는게 로마서 7장이에요. 그 둘을 연결하지 못하면 여러분은 성경을 절대 이해할 수가 없어요. 그냥 이혼하지 말자 이혼하지 않고 꾹 참고 사는게 왔다다 이렇게 밖에 해석 못해요. 히브리 남자들은 1절에 수치되는 일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을 했어요. 여자가 밥을 잘 못해도 이혼을 했고, 반찬이 맛이 없어도 이혼을 했어요. 그게 수치되는 일이였거든요. 이웃집 아낙네 보다 못생겨도 이혼을 했고, 빨래를 잘 못해도 이혼을 했어요. 바가지를 긁어도 이혼을 했고, 시댁식구를 남편앞에서 욕을해도 이혼을 했어요. 살만하죠. 그렇게 극단적으로 이혼규례를 해석한건 그들의 율법관 속에서 가정은 거룩하고 잡음이 없는 행복한 곳이여야 한다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그래요. 남자가 그 가정을 지켜야 한다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아내 때문에 남편이 불편하고 화가 나는 일이 생기면 그 거룩하고 흠이 없어야 하는 가정에 불화가 생기게 되잖아요. 그렇게 불화가 생기게 되면 율법에 의해 올바르고 거룩한 가정 확립에 방해가 된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 불화의 싹을 아예 짤라 버리는 거예요. 그게 하느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올바른 처신이라 생각했단 말이에요. 그래서 마구 이혼을 남발한 거예요. 가정을 행복하게 지키기 위해서. 거룩한 삶을 살려고 그들이 이혼을 남발했단 말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이혼의 남발은 거룩을 수호하겠다라는 기특한 발상이라기 보다는, 한 여자에게 만족하지 못하는 남자들의 정욕을 채우는 수단으로 사용이 되었던 거예요.

그래서 모세의 율법에 함부로 아내를 내어 쫒지 말고 정당한 절차를 밟아서 이혼증서를 써주고 헤어져라라는 항목이 기입되어 있었던 거예요. 너무 이혼을 자주하니까... 그래도 절차라도 밟고 이혼을 하라. 그래서 이혼증서를 써주라라는 말이 율법에 기입이 된거라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주님께서 그건 너희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는거다라고 이야기해주시잖아요? 그러니까 이혼을 하려거든 이혼증서를 써주고 이혼을 하라라는건 너무나 함부로 이혼을 하는 자들의 그 죄악상! 자기의 행복만을 위해 함부로 이혼도 남발하는 인간의 죄악상을 폭로하는 거지, 이혼을 합법적으로 승인해준게 아니란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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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그들에게 음행한 연고외에 아내를 버리는 것은 간음이다라고 그래요. 그러니까 한 몸이 둘로 갈라지는 일은 절대 있을 수 없다는걸 강조하는 거예요. 한 몸이 갈라지면 죽으니까...그렇다면 주님은 지금 성도에게 있어서 이혼은 절대 불가하다는 것을 피력하고 계신거 아닌가?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아닙니다! 지금 이 비유는 어린아이 작은이로 오신 예수님의 그 십자가 은혜 용서의 은혜로 흐르고 있단 말이에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질문을 받으시고 어디서부터 설명을 하시냐면 창세기에서 부터 설명을 하세요.

본문 4-6절을 보세요. 4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는 읽어 보지 않았느냐? 창조주께서 처음부터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나서, 5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하고 이르셨다. 6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한몸. 한 몸이라는 개념이 나오죠 하느님께서 태초에 하느님의 형상으로 사람을 만드셨는데 남자만 만들지 않고 여자만 만들지 않고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대요. 그 둘을 한몸으로 엮어 버리셨대요. 그러니까 지금 남자라는 성과 여자라는 성 이외에 한 몸이라는 또다른 초월적 존재가 등장하고 있는 거예요. 한 몸이라는 사람을 만드셨는데... 그 안에 남자와 여자가 들어있는 거예요. 쉽게 말하면 한 몸이라는 어떤 존재... 3의 초월적인 성, 천국백성의 그 성을 설명하기 위해 남자와 여자라는 성이 부부라는 관계가 설명용으로 쓰이고 있다라는 이야기인 거예요. 어차피 천국에서는 남자라는 성과 여자라는 성이 불필요해요. 그래서 그곳에서는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이 없다라는 거예요. 천국에도 없는걸 왜 굳이 인간세상에서 우리에게 경험을 해주느냐가 여기서부터 설명이 되는 거란 말입니다 .

