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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과 매일 복음 묵상 - 사랑을 위해 ‘자아’를 버리다
작성자김현아 쪽지 캡슐 작성일2009-01-03 조회수652 추천수9 반대(0) 신고

 

 

 

공현 전 토요일 - 사랑을 위해 ‘자아’를 버리다

 

오늘 성당에 앉아서 ‘죄’에 대하여 묵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한국에 있는 동기 신부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어차피 성당에 아무도 없어서 그 자리에서 한참을 이야기하고 있다가 저의 핸드폰 배터리가 다 되어 중간에 전화가 끊겼습니다. 저는 기도를 더 하고 다른 볼 일이 있어서 여기 저기 돌아다녔습니다.

나중에서야 그 신부가 저에게 물어볼 것이 있어서 계속 전화를 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그것도 모른 채 기도를 계속하고 다른 일들을 보았던 것입니다. 사실 저의 입장에선 그 친구가 그런 절박한 사정이 있는 줄 몰랐었습니다. 그저 안부 전화를 한 건지 알았습니다.

 

‘죄’란 ‘하느님과의 단절’을 의미한다고 가르칩니다. 하느님과의 단절로 인간은 사랑과 행복과 영원한 생명을 잃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은 죄로 인해 고통 받게 되는 우리 자신들보다 우리와 사랑하고 싶지만 우리들의 거부로 인해 통교를 거절당한 하느님께서 더 고통스러워하시겠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해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봐주기를 원합니다. 짝사랑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는 경험이 있는 사람은 다 알 것입니다. 한 사람은 사랑하는 마음으로 상대를 열심히 바라보지만 상대방은 그 사람은 보지 않고 다른 것들만 쳐다보고 있다면 그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면서도 고통을 받게 됩니다.

마귀는 하느님을 미워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고통을 주기를 원합니다. 그 가장 좋은 방법은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인간들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짝사랑의 고통을 하느님께 안겨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완전 그 차체이시기 때문에 고통도 그만큼 완전합니다.

마귀가 인간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쓰는 방법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거울을 하나 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만을 바라보게 하고 자신만을 사랑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아름답지만 슬픈 이야기 하나를 해 드리겠습니다.

나르키소스는 보이오티아의 강의 신 케피소스와 님프 리리오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입니다. 나르키소스는 매우 아름다운 용모를 지니고 있어 숱한 처녀들과 님프들이 구애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숲과 샘의 님프인 에코(메아리)도 그를 사랑하였는데, 귀로 들은 마지막 음절만 되풀이해야 하는 저주를 받았기에 자신의 사랑을 전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에코는 나르키소스로부터 무시당하자 실의에 잠겨 여위어 가다가 결국 형체는 사라지고 메아리만 남게 되었습니다.

에코는 나르키소스도 자신과 똑같은 사랑의 고통을 겪게 해 달라고 빌었습니다. 그러자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가 이를 들어주었습니다. 헬리콘산에서 사냥을 하던 나르키소스는 목이 말라 샘으로 다가갔다가 물에 비친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사랑하게 되어 한 발짝도 떠나지 못하고 샘만 들여다보다가 마침내 탈진하여 죽고 맙니다.

그가 죽은 자리에는 시신 대신 한 송이 꽃이 피어났는데, 그의 이름을 따서 나르키소스(수선화)라고 부르게 되었고 정신분석에선 자기애(自己愛)를 뜻하는 나르시시즘이란 용어가 생겼습니다.

 

창세 때도 마귀는 인간이 선은 물론이요 악까지 알게 된다면 하느님과 같아진다고 하면서 선악과를 따먹도록 유혹합니다. 내가 하느님과 같아진다는 의미는 하느님은 필요 없으니 내 자신이 비친 거울을 보면서 나와 관계 맺고 나를 사랑하겠다는 의미입니다.

하느님 대신 자신만을 사랑하게 된 것은 일종의 저주입니다. 이것이 죄의 시작입니다. 사랑은 자신을 잊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보면서 동시에 자신을 바라볼 수 없습니다. 상대만을 바라보면 자신이 잊혀질까봐 두려워 할 수도 있겠지만 자신을 잃게 되는 것은 결국 자신만을 바라보며 자신만을 사랑하게 될 때입니다.

사람은 사랑을 해야 사람이 되도록 창조되었고 사랑은 자신을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처럼 ‘하느님의 어린양’으로서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오로지 인간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심으로써 참 사랑이 무엇인지 알려 주셨습니다. 자신을 찾는 방법은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버리고 사랑함으로써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바라보고 아들이 아버지를 ‘바라봄(사랑, 성령님)’으로써 하느님이 되는 것처럼 인간도 자신이 아닌 상대를 바라보고 사랑함으로써 참 인간이 되게 됩니다. 따라서 사랑엔 이기심이나 자존심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고 합니다.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자신 앞에 있는 거울을 치워버리고 자신을 찾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나는 내가 볼 수 있을 만큼 그렇게 작지 않습니다. 나는 하느님 안에서 완성되기에 먼저 자신을 버리고 하느님께 뛰어들지 않는다면 끊임없는 자아의 혼란 속에서 자신도 하느님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 슬픈 현실을 노래한 좋은 시가 바로 ‘가시나무’입니다. 이것을 한 번 읽어보면서 나 또한 나를 붙잡고 주님보다는 나를 먼저 찾으려하기에 혼란을 겪고 있지는 않은지 묵상해 봅시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엔 헛된 바램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네

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바람만 불면

외롭고 또 괴로워

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이 많았는데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당신의 쉴 곳 없네”

 

 

 로마에 유학 중이신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복음 묵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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