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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09-01-04 조회수888 추천수12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09년 1월 4일 주님 공현 대축일
 
 
 Upon you the LORD shines,
and over you appears his glory.
(Is.60.2)
 
 
제1독서 이사야 60,1-6
제2독서 에페소 3,2.3ㄴ.5-6
복음 마태오 2,1-12
 
 
혹시 웃는 동물 보셨어요? 인터넷에 종종 웃는 동물 사진이 올라오긴 하지만, 그건 모두 컴퓨터로 합성한 것이지 실제로 웃는 동물은 없다고 하지요. 바로 이 점이 다른 동물들과 인간의 큰 차이점입니다. 즉, 인간들만이 웃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거리를 거닐다 보면 웃는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특히 요즘처럼 날씨가 추우면 더욱 더 몸을 움츠리면서 인상을 팍팍 쓰고 다니지요. 그 모습이 과연 보기 좋을까요?

당연히 보기가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올해부터는 사람들에게 보기 좋은 모습, 즉 웃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새해 결심을 했지요. 그리고 얼마 전, 전철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의자에 앉아 있는데 맞은 편 의자에 어떤 꼬마아이가 앉아있는 것입니다. 저는 새해 결심대로 밝게 웃었습니다. 그랬더니 이 꼬마아이도 저를 보고는 활짝 웃더군요. 역시 웃는 것은 ‘서로 좋은 것이구나.’라는 것을 다시금 느끼는 순간이었습니다.

잠시 뒤, 그 꼬마아이가 내리고 그 옆의 깍두기 머리를 한 아저씨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저는 이번에도 웃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무뚝뚝해 보이는 아저씨를 바라보며 웃는다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결국 웃는 것도 아니고, 비웃는 것도 아닌 아주 어색한 웃음을 아저씨에게 던질 수밖에 없었지요. 그리고 이 아저씨는 그런 제 모습을 보고는 인상을 쓰시면서 “왜요?”라고 응답하십니다. 저는 곧바로 답했지요.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어린이들을 바라보며 웃으면 서로 웃음을 나눌 수가 있는데, 아저씨들을 바라보며 웃는다는 것이 너무나 어색합니다. 아니 맞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이것이 어린이와 어른의 차이이지요. 어린이들은 모든 사람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있는데 반해서, 어른들은 받아들이는데 너무 많은 제약들이 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예수님께서 2000년 전 아기의 모습으로 이 땅에 강생하신 이유를 조금이나마 깨닫게 됩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제한적으로만 받아들이는 어른의 모습이 아닌, 모든 사람을 포용할 수 있는 아기의 모습으로 태어나심으로 인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다 수용하시겠다는 것을 확고히 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어린이와 같은 순수하고 겸손한 마음을 간직해야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적으로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신 것을 기념하는 오늘, 우리들은 가스팔, 멜키올, 발타샬이라고 불리는 동방박사의 모습을 복음에서 목격하게 됩니다. 그들은 이 세상의 어른들처럼 이것저것 계산하지 않습니다. 단순히 별만을 바라보면서 묵묵히 주님을 향해 나아갔으며, 초라한 마구간에 그것도 구유에 누워 계신 아기를 바라보면서 인간적인 기준으로 판단하지도 않습니다. 즉, 아기 예수님의 모습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낮은 자세를 취하십니다. 그래서 아기 예수님께 왕을 표시하는 황금을, 하느님을 경배하는 표시인 유향을, 마지막으로 사람이 죽으면 그 시체에 바라는 향료로서 인간을 표시하는 몰약을 선물로 봉헌하지요.

동방박사의 모습을 통해 또한 갓난아기로 태어나신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우리들 역시 이렇게 어린이와 같은 순수하고 겸손한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야 세상의 모든 이들을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으며, 오늘 독서의 말씀처럼 주님의 영광이 우리 위에서 환하게 비춰질 수 있을 것입니다.





미래는 꿈의 아름다움을 믿는 사람들의 것이다.(엘리노어 루즈벨트)




셈 문화(이어령, ‘뜻으로 읽는 한국어 사전’ 중에서)
 
무엇인가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을 때 우리는 흔히 ‘... 셈치고’라는 말을 잘 쓴다. 그래서 도둑맞은 셈치고, 술 마신 셈치고 객쩍은 돈을 쓰는 경우도 있다. 자기 혼자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남에게 무엇인가 부탁할 일이 있어도 ‘... 셈치고’ 도와 달라고 말한다.

셈을 한자말로 옮기면 계산이다. 어느 사회에서든 계산은 숫자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늘이거나 줄일 수 없다. 숫자에는 쌀쌀한 바람이 일기 마련이다. 엄청난 규칙과 객관성이 따른다. 그런데 우리의 셈은 거꾸로 냉엄한 계산의 세계를 얼버무리는 데 그 특성이 있다. 세계 어느 나라에도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라는 후한 속담은 찾아보기 힘들다. 객관성보다 주관적인 기분을 중시하는 ‘셈치는’ 사회에서나 일어남직한 발상이다.

파리에 살 때 고추를 산 적이 있다. 저울을 다는데 눈금이 조금 오르니까 고추 한 개를 내려놓는다. 눈금이 조금 처지자 주인은 가위를 들고 나와 고추 한 개를 반으로 잘라 저울눈을 채워 주었다. 반 토막 난 고추를 보면서 나로서는 야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셈치고’라는 그 불합리한 말에 한숨을 쉬다가도 지나치게 합리 일변도로 치닫는 현대 문명의 빡빡한 풍경을 보면 흘러내릴 것을 알면서도 몇 번씩이나 쌀을 고봉으로 퍼 올리는 한국인의 그 손이 그리워진다.

‘셈 문화’는 비합리주의도 반합리주의도 아닌 ‘초합리주의다.’ 합리주의를 넘어서는 새 문명 모델의 사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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