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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넷째 왕의 전설 - 에자르트 샤퍼 지음, 류해욱 신부 역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8-12-24 조회수681 추천수2 반대(0) 신고
 
 

넷째 왕의 전설 - 에자르트 샤퍼 지음, 류해욱 신부 역

 

  예수 아기님께서 베들레헴에 태어나실 무렵, 그 탄생을 알리는 별이 동방의 슬기로운 세 임금 (박사)뿐 아니라, 러시아 땅의 한 임금에게도 나타났습니다. 이 왕은 위풍이 당당하고 막강한 권력을 행사한 군주가 아닌 다만 지조가 곧고 마음이 착하여 어린이 같이 순진하며, 인정이 많고 친절해서 붙임성이 있는 작은 왕이었습니다.

  언젠가 하늘에 별이 나타나, 온 세상을 다스리실 진정한 임금님이 오심을 알릴 것이고, 그러면 러시아에서 통치하던 왕손은 길을 떠나 경배해야 하리라는 이야기가 선조들로부터 전해 와서 이 작은 왕도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 러시아 땅의 작은 왕이 아직 젊은 나이로 자기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던 그때에, 진정한 임금, 바로 구세주가 오심을 알리는 별이 하늘에 나타났으니, 그는 크나큰 기쁨이 넘쳐 즉시 여행길에 오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는 수행원 없이 혼자 그분을 찾는 여행길에 오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애마(愛馬) 와니카에 안장을 얹게 하였습니다. 작은 왕은 생각했습니다.

 <빈손으로 가서 경의를 표할 수야 없지 않은가. 더구나 그분은 단순히 한 나라를 다스리는 왕이 아니라, 구세주, 바로 지존하신 주님이 아니신가.>

  그는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오시는 지존하신 분에게 경의를 표하는 데 합당한 선물이 무엇일까 오랫동안 깊이 생각하였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으레 부인의 덕과 근면을 보고 남편의 슬기로움을 판단한다는데 생각이 미쳤습니다. 그래서 가장 곱고 부드러운 아마포(亞麻浦)를 몇 필 마련하였습니다. 그밖에 또 제일 보기 좋고 품위 있는 모피도 몇 장 쌌는데 이것 역시 자기 백성인 사냥꾼들이 겨울에 짐승을 잡아 그 가죽을 벗겨 무두질해서 비로오드처럼 반드럽게 손질한 것이었습니다.

  작은 왕은 자기 나라 노동자들이 사금(砂金)을 채취하고 있는 여러 계곡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금을 넣은 작은 가죽 주머니들을 많이 가져오게 했습니다. 그중 가장 아름답고 값진 것들을 골라 지존하신 분에게 바칠 자기 나라의 선물로 가지고 가기로 했습니다.

  끝으로, 또한 여자의 지혜를 따르기로 했습니다. 그는 여자들의 슬기가 세상일을 꾸려 나간다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꿀벌들이 보리수에서 모아온 꿀을 진흙으로 만든 작은 단지에 넣어 가져가기로 했습니다.

 

  작은 왕은 신하들에게 모든 일을 맡기며 자기가 돌아 올 때까지 나라 일을 잘 살피고 서로 의좋게 지내라고 당부한 뒤, 어느 날 밤에 애마 와니카를 타고 길을 떠났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날 밤 그 별이 가장 밝게 빛났기 때문입니다.

  그는 말을 타고 자기 왕국의 땅 끝까지 갔으나 별은 결코 정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국경을 넘어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할 수 없이 낯선 땅으로 발을 들여 놓았으나 외국은 낯익은 자기 나라 땅과는 달라서 어려운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는 날마다 여행을 계속하였습니다. 그가 홀로 길을 갈 수 있었던 것은, 온 세상을 영원히 다스리실 가장 위대한 통치자에게 경의를 표해야 한다는 그 자신의 열망 때문이었고, 그는 이 간절한 소망으로 마음이 뿌듯하여, 비록 낯선 외국 땅에서 불편하고 당황할 때가 많더라도, 결코 피곤한 줄도 몰랐습니다.

  그는 이미 두서너 달이나 여행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문제의 별이 유난히 찬란한 빛을 내며 하늘을 흘러가고, 그는 애마를 날랜 속보(速步)로 몰면서도 먼 고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마음에 애수를 느끼며 별을 뒤따르고 있었던 어느 날 밤, 참으로 기묘한 상봉을 했습니다. 어둠 속에 뭔가 보였는데 처음에 그것은 마치 언덕이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다음 가까이 다가가서야, 여행 중인 어떤 신분 높은 사람들의 일행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그 일행은 춥기 때문에 밤에도 계속 길을 가고 있었거나, 아니면 그 작은 왕과 똑같이 그들 역시 문제의 별을 놓칠세라 뒤따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귀인들과 그들의 많은 시종 일행은 말이 아니라, 낙타들을 타고 있었습니다.

  그는 세 귀인에게 어디서 왔으며 또 어디로 가는 길이냐고 물었고, 그들은 저희가 오래전에 떠나온 동방의 나라들 이름을 대었습니다. 작은 왕은 그런 나라들의 이야기를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귀인들의 목적지는 놀랍게도 작은 왕이 찾아가고 있는 곳과 같았습니다.

  그들은 거기서 한 아기, 그러니까 영원히 온 세상에 군림하실 가장 위대한 왕, 가장 지혜로운 의사, 가장 고귀한 대사제가 될 아기가 태어나시리라는 계시를 받았으며, 자기들은 그 아기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경배해야 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작은 왕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도 바로 같은 이유로 러시아 땅을 떠나왔다는 이야기를 그들에게 해주었습니다.

 

  작은 왕은 지난 두서너 달 동안 이미 갖가지 신기한 일들을 보아왔지만, 그들은 정말 특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중 한 사람은 스페이드 형의 맵시를 낸 긴 수염을 기르고 있었는데, 황금을 예물로 가지고 가고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멜키오르였습니다. 그리고 두째 사람은 유향을 예물로 가지고 가고 있었는데 보리수처럼 누런 피부을 지닌 수려한 용모의 청년으로 가스파르라는 이름을 지녔습니다. 마지막으로 몰약을 가지고 온 귀인의 이름은 발타사르이며 늠름한 풍채를 지니고 둥근 터번을 머리에 두른 중년의 남자로 피부는 새까만 사람이었습니다. 

  밤길을 인도하던 별이 가라앉았기에, 먼 길을 온 그 귀인 일행은 숙소를 찾으려고 했습니다. 이런 경우 러시아 작은 왕은 대개 들의 곡물창고 뒤 같은 데서 안장을 베개 삼아 눈을 붙이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날 그들이 잠자리를 찾으려는 마을이 바라보였을 때 앞의 들판에는 이른 아침의 이슬이 이제 막 불붙기 시작한 듯한 햇빛을 반사하며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세 귀인은 그 아름다운 광경에 탄성을 연발했습니다. 이때 작은 왕은 문득 뽐내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먼지투성이인 자신의 몰골은 초라하기 짝이 없고 세 귀인은 화려하기 그지없는데도, 잘난체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살기 좋은 러시아 땅에서 가져온 진주 몇 알이 저 이슬보다는 훨씬 아름답게 반짝거리지요."

