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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펌 - (35) 기가 꺾여 용기를 잃어버렸는데
작성자이순의 쪽지 캡슐 작성일2008-02-20 조회수483 추천수3 반대(0) 신고
 

2004년1월11일 주일 주님 세례 축일 ㅡ이사야42,1-4.6-7;사도행전10,34-38;루가3,15-16.21-22ㅡ

 

      (35) 기가 꺾여 용기를 잃어버렸는데

                                  이순의

                           

 

 

ㅡ새로운 의미ㅡ

내가 처음 성당에 간 기억은 국민(초등)학교 3학년 때 학교에서 어린이날 학예회 무용발표를 했었는데 딱히 큰 볼거리가 많지 않았던 시절이라서 그러했는지, 그 해 성탄절에 동네사람의 초대로 그때 그 무용을 해주시라는 부탁을 받고 성탄잔치에 참석한 기억이 있다. 연습도 없이 너무 오랜만에 추는 춤이라 틀렸었는데 춤이 틀렸다는 부끄러움 때문에 다른 친구들은 모두 춤을 추는데 나 혼자 다리를 뻗고 울어서 그게 성탄의 볼거리가 되어버린 아주 그럴싸한 추억이 있다. 그리고 두 번째 간 성당은 중학교 2학년 때 큰언니를 따라서 성당에 다녔는데 7년을 다니고 나서 세례를 받았다.

 

그러니까 신자 생활이 어언 30여년이 되는 것 같다. 30여년의 신자생활동안 냉담은 한 번도 없었으나 참으로 굴곡이 많았고, 참으로 인연도 많았으며, 참으로 보람도 많았고, 시련 또한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주님의 뜻이 단 한 번도 나를 좌절 시키지 않고 잘도 붙들어 매신 끈이 고래심줄 보다 더 단단했던 것 같다.

 

30년 중에서 7년은 세례도 안하고 그냥저냥 알러 다니느라고 바빴다. 고등학교는 개신교 학교를 다녔으므로 일요일이면 두개의 교회를 다니기도 하며 세월이 갔다. 받으라는 세례는 안 받고 염탐(?)을 하는 기간이 상당히 길었던 것 같고, 한 3년은 신앙의 확신을 실험해 보는데 나름대로의 시간이 간 것 같다. 그리고 20년은 주님께 나를 온전히 내어 놓고 그냥 이끄시는 대로 살아버린 세월이었다. 돌아보니 심히 스스로에게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가난도 아픔도 조건도 명에도 돈도 사랑도 세상 어느 것도 주님의 이름으로 이겨내지 못할 것이 없다고 믿으며 두려움 없이 넘어간 세월이었다. 그런데 30여년 만에 일명 냉담이라는 걸 하고 있다. 냉담을 하고 싶은데 마음은 진짜로 사랑하는 님께로 가서 있고, 몸은 먼 땅 끝에 가서 있는 것 같은 그런 냉담인 것이다. 평일 미사를 20년을 다닌 세월이라 적응도 되지 않고 인생이 갈 곳 없이 살아온 삶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성당을 못 가게 되고 보니 나는 그동안 갈 데가 없는 사람이었다는 걸 절실하게 깨달아버린 너무나 외로운 고독감이 엄습하였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안 가는 것이 아니라 못 가게 되어버린 것은 또 다른 주님의 뜻이 아니겠는가?! 너무 힘들어서 너무 지쳐서 쉬고 싶다고 쉬고 싶다고 마음속으로 하염없이 토하면서도 그것이 그렇게 쉬어지지가 않고 힘이 들더니 건강에 직격탄을 맞아버린 것이다. 이제는 쉬기 싫어도 살려면 쉬어야 한다. 세상근심이 나를 짓누르고 있다 해도 쉬어야 한다. 그 동안의 세월은 참으로 나에게 낮은 것만을 요구하신 시간들이었다. 가진 게 있어서 부티를 내 보겠는가? 남편이 잘나서 목에 힘을 줘 보겠는가? 자식이 다 커서 뒤가 든든하겠는가?

 

가난이 죄라는 옛 속담을 이해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나의 궁핍함은 나와 상관없이 주변의 여유로움을 항상 편하지 못 하게 했다. 그냥 아무소리 안하고 되는대로 살아도 가까운 가족들에게는 그 자체가 짐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정말로 가난이 죄더라는 걸 알아버린 세월이었다. 그래서 나는 나 보다 조금이라도 여유 있는 사람에게는 할 말이 꼭 있어도 하지 않고 또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하는 버릇이 생겼다. 없는 사람이 바른 말 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은 민간인이나 정치판이나 하나도 다를 바가 없으므로 적당히 비위 맞추기 어려우면 안 만나고! 말 안하고! 내 울타리 밖을 벗어나지 않으면 짐도 안 되고! 걸리적거리지 않아서 여러 가지로 편안하다! 는 걸 알아버렸다.