 

창세기 126절 보세요. 26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그가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집짐승과 온갖 들짐승과 땅을 기어 다니는 온갖 것을 다스리게 하자.” 27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다.

26절에서는 하느님이 우리의 형상이라고 당신을 복수로 표현하세요. 그런데 27절에 보시면 자기 형상이라고 단수로 표현하시죠그건 바로 삼위 하느님의 연합의 관계. 그 연합의 관계로 관계되어지는... 어떤 새로운 존재를 창조하실 것임을 암시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의 형상대로 어떤 존재를 만들자 그래놓고 자기의 형상 단수 복수의 형상이 나오고 단수의 형상이 나오는 거예요.

 

오늘 이 신약에서도 어린아이들과 어린아이가 나오는 것처럼 우리들의 형상과, 자기의 형상 복수의 형상과, 단수의 형상이 등장하는 거라 말입니다. 복수이면서 단수가 되는 어떤 존재.... 그게 부부 아닌가요? 아닙니다. 사람과 사람은 각 개체가 하나가 연합이 될 수 없어요. 연합은 신과 신, 신과 피조물 사이에서만 가능한 개념이에요, 그게 연합이에요,

그런데 부부가 한 몸이 아니라 교회가 한 몸인 거예요. 다른 곳에서 부부는 한 몸이다라고 이야기한건 교회의 한몸됨을 모형으로 설명하는 것뿐이에요. 사람과 사람은 한 몸이 될 수 없어요.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형상으로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 그들을 한 몸으로 만드신건 예수라는 하느님의 아들이 남자가 되어서 하느님의 품을 떠나 자신의 옆구리를 뚫고 들어온 하느님의 손에 의한 희생이죠. 자신의 신체 일부를 떼어내어 여자 즉 하느님의 백성들을 창조해 내어, 왜 아담의 신체 일부가 떨어지냐면, 아담에 의해, 남자에 의해, 예수에 의해 창조된 존재가 예수화된다라는 뜻인 거예요. 그렇게 하느님의 백성들을 창조해 내어서 예수와 하느님의 백성들이 한 몸이 되는 그 연합이 되는 구원의 이야기를 설명하는 거예요. 부부의 이야기는... 그 이야기가 창세기 1장부터 등장하는 거란 말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백성들과 신랑이신 어린 양의 그 혼인잔치. 묵시록에 나오는 어린양의 혼인잔치를 창세기 1장부터 설명해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경에는 절대 인간 종교 도덕 윤리 이런 얘기 없어요. 창세기 11절부터 요한묵시록 마지막까지 어린양의 혼인잔치 그 이야기밖에 없어요.

창세기 221절보세요. 21 그래서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 위로 깊은 잠이 쏟아지게 하시어 그를 잠들게 하신 다음, 그의 갈빗대 하나를 빼내시고 그 자리를 살로 메우셨다. 22 주 하느님께서 사람에게서 빼내신 갈빗대로 여자를 지으시고, 그를 사람에게 데려오시자,

보세요. 어떤 존재에게서 여자가 탄생되고 그 여자때문에 남자가 온다 말이에요. 여자가 남자를 낳고 남자가 여자를 낳는 거예요. 여자가 아이를 낳고 아이가 여자를 낳는 그 이야기 지금까지 한 이야기, 그 이야기가 이 부부의 이야기와 이혼의 이야기에 들어가 있는 이야기란 말입니다.

23 사람이 이렇게 부르짖었다.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 불리리라.”

너는 나라는 거예요. 교회야 너는 나다 작은 예수라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를 성경이 여자 신부 이렇게 표현하는 거예요.

24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

한 몸의 개념은 여기 나오는 거예요.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담이 부모가 어디있어요? 아담이 첫번째 사람인데... 바로 예수 아버지 하느님을 떠나는 아들 예수의 이야기를 이 속에 메타포어로 담고 있는 거란 말입니다.

 

성경에서는 항상 잠은 죽음을 상징하는 거잖아요. 예수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의 옆구리가 뚫려서 우리가 교회가 새롭게 창조가 되는 이야기 그게 한몸의 이야기, 유니온 크라이스트, 결혼의 이야기란 말이에요. 그래서 천국의 남자와 여자가 아닌 제 3의 성의 존재들이 살게 된다라는 것이죠. 그래서 서간문에 보면 그 서간문 기자들이 궂이 하느님 나라의 백성들을 성별로 갈라서 기록하지 않아요. 한군데만 볼까요.