하고 그는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리고 안장의 자루에 손을 넣어 진주가 들어 있는 작은 가죽 주머니를 꺼냈습니다. 그 진주는 본래 예수아기에게 드리려고 가지고 온 것인데, 그는 소중한 자기 조국에 대해 품고 있는 긍지와 사랑의 씨를 뿌리듯, 이슬이 아름답게 반짝거리는 들판에 커다란 호(弧)를 그리며 진주를 뿌렸습니다.

  세 귀인은 이 뜻밖의 지나친 행동에 어안이 벙벙해졌습니다. 한동안 침묵이 흐르다가 스페이드 형의 수염을 기른 멜키오르가 비로소 입을 열었습니다.

  "그거 정말 진주였습니까?"

  "물론이지요.  본래 그건.."

  이때에야 그는 그 진주가 새로 태어나실 저 위대한 왕에게 드릴 물건이었다는 생각이 퍼뜩 떠올랐습니다. 그러나 그걸 고백하는 것이 부끄러워서,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작은 왕은 처음 얼마동안은 세 귀인과 함께 어울려 길을 갔으나 그들이 서로 점잖게 교양 있는 대화를 나누기 때문에 도저히 한몫 낄 수 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따로 작은 헛간 같은 곳에서 잠자리를 마련했습니다. 그는 곤히 잠에 빠져, 마치 자기 고향 집의 러시아 난로 옆에 누워 있는 것처럼 과실주 크바스와 절인 오이를 꿈꾸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눈을 떴을 때 신음소리를 들었습니다. 그것은 온 세상의 비탄이 한데 뭉쳐진 소리 같았습니다. 그는 놀라서 꿈인가 생시인가 자기 머리를 긁적거렸습니다. 분명 자기 혼자인 줄 알았는데. 자기를 뒤따라 누군가 몰래 이 헛간에 들어와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삭의 여자거지였습니다. 그래도 햇볕이나 바람을 막아주는 지붕 아래서 몸을 풀까 하고 기어 들어와서, 그가 느긋하게 잠들어 있는 동안에 계집애를 분만했던 것입니다. 

  작은 왕 이외에는, 이 산모와 아기를 돌봐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작은 왕은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몰랐습니다. 허나 그는 마음이 착해서 그 여자거지의 딱한 처지를 모르는 체하고 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여인숙에서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가져다가 여자에게 주었습니다. 갓난 애기는 측은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작은 왕은 양 미간을 모으며 그 가련한 벌거숭이를 물끄러미 들여다보았습니다.

  “아, 이 가엾은 것아!”

  그는 뜸을 들이고 중얼거렸습니다.

  “네 애비는 도대체 어떤 난봉꾼이었니. 이 세상에 태어난 너에게 그 얇은 살갗밖에 준 것이 없으니 딱도 하구나. - 어디 내가 너를 그냥 둘 수 있겠니!"

  그리고 그는 자기 짐 있는 데로 가서 안장의 자루를 풀어 고향에서 가져온 아마포를 한 필 꺼냈습니다. 그걸 여러 자 떼 내서 가장 아름다운 강보 감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산모와 갓난 애기가 걱정 없이 밤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필요한 것을 모두 주선해 주고 나니 벌써 날이 저물어 저녁이었습니다. 작은 왕은 애마에 안장을 얹고 그 여자 거지에게 작별의 말을 했습니다.

  “내 나라에 있었다면, 자넨 좀 더 나은 대우를 받았을 걸세.”

  그는 인심이 후한 러시아 땅의 이야기를 여자에게 해주며, 거기서는 모든 걸인이 어김없이 자신의 혜택을 입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누구라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여자 거지는 기운 없는 목소리로 그에게 대답했습니다.

  "이 나라에서는 바로 나리 같은 분을 임금으로 받들어야 할 거예요. 하지만 저에겐 아무런 힘도 없어요.  그래서 저는 다만 나리를 제 마음의 임금으로 섬길 뿐이에요. 이 시간부터 저는 틀림없이 그렇게 할 거예요."

  작은 왕은 기분이 좋아서 혼잣말을 했습니다.

  <자, 나는 온 세상을 다스리실 저 위대한 임금님에게 바칠 황금과 아마포에서 내 마음대로 얼마큼 떼어 주었구나. 하지만 그 대신 나는 이 낯선 나라에서도 이제 내 자신의 땅을 갖게 되지 않았나. 아마 이런 마음의 영토도 과히 나쁘지는 않을 거야. 다만 저 위대한 임금님이 용서해 주신다면 말이야.>

 

  그가 자기 말을 끌고 여인숙의 마당으로 가보니, 그곳은 이미 휑뎅그렁하게 비어 있었습니다.

  지체 높은 세 사람의 귀인과 그 일행은 첫 별이 빛나기 시작했을 때 벌써 낙타들을 타고 길을 떠났다고 여인숙 사람들이 알려 주었습니다.

  작은 왕은 머리를 흔들며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동안 긴 여행을 해 왔지만 이때 처음으로 그는 마음이 불안해졌습니다. 하긴 아침부터 그는 자기가 뭔가 잘못하면서 귀중한 무엇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울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곧 마음을 가라앉히고, 여인숙 사람들에게 그 여자거지와 갓난 애기를 잘 보살펴 주라고 다시 한 번 부탁한 다음 말을 타고 길을 떠났습니다. 그는 그 밤도, 또 그 다음날 밤도 계속 말을 몰았습니다. 그 달 내내 밤마다 길을 재촉했습니다. 그는 밤길을 가는 자신과 애마 와니카의 무료함을 달래며 기운을 내기 위해 자기가 기억하고 있는 고향의 노래는 죄다 불러 보았습니다. 가도 가도 그 동방에서 온 세 임금의 일행은 따라 잡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늘에는 그 큰 별이 여전히 반짝이고 있어서 그는 제 길을 골라갈 수 있었으니, 결코 낙심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임금들이야 있든 없든 상관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물론 그들과 함께 어울렸으면 그들에게 기꺼이 경의를 표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위풍이 당당하여 기가 질리기 때문이 아니라, 여럿이 함께 어울려 동행하는 것이 담이 작은 자에게는 언제나 약간의 용기를 주기 때문입니다.

  길을 가던 어느 날 농장을 지나게 되었는데, 몸집이 크고 살이 피둥피둥 찐 두 사람의 감독관이 농장에서 일하는 쇠약한 남녀 농노(農奴)들을 몽둥이로 마구 후려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두 감독관의 말에 의하면, 그 농노들은 일을 빨리 하지 않고 게으름을 피웠다는 것입니다. 그들 중에는 얻어맞아서 살이 갈라지고 빈사상태에 빠진 자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작은 왕은 보다 못해 즉석에서 돈을 내놓고 몸값을 준 다음 그 농노의 무리를 모두 노예 신분에서 빼내어 주었습니다.