 

남편이 잘나지 못 했다는 것은 사회가 이미 선을 긋고 있는 포터라인이다. 내가 내 남자에 대해서 세상에 드러내 놓고 자유로워지기 시작한 것은 그리 길지 않다. 세상은 부모의 유산을 놓고도 부모를 욕되게 하고, 좋은 가정을 두고도 자신의 가정이 좋은지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 그런데 십자가만 잔뜩 지고 살아가는 내 남자에 대해 내 자신이 자유롭지 못한 것은 그 사람을 경외(境外)시 해서가 아니라 사회의 일반적인 성향을 맞춘다는 기본 개념의 탓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냥 걸어 다니는 사람도 높아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세상 사람을 볼 때 언제나 나보다 높게 보는 버릇이 생겨버린 것이다. 목에 힘주고 사는 사람들도 다 까닭이 있어서 목에 힘주고 산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세상은 자식을 키우는데도 이중의 인격체다. 자기 아이는 아무것도 안하고 학교만 다닌다고 천재를 가진 사람처럼 얘기 한다. 그러나 그런 천재는 어쩌다 나오는 세상이 되어 버렸고, 이 사회가 자식을 위해 엄청난 비용을 투자 하는 것이다. 가야할 길이 까마득한 아들을 앉혀 놓고 혼자 해 보거라고 재촉만 했으니 부모로서 무슨 자격이 있고 무슨 뒤를 보겠다고 기대 하겠는가? 늦게나마 뭐라도 시켜본다지만 그게 참으로 어렵고 힘든 전쟁인 것 같다. 아이는 현시대에 물들어 사는데 어미는 봉건시대의 가난한 천민의 입장이니 착하다는 그 이유만으로 보물을 안고 있다고 만족하기에는 시대가 요구하는 바가 아니지를 않는가?

 

이래저래 20년의 세월은 나에게 참는 법과, 겸손 해지는 법과, 욕심을 비우는 법을 확실하게 깨우쳐주는 세월이었다. 내가 세례를 받고 주님의 선택을 받아서 살아 온 삶의 방식이다. 그러나 나에게도 부티를 내고 목에 힘을 주고 든든한 빽이 있었다. 그것은 주님의 이름을 걸고 할 수 있는 신앙의 활동들이었다. 신앙의 활동은 돈이 없어도 부티가 났고, 남편이 잘나지 않았어도 목에 힘을 줄 수 있었고, 자식의 미래를 몰라도 희망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것마저 허락되고 있지 못하다. 가로 막혀서 기가 꺾여서 용기를 잃어 버렸다.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럼 이제부터 나는 무엇으로 사는가?

 

묵상을 쓰면서 산다. 신앙의 새로운 의미가 시작된 것이다. 30년의 사생활을 마치신 주님은 세례를 통해 아버지의 뜻을 새로이 따르려 하신다. 구원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30년이나 신자생활을 한 나에게도 새로운 신앙의 길이 약속되기를 기대해 본다. 이제는 모든 것을 승화시킬 수 있는 너그러움을 배우게 해 주시라고 청하고 싶다. 물론 인도하심이 아버지의 뜻이었듯이, 이루심도 아버지의 뜻이라고 믿으며, 하루하루의 일상을 이끄시는 대로 따를 것이다.

 

교회에 오류를 남기거나 위법이 되지 않는 글을 쓰게 해 주시라고 기도하고, 그날그날의 영감에 솔직하게 해 주시라고 기도하며, 이 모두가 항상 주님의 이름으로 바치는 나의 기도이기를 청해 본다. 오늘이 마지막처럼 사는 삶이 아니라 늘 오늘이 새로운 시작이라고 생각하며 작을 지라도 희망을 안고 살아가고 싶다. 주님의 세계이든 세상의 세계이든 나도 좀 이제는 부티도 나고! 목에 힘도 주고! 뒤도 든든해지고 싶다! 주님의 세례축일에 나에게도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오늘이 마지막이라면 지난 시간들이 너무 가슴 아프기 때문이다.


오늘이 나의 새로운 시작이다. 희망으로 가는 시작! 출바~알! ㅡ아멘ㅡ

 

ㅡ갈대가 부러졌다 하여 잘라 버리지 아니하고, 심지가 깜박거린다 하여 등불을 꺼 버리지 아니하며, 성실하게 바른 인생길만 펴리라. 그는 기가 꺾여 용기를 잃는 일 없이, 끝까지 바른 인생길을 세상에 펴리라. 이사야42,3-4ㅡ

 

 

 

 

 
  -잠실7동성당 세례축일 꽃꽂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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