에페소서 144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5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좋으신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딸들 굉장히 서운하셨죠? 여기서 왜 아들들이야? 딸들이라고 해도 상관없어요. 어차피 그 성별은 천국에서 아무 상관없어요. 3의 초월적 성이 등장하는 거예요. 어떤 성? 예수와 한 몸이 된 하느님 나라의 백성! 그 이야기를 남자와 여자 결혼으로 그 한몸의 개념을 설명하는 것뿐입니다 

원래 인간은 하느님 절대 의존적 존재로 지어졌다 그랬어요. 그 말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하느님의 형상으로 지으셔서 하느님을 완벽하게 드러내는 존재로 지으셨다는 말로 하느님과 인간의 연합을 말하는 거라 그랬죠. 하느님의 형상은 하느님과 비슷하게 지어졌단 말이 아니라, 하느님을 그대로 드러나는 거예요. 하느님과 똑같은 존재에요. 그래서 예수를 하느님의 형상이라고 하는 거라 그랬죠. 그런데 어떻게 인간이 하느님의 형상이 될 수 있어요?

그런데 피조물이 하느님과의 그 연합을 깨고 이혼을 하고 세상의 다른 힘들과 연합을 도모했어요. 그걸 간음이라고 그러고 음행이라고 하는 거예요. 신명기 24장 그들은 어떻게 할 수 있다? 이혼할 수 있다. 그 상태가 지옥이란 뜻이에요. 자기 마음대로 독자적인 질서 체계를 구축하고 살게 되면 그는 절대 하느님과 연합되어 못살아요.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이혼될 수 있고 그가 지옥간단 뜻이에요. 그거 이외에는 하느님이 끝까지 찾아가셔서 데리고 오는 거예요. 나중에는 보리 한 호멜 반, 은 열 다섯 합이 얼마? 30으로 고멜을 사오는 거예요. 신부로 만들어 버리신 거예요. 더러운 고멜같은 우리를 신랑이 찾아가서 그 창녀촌에 가서 사오는 거예요. 그 간음하고 음행하던 아내를 신랑이 사오는 거예요. 그게 한 몸이에요.

로마서 71절 보세요. 1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율법을 아는 사람들이기에 말합니다. 율법은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만 그 위에 군림한다는 사실을 모릅니까? 2 혼인한 여자는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만 율법으로 그에게 매여 있습니다. 그러나 남편이 죽으면 남편과 관련된 율법에서 풀려납니다. 3 그러므로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 다른 남자에게 몸을 맡기면 간통한 여자라고 불리지만, 남편이 죽으면 그 율법에서 자유로워져, 다른 남자에게 몸을 맡겨도 간통한 여자가 되지 않습니다.

 

다른 남자가 누구예요? 전부인 예수. 하느님. 그렇게 하느님이 율법을 죽여버리고 이 세상 우리의 마음을 빼앗은 이 세상 모든 힘과 가치를 다 죽여 버리고 우리를 하느님께로 당기는 걸 신앙생활이라고 그래요. 그리고 그게 십자가에서 완성이 된거란 말입니다. 그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렇게 우리가 율법과 이 세상의 힘과 우리의 가능성과 연합하여 간음하고 있을때 하느님이 우리에게 내려오셔서 우리를 붙들고 있는 이 세상 남편을 죽여 버리고... 하느님에게로 끌어당기는걸 세례라고 하는 거예요. 세례가 뭐라 그랬어요? 옛사람인 내가 물에 빠져 죽고 새 사람이 물 위로 솟아 오르는게 세례잖아요.

그러니까 전남편에 대해서 내가 죽고 새남편 하느님에 대하여 살아나는거 그걸 세례로 또한번 보여주는 거예요. 그게 결혼이라니깐요. 그래서 여러분은 결혼생활을 통하여 그 구원의 메시지를 배우면 돼요. 하느님은 그 현실을...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셔서 그들을 가정으로 묶으심으로 설명을 하시려 했던 거예요.

그런데 남자와 여자가 선악과를 따먹고 각기 자기 자신을 챙기기 시작했어요. 그러므로 말미암아 하느님과의 연합도 깨졌죠. 이혼이 된거에요. 그리고 그 이후로 모든 인간은 이혼한 존재로 살아요. 하느님과 이혼한 존재! 하느님과 이혼한 존재들이 수평적으로 한 몸이 될 수 있다? 없어요. 그러면 여러분의 인생은 전부 무슨 삶이에요? 이혼한 삶이에요.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은 이혼한 자예요. 거기에서 분리가 일어나고 한 몸이 깨어졌어요.