  물론 이 일을 하는 데는 많은 돈이 필요했을 뿐 아니라, 저녁부터 별이 뜨기까지의 귀중한 많은 시간도 허비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작은 왕은 이번 여행에서 처음으로 그 별을 따라 밤길을 떠나지 않고 그곳에서 묵었습니다. 그는 노예 신분에서 속량되어 자유의 몸이 된 자들이 자기를 구세주처럼 환대하는 가운데 앉아서, 하늘의 그 별이 옮아가는 것을 쳐다보았습니다. 바로 구세주의 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말을 타고 그 별을 따르지는 않았습니다.

  <선한 일이 또한 언제나 올바른 일이기도 할까>하고 그는 자문(自問)해 보았습니다. 그가 몸값을 내고 자유의 몸이 되게 했던 그 사람들은 이른 아침부터 그에게 와서 이젠 누가 자기들에게 먹을 것을 주느냐고 물었었습니다. 그들은 농노로서, 자기들을 감독하는 자들이나 고문하는 자들이 징계의 매를 때리는 몽둥이뿐 아니라, 또한 죽을 푸는 국자도 흔들어 보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평생 처음으로, 노동할 것도 없이 자유로운 시간을 갖게 된 이날 아침, 정작 먹을 것은 아무 것도 맛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배가 고팠고 뭔가 먹고 싶었습니다.......

  작은 왕은 길을 떠나기 전에 사흘분의 식량을 살 수 있는 돈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자유인으로서 할 만한 일거리를 찾아 열심히 일을 하라고 타일렀습니다.

 

 

이 날 작은 왕은 밝은 햇빛 속에서, 자기가 갖고 있는 작은 자루들을 세어보고 놀랐습니다. 그가 생각했던 것 보다 자루들의 수는 훨씬 줄어들었습니다. 터무니없이 적었습니다. 그는 이제부터는 단단히 절약하고, 아무도 자기 나라를 멸시하지 않도록 그 지존하신 분께 바칠 보물에는 더 이상 손을 대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자기가 아직도 고운 아마포 두서너 필과 모피, 그리고 꿀단지를 갖고 있다는 생각을 열심히 하면서 약간 마음을 위로했습니다. 그 꿀만으로도 넉넉하며, 다른 많은 것을 충분히 대신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대단히 불쌍한 나환자 두서너 사람을 만나자 불현 듯 동정심이 일어나, 자기가 갖고 있던 그 고운 아마포 한 필을 몽땅 찢어서 붕대를 만들어 주어 그들의 곪은 종기를 싸매게 했습니다. 그리고 구역질나는 파리 떼 속에서도 그들의 역병(疫病)이 누그러지기를 바라는 희망을 갖게 했습니다.

  작은 왕은 생각했습니다.

  "이제, 공기가 맑은 상에라도 가면 저 문둥병자들의 곪은 종기에 달라붙은 파리들이 눈에 띄지 않겠지. 그러면 또 무엇인가 남에게 주고 싶은 그 유혹도 벗어날 거야."

 

  그는 저녁때 다시 길을 떠나 출발했습니다. 이미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고, 구름이 무겁게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겨울이 가까웠습니다. 작은 왕은 출발할 때 단 한번 그 별을 보았을 뿐이고, 그것은 곧 비에 가려 지고 말았습니다.

  "달려라, 와니카, 힘껏 달려라!  저 별의 꼬리를 물어야 해!"

  작은 왕은 또 경솔하게 소리를 지르며 애마 와니카를 서둘러 몰아댔습니다. 허나 그는 밤새껏 길을 헤매었습니다. 아침이 되어, 그 일대는 몹시 험하고 황량했는데도, 와니카와 자신의 몸이 다친데 없이 무사한 것을 기뻐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해가 뜨자, 그는 뜻밖에, 전날 밤 이 산에 숨어 있는 강도에게 얻어맞아 속옷까지 빼앗기고 쓰러져 있는 장사꾼을 발견하였습니다. 작은 왕은 깊이 동정하며 말했습니다.

  "오, 이 딱한 친구야! 당신은 그렇게 벌거숭이로 있으니,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작은 천사  같구려. 마땅히 자비로운 도움을 받아야죠."

  그는 우선 그 부상자의 상처를 싸매 주었습니다. 그가 고운 아마포 한 필에서 붕대로 쓸 만큼 찢어냈을 때, 그 소리는 아마포가 정말 항의의 고함이라도 지르는 것처럼 귀에 들렸지만 그는 마음속으로 그것을 꾸짖고 가만히 있으라고 명령했습니다. 왜냐하면 출혈을 막는 것이, 한 어린 아기에게 필요한 것들을 마련해 주는 것보다 더 명예로운 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 다친 사람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고 기운을 돋우어 주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언제까지나 작은 천사처럼 그렇게 벌거숭이로 있을 수는 없지요."

  작은 왕은 이렇게 말하고 난처하다는 듯 귀 뒤를 긁적거렸습니다. 그리고 다시 말했습니다.

  “내 말 와니카의 꼬리는 길고 아름답지. 또 그 갈기도 촘촘하고 숱이 많아요. 허나 내가 이 자리에서 그것을 몽땅 잘라낸다 한들, 난 그것으로 결코 옷을 짤 수는 없어요. 그러니 그건 아무 소용도 없어요. 다른 도리 없이 두서너 장의 모피와 또 아마포 한 필을 드릴 수밖엔 없군요. 그렇잖으면 당신은 얼어 죽을 테니까요."

  형편이 이렇게 되어, 강도에게 얻어맞아 쓰러져 있던 그 장사꾼은 혼인식 때나 쓸 가장 아름다운 아마포와 검은 담비 가죽으로 옷을 꾸며 입고 그 비참한 곤경에서 벗어나 사람다운 모습을 되찾았습니다. 작은 왕은 거의 속이 빈 짐 꾸러미를 안장 뒤에 얹고 그 별을 뒤따라 여행을 계속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자루마다 밑에 구멍이 뚫린 듯 그 속의 마지막 남은 것도 급속히 빠져나갔습니다.

 

  작은 왕이 그렇게 일 년 가량 여행을 하고 나니, 그의 모든 자루는 바닥이 드러났습니다. 아마포는 헐벗은 자들과 병든 자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따스한 모피들은 동상에 걸린 자들에게 건네주었습니다. 황금과 보석 - 그리고 제일 먼저 뽐내며 뿌렸던 진주까지도 - 곤궁한 자들과 감옥에 갇힌 자들에게 내주었습니다. 오직 한 가지 남은 것이라곤 어머니가 주신 꿀단지뿐이었습니다. 어느 날 작은 왕이 그 오지단지의 뚜껑을 조심스럽게 여니 그 꿀에 햇빛이 비치었습니다.

