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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 [유광수신부님의 복음묵상]
작성자정복순 쪽지 캡슐 작성일2007-01-04 조회수484 추천수5 반대(0) 신고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요한 1, 43-51)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하고 물으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하고 대답하셨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에게 이르셨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이어서 그에게 또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지난번 피정 때 나는 어느 형제분과 인사를 하면서 "아무개 아니냐. 만나서 반갑고 이 피정에 와 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하였다. 그 형제는 내가 자기를 어떻게 아느냐고 말하면서 매우 놀라는 모습이었다. 사실 그 형제와 나는 한번도 만난 적은 없다. 다만 그 형제가 말씀 학교의 직원이 지도 하는 묵상 나누기에 매우 열심히 나오시고 아주 충실하게 준비하신다는  말을 듣고 나는 나대로 그 형제에 대해 관심을 가졌고 기회가 되면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리라고 생각했었다.

 

그 형제에게서는 뜻하지 않았던 일이었던 것이다. 우선 신부님이 자기를 알고 있다는 것에 대해 놀랬고 그것이 무척 고마웠던 모양이다. 직원의 말에 의하면 지금도 가끔"신부님이 자기를 알아보았다."는 것에 대해 매우 자랑스레 이야기하곤 한다는 것이다.

누가 나를 알아 준다는 것은 참으로 기분 좋은 일인가 보다. 그것도 전혀 예기치 못한 사람이 평소에 자기가 존경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를 알아보고 먼저 인사를 한다는 것은  놀랠만한 일인가 보다.  왜 그럴까? 자기의 존재를 인정받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가 자기를 알아준다는 것은 그 사람한테 사랑을 받고 있고 자기가 그 사람한테 관심의 대상이라는 점 때문일 것이다.


우리도 이런 경험을 많이 하였을 것이다. 어느 낮선 곳에 갔을 때 누군가 나를 알아보고 다가 와서 인사를 하거나 반갑게 맞아준 경우 말이다. 아주 어려운 상황에서 어떤 사람이 나에게 나가와서 아! 누구시군요, 나는 평소에 선생님을 존경했습니다. 제가 뭐 도와드릴 일이 없나요. 아무튼 누군가가 나를 알아준다는 것은 무척이나 기분 좋은 일이다.

 

오늘 나타나엘이 예수님한테 처음으로 갔을 때 "보라, 저 사람이야 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라는 칭찬을 듣고 감격하여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라고 예수님께 묻는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라는 말씀을 묵상하자.
나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몇 가지 질문이 일어난다.  예수님이 나타나엘을 보시고 금방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라고 말씀하셨다면 과연 예수님이 아시고 계신 나는 어떤 사람일까? 예수님이 나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단 한번이라도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생각해 보았다면 과연 그 때의 나의 모습은 어떤 모습이었는가?  예수님이 나에 대해서 알고 계신다면 나는 과연 예수님에 대해 알고 있는가? 내가 알고 있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나는 나에 대해서 아는가?  내가 나에 대해서 알고 있는 나와 예수님이 나에 대해서 알고 있는 나의 모습과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등 여러 가지 질문이 일어난다.

 

여기서 몇 가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묵상해보자.
누군가가 나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했을 때 반갑고 기분이 매우 좋은 경우도 있을 것이다.


또 반대로 두렵고 떨리고 어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 숨고 싶은 심정일 때도 있을 것이다. 나는 나 말고는 아무도 나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뜻밖에 나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무척 당황스러운 일일 것이다. 내 어두운 과거가 다 드러날까 봐 두렵고, 나만이 고이 간직해왔던 비밀이 탄로 날까 봐 두려울 것이다. 우리는 그럴 때 나도 모르게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라고 당황해하며 질문할 것이다.

 

이 세상에는 누구에게나 자기 안에 "네 구역"이 있다고 하는데 이것을 Jonari(요나리) 창이라고도 부른다.

첫째는 나에 대해서 나만이 알고 있고 다른 사람들은 전혀 모르는 부분이 있다. 둘째, 나에 대해서 나는 모르는데 다른 사람이 알고 있는 부분이 있다.

셋째, 나도 알고 다른 사람도 아는 부분이 있다.

넷째, 나도 모르고 다른 사람도 모르고 오직 하느님만이 아는 부분이 있다.

 

이것은 누구나 다 마찬가지이다. 그러고 보면 내가 나에 대해서 알고 있는 부분이 결코 많지 않다. 어쩌면 나 자신도 나에 대해서 잘 모르는 부분이 더 많은 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남을 판단하지 말라."는 것이다. 내가 나도 잘 모르는데 어떻게 남을 알겠으며 또 내가 안다고 한들 얼마나 알고 있느냐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나 자신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양, 그리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양, 말하고 판단한다.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인가? 무지한 사람이 용감하다고 했던가? 
 
나는 나에 대해서 정말 얼마나 아는가? 내가 알고 있다고 하는 그것이 정말 나인가? 언젠가 텔레비젼에서 만덕 스님이 일년간 만행을 하고 나서 마지막으로 한 말이 "다른 사람도 모르는데 내가 나를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라는 말이었다. 만행은 불교에서 자기 자신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다. 그렇다. 나는 나 자신을 알 수 없다. 왜 그런가? 내가 나를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나를 만들지 않았는데 어떻게 나를 알 수 있는가? 나를 아는 분은 오직 나를 만드신 창조뿐이시다. 따라서 내가 나를 알고 싶으면 나를 만드신 하느님을 알아야 하고 그분을 통해서만이 나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느님은 나의 원형이시고 나를 만드신 분이시다. 그래서 시편작가는 이렇게 노래한다. 

 

"주여, 당신은 나를 샅샅이 보고 아시나이다.
앉거나 서거나 매양 나를 아옵시고, 멀리서도 내 생각을 꿰뚫으시나이다.
걸을 제도 누울 제도 환히 아시고, 내 모든 행위를 익히 보시나이다.
말소리 내 혀 끝에 채 오르기 전에, 주는 벌써 모든 것을 알고 계시나이다.
알으심이 너무나 놀랍고도 아득하와, 내 힘이 미치지 못하나이다.
당신의 얼을 떠나 어디로 가오리까, 당신 얼굴 피해 갈곳 어디오리까
하늘로 올라가도, 거기 주는 계시옵고, 지옥으로 내려가도 거기 또한 계시나이다.
새벽의 날개를 이 몸이 친다 하여도, 저 바다의 먼 끝에 산다 하여도
거기에도 당신 손은 나를 인도하시고, 그 오른손이 몸을 잡아 주시리다.
당신은 오장육부 만들어 주시고, 어미의 복중에 나를 엮어 내셨으니
묘하게도 만들어진 이 몸이옵기, 하신 일들 묘하옵기, 당신 찬미하오니
당신은 내 영혼도 완전히 아시나이다.
은밀한 속에서 내가 지음 받았을 제, 깊숙한 땅 속에서 내가 엮어졌을 제,
당신은 내 됨됨이를 알고 계셨나이다.
(시편 138)  
 

 

                                                   -유광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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