그래서 여자는 남자를 사모하고 남자는 여자를 다스리는 저주의 상태가 됐어요. 거기서 사모한다라는 말은 애틋하게 그리워 한다는 말이 아니라, 내 마음대로 조정하고 싶어한다는 뜻이에요. 여자는 남자를 조정하고 싶어해요. 남자는 여자를 다스리고 싶어해요. 그래서 늘 충돌이 생겨요. 이 땅의 모든 부부관계는 왜? 우리는 이렇게 결혼을 하고도 한 몸이 아닌 둘로 밖에 살 수 없는가를 배우는 거예요. 아닌데 우리는 한몸인데? 잘 생각해 보세요. 진짜 한몸인지... 한몸인 척하고 싶은 거예요. 모든 인간은 그 어떤 인간도 하느님의 은혜를 온전히 깨닫기 이전에는 한몸으로 못살아요. 우리는 어떻게 결혼을 하고도 두 몸으로 살 수밖에 없냐를 배우는 거예요. 오히려 그리고는 그걸 깨닫고 예수와의 결혼을 추구하는 교훈의 장으로 주어진 것이 결혼이에요. 그것이 결혼이지 뭘 애쓰고 힘써서 깨지지 않도록 지켜내도록 주어진게 결혼 아니란 말입니다.

 

또 자기 무덤을 파요. 아주... 근데 그게 성경이 말하는 진리에요. 힘써 지키세요. 그러나 그 지킴속에서 이걸 지키느라고 내가 얼마나 손해를 감수하며 저 왠수를 저주하는 지도 아울러 깨달으세요. 그걸 한 몸이라고 그럽니까? 지켜지고는 있지만 그게 두 몸이라는 거예요. 그게 이혼한 상태에요. 그래서 모든 인간은요 나는 결혼을 하고도 이혼한 상태로 살고 있구나를 올바로 인식하는 거예요. 진짜로... 나는 이런 존재인데 결혼을 통해서도 한몸을 못이루는 존재인데...예수가 어떻게 나에게 찾아와서 나와 한 몸이 되셨을까!를 배우는 거란 말이에요. 결혼은...

그러니까 억지로 너무 행복할려고 애쓰지 않으셔도 돼요. 너무 행복할려고 애를 쓰다 보면요 그 상대방이 내 행복에 기여하지 않을때 미워지는 거예요. 왜 내가 원하는 행복에 네가 도움이 안되냐는 거예요. 왜 너는 그렇게 못생겼고, 왜 그렇게 가난하고, 너는 왜 그렇게 못배웠냐는 거예요. 왜 성질은 그모양이냐는 거죠. 왜 내 행복에 기여 못하냐는 거예요. 그게 히브리인들이였어요.

네가 나를 행복하게 못해주면 가정의 거룩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래서 억지로 참기는 참는데 그존재가 원수로 느껴지는 거예요. 그게 이혼한 거예요. 그게 한몸 아니라니깐요. 그게 이혼한 거예요.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그 결혼의 관계를 명확하게 교회와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를 설명하는 거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에페소서 531. 31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됩니다.” 32 이는 큰 신비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두고 이 말을 합니다.

 

사람은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한 몸 안돼요. 아무리 밤을 열두달 같이 자도 한몸 안돼요. 딴 몸이에요. 딴 생각해요. 딴 목적으로 살아요. 자기만을 위한 삶을 살아요. 모든 인간이 다 그렇게 살아요. 이렇게 결혼관계라는건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가 어떻게 혼인을 하여 한 몸이 되는가를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일 뿐이에요. 성도는 결혼이라는 한몸되기 프로젝트를 통과하면서 결혼을 통해서도 결코 한몸으로 살지 못하는 자신들을 폭로당하게 돼요.

그 어떤 노력으로도 두 몸일 수밖에 없는 타락한 인간의 실존을 경험하면서 우리는 진짜 우리의 신랑을 기다리게 되는 거예요. 따라서 이혼이라는건 사람이 결혼을 통해서도 결코 하나된 몸으로 존재하지 못하고, 실상은 갈라져서 살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발각당하는 한 현상에 불과한 거예요. 다들 이혼한 상태로 사는데 그게 바로 이러한 모습이다라고 한 현상으로 보여주는게 이혼이에요. 그러니까 이혼한 사람들보면서 여러분들 쯧쯧쯧하고 혀 차시면 안돼요. 우리는 이렇게 열심히 하나됨을 지키고 있는데 저 사람은 인내심이 없어서 둘로 갈라졌다라는 식의 비난을 멈추시란 말입니다.