  그는 길가에 앉아서 와니카에게 풀을 뜯어먹게 했습니다. 요즈막엔 거의 귀리를 맛보지 못했으니, 와니카는 털이 그전보다 훨씬 푸석푸석하고 걱정스러울 정도로 살이 빠졌습니다. 사람들의 한 살에 비해 말의 한 살은 정말 몰라보게 늙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작은 왕은 단지 속의 노란빛을 띤 꽃 꿀의 윤기를 황홀하게 들여다보며, 마음속에 고향의 한창 꽃이 핀 녹황색(綠黃色) 보리수들을 그려 보았습니다. 고향 땅에 서 있는 그 나무들은 햇빛을 담뿍 받으며 하나같이 훈훈한 향기를 뿜고, 또 벌들이 윙윙거리고 있었습니다.

 

  작은 왕은 견딜 수 없을 만큼 사무치는 향수를 느꼈습니다. 그는 생각했습니다.

  "아! 낯선 외국 땅에서 무명의 왕으로서 정처 없이 헤매는 신세보다 짧은 목숨이지만 고향  땅의 한 마리 꿀벌의 신세가 더 낫지 않을까! 저 별을 따라 다니는 것보다 그 보리수를 찾아 날아다니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벌써 일 년이나 여행을 계속해 왔지만, 끝이 없었습니다. 타향이란 바로 불행이었습니다. 새로운 것들도 시시해졌습니다. 그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죄다 주어버린 뒤로는, 그는 애마 와니카하고만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는 과거에 자신이 상상도 해보지 못한 뼈저린 고독감에 사로 잡혔습니다.

  겨울도 지나서 먹을 것을 찾아다니다가 러시아 보리수의 훈훈한 향기에 매혹된 야생벌이 한 마리 날아와 그 단지 가장자리에 앉아서 꿀을 빨아먹었습니다. 작은 왕은 그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벌이 너무 빨리 다시 날아갔기 때문에 미처 거기에 대한 생각을 못했을는지도 모릅니다. 야생벌들이 세 마리, 네 마리, 이윽고 삼십 마리, 사십 마리, 점점 떼 지어 날아들었을 때 비로소 그는, 이제 자기로선 더 이상 아무것도 줄 수 없는 처지인데도 자기에게 남아 있는 마지막 것까지 벌떼가 빼앗아 가려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리가! 저리 가란 말이야!”

  작은 왕은 고함을 지르고 두 손을 휘두르면서 옆에 놔두었던 단지 뚜껑을 찾으려고 애썼으나 찾을 수 없었습니다. 자기가 그 뚜껑을 깔고 앉아 있는 것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동안에 노란 빛을 띤 꿀에는 벌떼가 새까맣게 들러붙어서 그 고향의 맛좋은 꿀들 마구 핥아 대고 있었습니다. 작은 왕이 손을 뻗치어 그 단지를 움켜쥐고 벌떡 일어나자, 즉시 정말 구름 같은 벌떼가 순식간에 그를 에워쌌습니다. 그가 꿀단지를 흔들며 그 날개 달린 욕심쟁이들을 쫓아버리려고 발버둥 칠수록, 더욱 더 못되게 그를 쏘아대는 것이었습니다.

  “저리가! 어서 물러가!”

  작은 왕은 또다시 고함을 질렀습니다. 그는 꿀단지를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애마 와니카를 타고 도망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웬걸 와니카는 이미 벌떼에 쫓기어 머리를 치켜세우고 미친 듯 되는대로 질구(疾驅)하다가 들판에 사납게 나둥그러져 뻗으며 그 목을 요란하게 내던졌습니다. 그리고는 땅바닥을 뒹굴며, 갈기 속에 기어든 그 벌들을 짓눌러 바수어서 없애버리려고 몸부림쳤습니다. 작은 왕은 애마의 이 악전고투를 거의 볼 수 없었습니다.

  그의 마음속은 다만 원망과 불평의 넋두리뿐이었습니다. 그로 하여금 이 여행길에 오르게 한 그 부조전래(父祖傳來)의 약속이며, 도무지 멈추어 설 것 같지 않은 그 별이며, 그토록 먼 곳에서 자기를 오도록 한 그 가장 위대하고 영원한 왕이며, 자기를 미혹케 하여 그릇된 길로 꾀고 놀린 외국 땅이며, 자기 생각엔 틀림없이 자기를 위험 속에 내버려두고 저희끼리만 떠난 그 세 임금들이며, 자기가 친절히 자선을 베푼 그 숱한 사람들의 배은망덕이며....... 그저 모든 것이 원망스러웠습니다.

 

  며칠 후에 그는 자기 애마 와니카 옆에 꿇어 앉아 있었습니다. 그가 자포자기하며 너무 거칠게 다루었기 때문에, 와니카는 이제 병이 나서 사지를 뻗고 땅바닥에 누운 채 다시는 일어나려 하지 않았습니다. 작은 왕은  이미 생기를 잃고 흐릿해지고 있는 와니카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말했습니다.

  “친구야, 자네가 아니면 누가, 그 누가 나를 내 별 있는 데로 데려가며, 또 그리운 고향으로 다시 데려다 주겠는가? 지난번에 내가 자네를 걷어찬 것을 용서하게! 내가 내 자신을 걷어 찰 수야 없지 않나. 그건 나 자신을 걷어차려고 한 거야, 나를 믿어주게!"

  그런데 와니카는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작은 왕은 와니카가 죽은 것을 알고는 맥이 풀려, 여러 시간 동안 와니카 옆에 앉아서, 팽팽하고 더욱 뻣뻣해진 목을 쓰다듬으며 텁수룩한 갈기를 만지작거렸습니다. 

  애마의 장례 일을 마친 다음 그는 돌 더미 옆에 앉아서 별이 나타나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초저녁에는 그 별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차차 밤이 깊어가도 웬일인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작은 눈을 크게 뜨고 줄곧 하늘을 바라보려고 애쓰면서, 눈물을 흘리게 하는 바람을 나무랐습니다. 한밤중이 훨씬 지나서야 그는 일어나서, 그 자리를 떠나 어둠 속을 서둘러 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빨리 달려도 와니카만큼은 빨리 달릴 수 없었습니다. 생각하나마나 이제부터 다시 여행이 오래 계속될 것이 뻔했습니다. 그래서 더욱 걱정이 태산 같았습니다.

  와니카가 죽은 첫날 밤, 새벽녘에야 그 별이 나타났었는데, 이것이 밤마다 되풀이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별이 - 남쪽 지평선 가까이에 - 보이곤 하는 시간이 점점 짧아졌습니다. 그럴 리가 없다고 그는 믿으려 하지 않았지만, 사실이 그러했습니다. 별의 꼬리는 이젠 중천에 늘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저만큼 앞에 보이는 남쪽 어느 곳인가 땅에 닿아 있었습니다.

  "저기다…….저기다……."

  작은 왕은 밤새껏 정말 힘껏 달렸습니다.  멀리서 개들이 수상하다는 듯 짖어대고 파수꾼들이 놀라 주춤거리기도 했습니다. 그는 생각할수록 짜증이 났습니다.

