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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복음 묵상 - 주님의 초대와 그 합당한 응답
작성자김현아 쪽지 캡슐 작성일2009-01-04 조회수667 추천수11 반대(0) 신고

 

 

 

주님 공현 대축일 - 주님의 초대와 그 합당한 응답

 

유럽에서 공부하는 저희 교구 사제 신학생들이 이번 연말연시를 독일에서 함께 했습니다. 나눔 주제 중 가장 핵심적이었던 것은 바로 ‘관계’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관계에 있어서 서로를 솔직하게 열어 보이는 것이 먼저 선행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모두들 그 말이 옳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각자 서로에게 숨기고 있는 것들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도 가장 친한 친구에게도 다 털어놓지 못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겐 이만큼, 어떤 사람에겐 더 많이 내 자신을 열어 보입니다.

이는 열려있지 않아서가 아니라 경솔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관계 맺기 위해 솔직히 다 열어 보이는 것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상대를 보며 어느 정도는 차별을 둡니다. 사실 그 차이가 바로 관계의 깊이를 말해줍니다.

친한 친구에게 어떤 개인적인 이야기를 솔직히 이야기 했는데 그것을 다른 이들에게 발설해 버렸을 때 그 사람에겐 더 이상 신뢰가 가지 않고 숨겨야 할 것은 숨기게 됩니다. 이는 솔직한 사람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 상대가 그만한 것들을 알 준비가 되어있지 않아서입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각자와 깊은 관계를 맺고 싶어 하시지만 경솔하게 누구에게나 모든 것을 똑같이 다 열어 보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예를 들어 최후의 만찬 때에 누가 배반할 것인지를 사도들이 알고 싶어 했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오직 자신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던 요한에게만 알려주셨습니다. 만약 모든 사도들에게 그 사실을 알려 주셨다면 그 사도들이 유다를 어떻게 했을 것이고 그렇게 모두 죄로 떨어졌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만이 속삭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예수님 가까이 있었기에 비밀을 그에게만 알려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과 더 가까워질수록 그분은 당신의 비밀을 더 드러내 보이십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다른 사도들보다도 요한과 더 깊은 관계를 맺고 계셨음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이 차별은 예수님 탓이 아닙니다. 요한만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다른 사도들의 탓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태어나셔서도 모두에게 당신 자신을 똑같이 드러내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당신이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만 당신을 드러내셨습니다. 성모님과 요셉성인, 그리고 목동들, 또 시메온과 한나 예언자 등에게만 당신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이는 합당한 사람에게만 당신 자신을 열어 보이시고 그들과 깊은 관계를 맺기를 원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멀리 동방박사들에게 당신을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당신께로 이끄신 방법은 하늘의 별을 통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왜 모두가 볼 수 있는 하늘의 별을 통해 사람들을 당신께로 이끄시지만 어떤 사람은 그 빛을 따라올 줄 알고 또 어떤 사람은 그 빛에 관심조차 없을까요?

우리 모두도 빛을 따라가며 그리스도를 만나는 여정에 있습니다. 과연 어떤 마음자세를 지녀야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시고 깊은 관계를 맺게 되는지 오늘 동방박사들을 통하여 세 가지로 간추려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이들은 영원한 것을 ‘희망’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세상 것을 추구했다면 그렇게 쓸데없이 하늘만 쳐다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참 진리를 추구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바라보던 것은 세상이 아니라 ‘하늘’이었습니다. 별이 그들에게만 보인 것이 아니었겠지만 그들만이 그 별의 의미를 알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에겐 대수롭지 않은 변화일지라도 그들에겐 진리로 이끄는 참 빛이었습니다.

그들이 무엇을 희망하고 있었는지는 그들이 준비한 선물로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각자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준비했습니다.

황금은 제일 귀한 금속으로써 왕이나 하느님께 드리기에 적당합니다. 즉, 세상에 왕이 많지만 그것이 아닌 영원한 왕을 찾아 나섰던 것입니다.

유향은 자신을 태움으로써 악취를 중화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즉, 자신을 희생하여 세상 죄의 악취를 중화시킬 구원자를 희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몰약은 죽은 사람에게 발라 부패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미 새로 오실 영원한 임금이 세상의 죄를 씻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죽어야 할 것까지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태어날 때부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운명을 지니셨습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것에 희망을 두는 사람에게 당신의 빛줄기를 던지십니다. 그러나 세상 것에 집착하며 사는 사람들은 하늘을 볼 여유가 없어 예수님이 던지신 빛을 보지 못하고 맙니다.

 

둘째는 같은 진리를 바라보며 ‘함께 걸을 줄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영원한 것을 추구하는 것은 개인들이지만 하느님께서는 모여서 함께 오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서로 다르게 출발한 이들을 한 데 모으셨습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이 공동체가 교회이고 작게는 수도회, 혹은 여러 단체, 또 가정이 될 수도 있습니다.

동방박사들이 개인적으로 왔다면 모두가 예수님을 찾기는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함께 모여 있었기 때문에 별이 사라졌을 때 헤로데에게 갈 용기도 있었고 함께 예수님을 뵐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영원한 것에 뜻을 두는 이들은 교회 안에 한데 모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사도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토마만이 예수님을 뵙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도들과 떨어져 혼자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은 하느님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서로 같은 곳을 보며 시기와 질투 없이 ‘함께’ 걸을 줄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이름으로 둘이나 셋 이상에 모인 곳에 당신도 함께 계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분명 믿음을 지닌 사람들이 홀로 당신께 오는 것보다 ‘함께’ 오는 것을 더 좋아하신다는 뜻입니다.

 

셋째, 이들은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광부가 금맥을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하물며 더 귀한 영원한 진리를 만나기가 그리 쉬울 리가 없습니다.

그렇게 믿고 따라왔던 인도자별이 사라지자 그들은 실망하고 포기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겸손하게 사람들에게 물어볼 줄 알았습니다. 비웃음을 살 수도 있었고 미친 사람 취급을 받을 수도 있었지만 그들은 참다운 진리를 확신했고 그것을 위해 겪는 시련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겸손했고 어떠한 어려움도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 시련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작심삼일의 정신으로는 절대로 영원한 진리를 만날 수 없습니다. 물방울이 바위를 뚫습니다. 매일 5분만 성경을 읽어도 평생 신구약 10번은 통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단 한 번도 성경을 통독하지 못한 신자들이 많습니다.

‘꾸준함’만 있으면 그리스도를 만나는 일은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영원한 것을 바라고, 사람들과 관계 맺을 줄 알며, 포기하지 않는 꾸준함을 지녔던 동방박사들은 먼 곳에서 살았음에도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주님공현이란 주님께서 공적으로 당신을 드러내 보이셨다는 뜻입니다. 자신을 드러내 보이신다는 것은 ‘관계’맺자는 초대입니다. 우리들은 누구나 이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동방박사들처럼 주님의 초대에 합당한 자세들을 지니고 있는지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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