여러분 모두는 다 갈라져 있어요. 그런데 하느님과 우리가 은혜로 묶이게 되면 그 관계 속에서 수평적인 부부관계를 보게 되고 거기에서 비로소 연합이 일어나는데, 그 관계가 진짜 사랑이고 진짜 용서이고 진짜 섬김이 되는 거예요. 그걸 배워가는 거지...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사랑해 볼께 그러니까 너도 나에게 그마만큼의 사랑을 줘' 그렇게 사랑하다가는 결국 지옥에서 만나게 되는 거예요. 자기만을 위한 삶을 살다가... 따라서 결혼을 하고 안하고 이혼을 하고 안하고가 중요한게 아니라, 결혼이나 이혼을 통하여 인간의 타락한 현실과 하나님의 한몸만들기 프로젝트인 구속의 복음을 올바로 이해하는게 중요한 거예요.

 

고린도전서 724절 보세요. 24 형제 여러분, 저마다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상태대로 하느님과 함께 지내십시오. 25 미혼자들에 관해서는 내가 주님의 명령을 받은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자비를 입어 믿을 만한 사람이 된 자로서 의견을 내놓습니다. 26 현재의 재난 때문에 지금 그대로 있는 것이 사람에게 좋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27 그대는 아내에게 매여 있습니까? 갈라서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대는 아내와 갈라졌습니까? 아내를 얻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28 그러나 그대가 혼인하더라도 죄를 짓는 것은 아닙니다. 또 처녀가 혼인하더라도 죄를 짓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게 혼인하는 이들은 현세의 고통을 겪을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그것을 면하게 하고 싶습니다.

 

이혼을 하고 살던, 혼자 살던, 결혼을 하고 살던 하느님이 허락한 그 상태에서 그냥 살라는 거예요. 뭔가를 배우라는 거예요. 다 괜찮다는 거예요. 그러나 장가가도 죄짓는 거 아니고, 처녀가 시집가도 죄 짓는거 아닌데 결혼하면 육신에 고난은 있다 그거는 알고 가라. 허허허 성경 너무 명쾌하지 않아요. 이 자리에 있는 처녀 총각에게 고합니다. 대단할 대단한거 있을거라고 착각하지 마세요.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그 속에서 인간의 실존과 천국의 실체를 배워 가는 것 뿐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잘난척을 한답시고 남편과 아내 사이가 그런 거라면 차라리 장가들지 않는게 낫겠습니다라고 너스레를 떨었단 말이에요. 그 말은 정말 결혼이라는게 그런 것이라면 어떤 사람이라도 분명 간음이라는 죄를 짓게 될텐데 그렇다면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라도 결혼하지 않는게 낫겠네요라는 말일수도 있지만, 그렇다면 무슨 재미로 결혼을 합니까?라는 인간 정욕의 표출이기도 한거에요. 둘다 인간의 가능성과 가치추구를 버리지 못한 죄예요. 그때 주님께서 정말 너희가 그럴 수 있겠느냐? 너희들 정말 죄 짓지 않기 위해서 너희들 그냥 결혼 안하고 살겠다고 하는데 진짜 너네들 능력으로 그게 될까? 물으시는 거예요.

 

그러면서 고자 이야기하시는 거예요. 고자 즉 성기능을 상실해서 결혼을 못하게 되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그 첫째는 날 때부터 고자인 사람이고, 둘째는 사람이 만들어서 된 고자고, 셋째는 천국을 위하여 된 고자라는 거예요.

첫째는 불가항력적으로 고자가 된 사람이에요. 그 사람은 결혼이 하기 싫어서 안하는게 아니라 못하는 거예요. 둘째는 스스로 고자가 된 사람 그러니까 스스로 거세를 한 사람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걸 율법주의라 그래요. 죄를 짓지 않겠다고 스스로의 팔다리를 찍는 그런 형국이죠. 얘기가 전부 이어지는 거예요. 그렇게 찍는다고 그 마음속의 정욕까지 다스려질 수 있냐 말이에요. 정말 그게 하느님 나라를 위한 결혼 안함이 될까? 물으시는 거예요. 그러나 진짜 고자가 있는데 하느님 나라가 낸 고자가 있는데 그건 누구냐 하면 하늘나라를 위하여 스스로 고자가 되는 자다란 뜻이에요. 그 사람만 예수님의 이 이혼에 관한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혼과 결혼의 이야기를 세상적 가치관과 세계관으로 판단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거예요. 그들만 이혼한 자, 고자, 그 작은이, 어린아이들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을 수 있다라는 뜻이에요. 하느님은 당신 백성의 완성을 위해 당신 백성을 고자로 만들어 버리시기도 하신다는 거예요.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위해 그때에 그는 그 자리에서 하느님 나라로 완성 되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고자라는게 뭐예요? 결혼에서 제외된 자, 이혼한 자, 결혼 안한 자. 그렇게 결혼에서 제외된 자들도 고자도 하느님이 천국을 위해 만든 고자가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들보고 함부로 판단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혼을 해라 마라가 아니라니깐요. 그런 유치한 얘기는 성경에 단 한마디도 안적혀 있어요. 인간이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 교훈에 관한 이야기는 성경에 단 한구절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말입니다. 그 이야기를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묘사하죠.