  "다 무슨 소용이 있나.  굶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헐벗은 자들에게 입을 것을 주고, 감옥에 갇힌 자들을 풀어 주고, 그러면서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뿌렸는데, 이제 와서 나 자신은 불행의 눈물만 뿌리고 있으니 기가 막히는군…….한 여자거지의 마음의 왕이 돼, 하하, 웃기는군! 그래도 난 한때 그걸 그럴싸하게 상상하면서 으쓱거렸으니, 참 나도 멍텅구리야! 그런데도 이제 난 너무 늦었어. 제때에 당도한다 하더라도, 보다시피 이 몸은 거지꼴이니, 그분은  만나 주시지도 않을 거야!"

  그런데 바로 얼마 뒤에, 작은 왕은 그의 생애 중 가장 긴 밤을 체험했습니다. 그 밤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는데, 문제의 별이 끝끝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작은 왕은 해질녘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한 장소에 웅크리고 앉아서 밤을 꼬박 새었습니다. 그리고 낮에는 온종일 계속해서 길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어떤 지시를 따라서가 아니라, 그 자신의 어림짐작으로 길을 더듬어나갔습니다.

 

  어느 날 아침 그는 해변에 이르렀는데, 거기에는 이국풍의 아름다운 항구도시가 있었습니다. 이른 새벽에 그는 바닷가로 나가 앉아서 아침놀이 마치 진주 모(眞珠 母)처럼 파도에 부서지며 번져나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는 대단히 난폭한 장면을 목격하였습니다. (죄인과 노예들이 젓는 단 갑판의 군함인) 갈레선 한 척이 항구에 정박하고 있었는데, 이미 출항(出港) 준비가 다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노 젓던 사람이 죽었으니, 그 자리가 비어 있었습니다. 본래 그 사람은 선주에게 빚을 지고 우물거리며 갚지 못하고 있다가, 그 선주의 갈레선 선원으로 일을 하도록 판결을 받았었습니다.

  그러나 아주 건장한 사람도 견디기 어려운 그 뱃일을 감당 할 만큼 이 사람의 팔은 굳세지 못했습니다. 아마 배가 이 항구에 닿기 전에 그의 송장은 바다에 던져졌음이 틀림없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선주와 그의 종들이 죽은 사람의 어린 자식을 끌어다가, 그 아버지가 묶였던 사슬에 매서 일을 시키려고 했습니다. 아직 젊은 어머니가 그 옆을 따르면서 선주에게 자기 자식을 동정해 달라고 애원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선주는 그 아이를 즉시 아버지의 사슬에 매서 일을 시킬 뿐, 다른 것은 모른다고 무뚝뚝하게 대꾸했습니다.

  작은 왕은 얼마 떨어진 자리에서 그 모든 이야기를 듣고 분노와 비통한 느낌이 엇갈리는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 젊고 아름다운 - 그에게는 그렇게 생각되었습니다. - 과부가 불쌍했습니다. 어린 자식이 가엾어 속을 태우는 여인의 고통이 그를 감동시켰습니다. 적어도 지금은 누가 보든지, 그 어린 자식은 오래지 않아 아버지의 뒤를 따라 황천길로 들어갈 것이 뻔했습니다. 소년은 도살대로 끌려갈 양처럼 어찌할 바를 몰라 꼼짝 않고 서서 어머니를 쳐다보다간 또 시선을 돌려 자기를 박해하는 폭군을 멀거니 쳐다보곤 했습니다. 그동안, 어머니는 선주에게, 아이를 데려가면 자기는 부양자를 잃게 된다고 애걸하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아이가 아버지의 빚을 갚아야 해!”

  작은 왕은 그 젊은 여인을 눈여겨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자기 나라 고향에 있는 그 많은 젊은 처녀들이 퍼뜩 생각났습니다. 그는 흐뭇한 마음으로 그녀들을 살피곤 했지만, 결코 청혼을 한 적은 없었습니다. <상냥하고 성실한 젊은 여인 곁에서 한세상을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여자는 틀림없이 그런 여인일 거야>하고 그는 상상의 나래를 폈습니다.

  그러나 선주가 선창에서, 그 아이를 배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 사슬에 매라는 명령을 내렸을 때, 그는 다급해졌습니다. 마침 아침바람이 출항하기 좋게 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작은 왕은 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뱃사람들 가운데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가 그 아이 대신에 가겠다고 낮은 소리로 말하고 도전적인 눈초리로 선주를 쳐다보았습니다. 그의 귀에 제일 먼저 들린 것은 빈정대는 웃음소리였습니다. 그다음에, 마치 백정이 자기 앞에 끌려온 도살될 가축 한 마리를 살피듯이, 선주는 작은 왕을 자세히 살폈습니다. - 원! 자신이 있느냐고요? 있고 말구요. - 아이의 아버지가 그에게 어처구니없이 떠맡긴 부채를 마지막 한 푼까지 다 갚으려면, 여행이 그렇게 빨리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세 번은 생각해 봐야 한다고 선주는 말했습니다. 그리고 뱃사람들에게 선동적인 눈초리를 보내면 그때마다 웃돈을 더 얹어 부채를 셈해야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선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작은 왕이 그 어린아이보다는 훨씬 낫게 노를 저으리라는 것을 첫눈에 알아챘기 때문입니다.

  작은 왕은 그 젊은 과부를 바라보았습니다. 여인의 눈은 휘둥그레져서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하는 빛을 보이면서도 희망을 되찾고 있었습니다. 여인은 아름다웠습니다. 자기 아이를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울고 있는 저 여인을 더욱 아름답게 만든다고 작은 왕은 생각했습니다. 그 자신도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죽을 때까지 이 여인을 사랑하고 싶었습니다.

  “잘 있어요.”

  그는 나직이 말하고 몸을 돌려 배에 올라서 아래로 내려갔습니다. 갈레선 감독은 그를 쇠사슬에 맸습니다.

  그 후 이 넷째 왕이 보낸 세월은 이야기하기는 간단하지만, 참으로 지겹도록 긴 세월이었습니다. 끈질기게 목숨을 부지하며 거의 삼십년이라는 세월을 보냈던 것입니다. 죄인과 노예들이 젓는 갈레 선에서 보낸 삼십년!

  그는 죽은 자의 사슬에, 그 과부의 어린 아들을 대신하여 자진해서 매였을 때 그저 순진하기만 했습니다.  죽은 자가 자기에게 떠맡긴 빚의 액수가 얼마나 되는지, 또 노역(勞役)으로 그 빚을 다 갚기 위해서는 얼마동안이나 노를 저어야 하는지도 전혀 묻지 않았었습니다. 그 후 언제부턴가 쇠사슬이 그의 복사뼈에 죄어들 때마다 자기 노역이 끝날 기한을 물을라치면 으레 <아직 멀었다!>는 대답만 들었습니다. 한 해가 가고 또 한 해가와도 매양 한가지로 그의 고생은 ‘아직 멀었다’는 것이며, 세상의 찌꺼기 같은 온갖 잡배나 불운한 자들과 나란히 앉아서 쉴 새 없이 노를 저어야 했습니다. 함께 고생하는 그 족속들은 어리석기 때문에, 아니면 오히려 꾀를 부리다가 배에서 이승을 하직하곤 했습니다.

  작은 왕을 배에 태우고 일을 시켜온 선주는 죽고, 그 아들이 그를 고집이 세지만 부지런히 노를 젓는 일꾼으로 알고 물려받았습니다. 감독들도 두서너 차례 바뀌고 나니, 그가 원래 다른 사람 대신에 노 젓는 자리에 묶여서 그 죽은 자의 부채를 완전히 갚을 때까지 참으로 오랜 세월 강제노역을 해야 했다는 사실을 아는 자가 아무도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그가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희생하고 있다는 것이 점차로 잊히고 마침내는 배의 말없는 시설의 일부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은 아마 작은 왕에게 가장 기분이 나쁘고 답답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의 눈빛은, 참으로 오래전 어느 날 아침에 그가 애마 와니카의 커다란 눈을 들여다보다가 그때 견딜 수가 없어서 외면했던 그 눈빛을 해가 갈수록 닮아갔습니다.

  그런데 지금 다른 사람은 알아챌 수 없지만, 그는 무엇인가를 보았고 또 그것을 보는 데에 몰두하여 오직 그 힘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그는 또다시 그 별을 되풀이해서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 별 때문에 몇 십 년 전에 그는 정든 고향을 떠나오지 않았던가!

  이제 그 별을 밤에도 낮에도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등불이 몹시 어둠침침해서 대낮에도 마치 깊은 우물 속에서 올려다보듯 그 등불을 별로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갑판 밑의 노 젓는 자리는 뜨거운 열기가 감돌고 그의 주위는 언제나 캄캄하여 그에게는 그 별의 광채가 어둠을 가르는 것 같았습니다. 

  그가 지나온 세월을 생각하면 이루 말할 수 없는 회한으로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의 생각대로 모든 것을 헛되이 낭비했고, 무의미하게 헛수고만 했었습니다. 그가 저 지존하신 분에게 경배를 드릴 수 없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고 - 이젠 자기 고향에 돌아가 그 왕관을 쓸 자격도 없었습니다. 

  또한 그는 젊고 아름다운 그 과부를 눈앞에 그려 보곤 했습니다. 이전에 그가 자진해서 이 갈레선의 노 젓는 노예가 된 것은 바로 그 여인 때문이었습니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은, 그 어린아이의 불행한 운명을 구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여인, 그 어머니에게 갑자기 싹튼 자신의 애정을 나타내 보이기 위해서였다고 그는 오래전부터 자신에게 설명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 별빛이 이 여윈 얼굴을 환히 비춰도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숨길 것도 없고 후회할 것도 없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그 여인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여인은 벌써 오래전에 나를 잊어먹었을 것이 틀림없어. 자기 부양자를 구해준 이 낯선 이국 남자를 한순간도 생각하지 않았을 거야. 어쩌면 일찍이 다른 사내와 다시 결혼했을 테지 - 그리고 사랑의 왕국을 선사했겠지. - 그 여자거지가 헛간인가 외양간에서 자기에게 얼마큼의 동냥을 준 사람이 누구든 우선 급한 대로 자기를 도와주었기에 분명히 자기 마음을 선사한 것처럼 말이다. 여인은 은혜를 잊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떠나갔지만 믿을 수 있나.>

  아!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그칠 줄 몰랐습니다. 거의 삼십년 동안 밤이나 낮이나 여인을 생각했고, 갈수록 연모의 정은 더 깊어갔습니다. 갈레선의 노 젓는 남자의 억센 가슴도 그 일이 생각나면 구멍 뚫린 풀무처럼 호흡이 고통스러워지곤 했습니다. - 먼저 관자놀이 언저리가 어느새 희끗희끗해지더니, 이윽고 머리 전체가 백발이 되었습니다. 흐릿한 눈은 구멍이 난 듯이 움푹 파여 들어갔고, 무거운 사슬에 눌린 살갗은 차차 가죽처럼 딴딴해졌습니다.

  어느 날 작은 왕이 그 노 젓는 일에서 제쳐 놓이게 되니 사람들은 그를 육지로 옮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갈레선의 노 젓는 자리에는 쓸모없게 된 것입니다. 이젠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육지로 옮겨지고 보니, 그 항구는 거의 삼십년 전에 그가 문제의 갈레선에 올라 사슬에 매였던 그때와 똑같았습니다.

  그런데 저녁이 가까웠을 때, 외모로 미루어 유복해 보이고 또 하인들이 뒤따르고 있는 폼을 보아 대단히 명망이 높은 듯한 남자가 작은 왕이 기대어 누워 있는 돌 옆을 지나다가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오랫동안 그를 살피더니, 어디서 왔느냐고 그에게 물었습니다.

  작은 왕은 말없이 손만 들어 막연히 바다 쪽을 가리켰습니다. <저쪽에서 왔소> - 그는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갈레선에서 왔소?> 그 사람은 이렇게 묻고, 끔찍한 듯 진저리치면서 벗겨진 복사뼈가 짐승 가죽처럼 딴딴해진 것을 살폈습니다. 그것은 삼십년이나 쇠사슬에 짓눌려 왔었습니다.

  작은 왕은 역시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예, 오늘이요.”

  이 한마디가 그가 말할 수 있는 전부였습니다. 그 사람이 물었습니다.

  “당신이 자진해서 갈레선을 탔소?”

  작은 왕은 허탈한 미소를 띠고 머리를 흔들었습니다.

  그 낯선 사람은 자기 하인 두 사람에게 일렀습니다.

  “들것을 가져오너라.”

  두 사람은 들 것을 가지러 가고 셋째 하인은 그의 옆에 남아 있었습니다.

  “오늘부터 당신은 내 집에서 묵으시오. 건강해질 때 까지 돌봐 주겠소.”

  작은 왕은 자기 귀를 의심했습니다. 그는 그 낯선 사람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그런 말이 새어 나오기 전에, 낯선 사람이 말했습니다.

  “나에게 감사할 필요는 없소. 당신이 감사를 드릴 분은 이미 돌아가셨어요. 그분은 바로 내 어머니요. 어머니는 내가 죽을 때까지, 갈레선에서 쫓겨 나오는 사람들을 모두 내 집에 데려다가, 다시 기운을 차릴 때까지 돌봐 주어야 한다는 의무를 내게 맡긴 거요. - 난 어머니의 유언을 뭐 좋아서 지켜온 것은 아니오.”

  그의 말투는 딱딱했습니다.