고린도전서 72929 형제 여러분,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제부터 아내가 있는 사람은 아내가 없는 사람처럼, .....

보세요. 가정이라는걸 결혼이라는걸 자기의 행복의 대상으로 놓게 되면 절대 하느님 나라가 올바로 추구 안된다는 거예요. 마지막때에 어떻게 살라 그래요? 아내 있는 자들이 아내 없는것 처럼 살라는 거예요. 가정을 경솔히 여기라는 뜻이 아니에요. 그 관계 속에서 세상적 행복 추구하지 말라는 거예요. 거기서 반드시 분열이 일어나는 거예요. 반드시 거기서 싸움이 일어나는 거예요. 왜 나를 행복하지 못하게 만들어 주냐고 그렇게 살지 말라는 거예요. 이게 고자인 거예요.

 

하느님 나라를 위해 스스로 고자가 되는거 여기에서 행복을 찾는게 아니라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 속에서 행복을 찾다보면, 당연히 이 수평적인 관계가 올바른 관계로 정립이 되는거라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 수 있는 존재가 하나도 없어서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를 신부로 만들어서 우리와 하나로 연합이 된 거예요. 그걸 배우시면 돼요. 그 은혜의 구속이야기를 배우시면 돼요. 결혼속에서...

그러니까 억지로 오셔서 교회에 와갖고 '우린 너무 행복해' 이런 쑈 안하셔도 돼요. 딴 사람들 염장 지르는 것도 아니고 , 집에서는 소 닭쳐다보듯 쳐다보지도 않으면서~ 괜히 남 앞에서만 손잡고 다리 쓰다듬고 그런거 하지 말란 말이에요우리는 가정을 통하여 자기들은 예수의 은혜가 아니면 평생 가정속에서 이혼한 자로 가정속에서 이혼한 자로 살 수밖에 없는 자들이라는걸 배우면 돼요. 그러니까 너희들 스스로 결혼을 하지 않겠다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이혼하겠다 이런 잘난척하지 말란 뜻이에요. 하느님이 알아서 고자 만들고 알아서 그가 감당할 만한 상황들을 허락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내가 스스로 거세하겠다 스스로 결혼 안하겠다 이게 율법주의라는 거예요.

 

어떠세요 181절부터 19장 전체가 하나로 쫙 뚫리지 않아요? 성경은 그렇게 맥 속에서 읽는 거예요.

하느님은 필요에 의해서 당신 백성들의 고자됨도 하느님 나라를 위해 쓰시는 분이에요. 러니까 스스로 고자되었다고 자랑도 하지 말고 고자된 사람, 연약한 사람, 이혼한 사람, 고아, 과부 이런 사람들을 인간의 선악구조로 함부로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필요에 의해 지금 각자의 자리에서 고자로 살게 만드는 것일수도 있으니까!...우리는 그렇게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위해서 우리의 삶을 하느님께 차압당한 사람들이에요. 세상의 선악구조에 의해서 스스로를 판단하여 비관하지도 마시고 다른 이들을 판단하여 비판하지도 마세요. 성도의 삶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느님에 의해 주도되는 하느님 나라에 관한 일임을 잊지 마시고, 하느님의 진짜 신부들로서 매일같이 그 분열과 갈라짐의 주역으로 살아가는 자신을 폭로당하면서 하느님의 은혜를 더욱 붙드는 분들이 되시란 말이에요.

우리는 이렇게 끊임없이 분리되어지고 끊임없이 분열하고 끊임없이 하느님으로부터도 멀어질려고 하는데, 그 하느님이 보리 한 호멜반, 은 열다섯을 갖고 끝까지 나를 찾아오시는 그 은혜의 하느님. 그 하느님을 배우세요.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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