  “아마 앞으로도 내 기분은 그럴 거요. 왜냐하면 갈레선에서 쫓겨 나오는 자들은 대부분 교수형감인 진짜 도둑들이니까요. 아마 그들은 양가 가풍을 지키는 내 집보다 그들 고향의 감옥 안에나 있는 것이 더 나을 그런 작자들이오. 하지만…….어머니는 언젠가 어떤 착한 사람이 갈레선을 타는 걸 보았다고 말씀하셨소. 어머니는 그 착한 사람 때문에 내가 이런 일을 하도록 약속을 시킨 것이오. 만약 당신이 이때 까지 돌봐준 자들과는 다른 사람이라면, 어머니의 뜻을 살리는 셈이고 또 나도 어머니의 마음씨 고운 그 변덕을 이전처럼 아주 어리석은 것으로는 여기지 않게 될 거외다.”

  작은 왕은 방파제의 돌에 기댄 채 이 사람을 유심히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면서 삼십년 전의 그날 아침을 생생하게 회상하였습니다. 그리고 자기 앞에 서 있는 사람의 얼굴에서, 그때 어찌할 바를 모르고 마치 도살될 양처럼 오도카니 서 있던 그 어린아이의 모습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거의 속삭이듯 말했습니다.

    “아 그래요, 그러니까 선생님 어머님께서 그러셨군요…….전…….전…….”

  하지만 그는 더 이상 말을 잊지 못했습니다. 자기 비밀을 털어놓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전 그때 이미 그분이 그러시리라고 생각했답니다.  전 늘 그걸 확신하고 있었어요. 삼십년이라는 어둡고 긴 세월 동안, 그분이 틀림없이 그러시리라는 걸 굳게 믿어 왔지요.>

  그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습니다. 드디어 그는 입을 열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전 선생님의 착하신 어머님 뜻을 더럽힐 일은 하지 않을 겁니다.  선생님은 틀림없이 그 분의 맏 아드님이시지요…….”

  그 낯선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습니다.

“예, 그렇소, 맏이노릇 하기란 쉽지 않지요. 여러 가지 귀찮은 의무가 따르기 마련이니까…….”

  작은 왕은 그 점에 관해 이야기할 것이 많았지만, 마침 그때 두 하인이 아무렇게나 만든 엉성한 들 것을 들고 와서, 무슨 대답을 하려던 그의 입을 다물게 했습니다. 이윽고 그는 끙끙 신음하면서 하인들의 들것에 실려 갔습니다.

  한편 그는 마치 그림자 모양 외딴 채 골방에서 조용히 지냈고, 그런 가운데 조금씩 차도를 보이면서 다시 원기를 회복해 갔습니다. 그는 온전히 과거의 추억에 잠겨 있었습니다. 옛날 그가 스스로 갈레선의 사슬에 매이면서까지 자신의 애정을 보여준 그 여인은 이미 죽었고, 이제 그에게 생각나는 것이라곤 그 별과 저 위대한 임금뿐이었으니, 그분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했습니다.

  어느 날, 작은 왕이 감사와 작별의 인사를 하기 위해 그 부유한 상인한테 갔을 때 그는 마지못해 칭찬의 말을 했습니다.

  “당신은, 지내고 보니 전에 내 집에서 신세를 진 작자들처럼 꾀를 부리며 약아빠진 악한 근성을 보인 일은 별로 하지 않은 것 같구려, 예외적인 사람이었어요.”

   작은 왕이 말했습니다.

  “어머님의 명복을 빕니다!”

  그 부유한 상인은 어안이 벙벙해서 작은 왕을 쳐다보았습니다. 뜻밖의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작은 왕은 이미 등을 돌리고 그의 앞을 떠났습니다.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는, 예전에 자기가 갈레선에 몸담기 전에 더듬어 왔던 큰길로 다시 나섰습니다. 그는 오래전부터, 문제의 별이 마지막으로 밝게 빛나면서 그 긴 황금빛 꼬리가 땅에 닿았던 장소를 아직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되살아 난 과거의 버릇대로 그는 그 방향으로 길을 재촉했습니다. 삼십년의 세월이 흘렀는데도 그는 이러한 습관을 되살림으로써 길을 제대로 찾아냈던 것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길이 사람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을 이상히 여기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길을 메운 사람들을 둘러보고 그중에 떠돌뱅이는 하나도 없다는 것을 곧 알아차렸습니다. 그 반대로 대부분 유복한 사람들과 소시민들이었고, 그들은 화창한 봄 날씨에 가정마다 온 식구가 함께 길을 떠나, 남쪽의 어느 큰 도시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 도시에서 축제에 참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오후가 되니, 멀리 네 개의 언덕 위에 자리 잡은 도성의 거대한 신전이 바라다보였는데 그 둥근 지붕이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와 함께 길을 걷던 사람들은 그 신전을 바라보면서 환희와 찬미의 소리를 터트렸습니다. 그리고 어둡기 전에 성 안에 들어가기 위해 걸음들을 재촉했습니다.

 

그는 가다가 어느 노파를 만나게 되어 동행하며 말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나 보니 자기 혼자뿐이었습니다. 그가 잠들어 있는 사이 어느 틈엔가 노파는 그를 남겨두고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할멈이 옆에 없는 것이 어쩐지 허전했습니다.

  사람들이 떠드는 갖가지 소리들이 어지럽게 그의 귓전을 때렸습니다.  군중 속의 몇몇 무리가 계속 되풀이해서 고함을 지르고 있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군중은 어떤 왕에 관해 외쳐대고 있었습니다. 이 왕이 어떠한 처지에 있는지, 그리고 골목들과 거리를 지나 밀치락달치락 어디론가 몰려가고 있는 군중이 아마 이 왕에게 경배하러 가고 있는 건지, 아니면 그 왕에 반대하여 폭동을 일으킨 건지, 러시아에서 온 넷째 왕만이 모르고 있었습니다.

  점점 불어나는 어중이떠중이 군중의 흐름 속에 그도 휩쓸리어 한참동안 어울려서 도성 안쪽으로 급하게 서둘러 걸음을 옮겼습니다. 하지만 얼마 못가 그의 기운이 말을 안 들어, 기회를 봐서 얼른 어떤 문길(文道)로 비켜났습니다. 그는 담에 기대어 눈을 감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만큼 자기가 허약해졌다는 것을 여태까지 몰랐었습니다. 골목을 달리며 미친 듯이 군중이 외쳐대는 소리도 몹시 난잡한 소동소리로만 들렸습니다. 그는 눈뜨고 그들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악의(惡意)가 점점 더 심해져 가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생각했습니다.

  "아마 폭동 일게야. 하긴 군중의 태도에서 호의와 증오는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게 보이는 법이지. 종이 한 장 차이밖에 없는 거야…….헌데 그 문제의 인물은 도대체 어떠한 왕이란  말인가?"

  이런 생각이 덮쳐오자 그는 숨이 막혔습니다. 심장의 고동이 멎은 것 같고, 현기증이 나면서 머리가 빙빙 돌았습니다.

  “저들은 가장 위대한 분을 만났는데 그분을 세상에서 가장 버림받은 자로 깎아 내리려 하지.”

  그는 귀 익은 목소리가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는 눈을 뜨고 얼떨떨해서 두리번거리며, 이 말을 한 사람을 한참동안 찾았습니다. 그러다가 자기 발치 가까이, 동행하던 노파를 알아보았습니다. 노파도  이리로 피해 들어왔던 것입니다.

 

  그는 할멈을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또다시 당혹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몇 마디 말이 그의 입술에서 새어 나왔습니다.

  “할멈, 방금 뭐라고 했소? 그게 누구 이야기요?”

  그의 생각대로 노파는 비웃는 웃음을 띠고 그를 바라보았습니다.

  “영감은 그것도 모른단 말이오? 사마리아와 갈릴래아의 큰길을 내내 걸어오면서도 얘기를 못 들었어요?”

  그는 잠자코 머리를 흔들었습니다. 그의 심장은 터질 듯 방망이질을 했습니다.

  “이 백성은,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성경에도 적혀 있고 예언자들도 말해온 임금님을 만난 거예요. 그분은 병든 사람들을 고쳐 주고, 죽은 사람들도 다시 살려냈지요. 그런데 이 백성은 이방인들에게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졸라대고 있는 판국이라오.”

  작은 왕은 마치 정신 나간 사람 같았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성경에도 기록되어 있고 예언자들도 선포 해 온 왕이라니, 아니 그분이...

  “그 왕의 연세는 얼마요?”

  그는 명령하듯이 노파에게 다그쳐 물었습니다.

  노파는 침착하게 대꾸했습니다.

  “그분의 나이요? 아마 서른 살 가량이라고 하지.”

  “서른 살? 할멈 방금 서른 살이라고 했지?”

  작은 왕은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되물었습니다.

  노파는 끄덕였습니다. 노파의 머리는 작은 왕의 눈앞에서, 마치 얼마 안가서 멎어버릴 시계추처럼 느릿느릿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그 할멈의 탓인지, 아니면 자기 눈의 착각인지 그는 알 수 없었습니다.

 

  “서른 살, 서른 살이라고.”

  그는 그 서른 살에 이 세상과 자기 인생의 가장 중대한 수수께끼가 숨겨져 있기나 하듯이 중얼거렸습니다.  그는 머리를 쳐들고 노파를 바라보며 큰소리로 말했습니다.

  “서른 살이라, 그러니까…….그건 바로 그때였군.......”

  작은 왕은 겨우 머리를 들었습니다. 이젠 아무런 안내도 필요 없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틀림없이 그분의 뒤를 따르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오직 서둘러 걸음을 옮기는 일이었습니다. 어떤 집 안으로 피하여 울고 있는 부인들을 보기도 하고 또 제 정신이 아닌 노인들을 보기도 했으나,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놀라서 입을 벌리고 어정거리는 구경꾼들과, 하릴없이 빈둥거리다 덩달아 몰려든 무리에 뒤섞이기도 하고, 거칫거리면 피하기도 하면서 그는 걸음을 재촉했습니다.

  <그 임금님……. 그분은 가장 위대하신 분이다! 성경에 똑똑히 기록돼 있고, 예언자들이 또한 그분이 오리라는 것을 알리지 않았던가!>

  그의 생각은 엉클어졌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 백성이 그분에게 반항하다니! 삼십년 전에 하늘의 별이 그분의 강생을 알려주었고, 또 그렇기에 그분을 찾아뵙고 신하로서 충성을 맹세하기 위해 저 동방의 세 박사가 길을 떠나왔고, 바로 자기 자신도 머나먼 러시아 땅을 떠나왔는데, 그 임금님을 물리치다니!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어떻게…….이런 일이…….일어 날 수 있단  말인가?"

  이제 생각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도성의 가옥들을 뒤로 하고 걸어 나오니 너른 들이 펼쳐지고 밋밋한 언덕이 저만큼 바라다보였습니다. 완만한 오름길이었습니다. 갈수록 사람들이 뜸해졌습니다. 모두 아래의 도로에 북박힌 채 입을 벌리고 위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러시아에서 온 을씨년스러운 넷째 왕은 머리를 똑바로 쳐들고 세 개의 십자가를 바라보았습니다.

멀리서도 가운데 십자가에 달린 가장 쇠약해 보이는 분을 첫눈에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태양이 이글이글 타고 있는데도 그의 얼굴은 잿빛이었습니다. 그의 입술은, 그가 옛날 돌아다니다가 여러 번 공짜로 얻어먹곤 했던 밭두둑의 들 포도 색깔처럼 푸르스름했습니다.

  점점 걸음이 느려지기는 했지만, 그는 쉬지 않고 걸어 올라갔습니다. 걸음이 자꾸 무거워지면서 겨우 발을 떼놓곤 했습니다. 그는 가운데 십자가를 놓치지 않고 꼭 지켜보기 위해 머리를 꼿꼿이 들었습니다. 천천히 다가가면서 몸을 가누려고 멈춰 설 때마다, 그는 그 주님을, 가시관을 쓰신 주님을 더 뚜렷이, 더 황감한 마음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그분은 바로 그 자신의 왕이요, 모든 시대의 모든 겨레를 다스리시는 왕이시다. 그분이 삼십 여 년 전 어린 아기로 태어나셨을 때, 찾아뵙고 충성을 다짐하기 위해 그는 러시아 땅을 떠나왔었습니다.

  그는 가운데 십자가에 달리신 이가 바로 그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 그러나 어떻게 알았는지 그건 몰랐습니다. 주님은 그 고통 속에서 그저 한번만 그를 바라보시면 됩니다. 주님은 항상 모든 것을 알고 계셨으니까.

  그러나 그가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이 그를 바라본다는 것 - 그렇게 서로 마주 본다는 것은 작은 왕의 마음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한순간 그는 더 할 나위 없는 행복감이 충만한 고요를 느꼈습니다. 그 고요 속에서 그의 심장은 고동을 멈추었습니다. - 이 순간 그는 조용히 앞으로 쓰러졌습니다.  그리고 뭔가 쇠갈퀴 같은 것이 찌르는 아픔을 느꼈습니다. 그 고통은 그의 온 가슴팍을 좨치었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주님께 갖다 드리려고 했던 것들을 죄다 없앴습니다."

  작은 왕은 부끄럽고 몹시 괴로웠습니다.

  "황금, 보석, 아마포, 모피, 그리고 어머님이 단지에 가득 채워주신 꿀까지도 - 모두 쓸데없이 낭비했습니다.  주님, 용서하십시오! 하지만 러시아는……."

 

  이미 그의 눈앞이 어두워지고 있었을 때, 불현 듯이 여자거지의 마음이 생각났습니다. 그 마음은 여인이 그에게 왕국으로 선사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의 마음에 생각이 미쳤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받아본 유일한 선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썩고 있는 뼈다귀들 사이로 줄기를 뻗어 저녁하늘에 향기를 뿜고 있는 야생 백리 향을 베개 삼아 누웠습니다. 그 자신도 모르게 그의 입술이 나직하게 중얼거렸습니다.

  “주님, 저의 마음을, 저의 마음을. 그리고 저 여인의 마음을. 우리의 마음을 받아 주시겠습니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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