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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믿음을 행하는 행동 ]과 [ 믿음을 행하지 않는 행동 ]
작성자장이수 쪽지 캡슐 작성일2009-03-25 조회수484 추천수1 반대(0) 신고

믿음을 행하는게 곧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행함이 있다고 해서 믿음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행함이 있는 믿음] 곧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하고는 말하지를 않습니다.

[ 믿음을 행한다 ] => 올바른 신앙의 삶입니다. [ 행하는 것이 믿음이다 ] => 올바른 신앙의 삶이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행함은 동물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동물들은 자기 본능에 따라 움직입니다. 그렇다고 동물이 믿음을 행하는 것은 결코 아닌 것입니다.

믿음에 그리스도께서 빠지면 그것은 온갖 것들에게서 맛의 감흥을 구하고자 하는 동물의 욕구와 다를바가 없습니다. [ 믿음을 행한다 ]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함을 의미하며 그것이 진정한 "살아있는 믿음"이다고 말하게 됩니다.

[ 믿음을 행하는 사람 ]과 [ 믿음을 행하지 않는 사람 ]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 믿음을 행하지 않고 ] 단지 [ 행함을 추구하는 사람 ]은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과 상관없이 인간적 목적으로 행동하고자 하는 사람은 / 동물적 욕구로 행하는 동물과 무엇이 다릅니까. 그런 믿음을 두고 [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 ]이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행할 때, 행함은 살아 있다고 말하는 것이며 / 믿음을 행하지 않는 행함은 죽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행함>과 <죽은 행함>의 분별이 필요하며

<살아있는 행함의 믿음이 - 행함이 있는 살아있는 믿음>이다고 말하는 것이며, <죽어있는 행함의 믿음은 -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하고도 같은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 없다면 행동은 '살아있는게' 아니라 이미 그 행동은 '죽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안에 그리스도께서 없다면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 생명이 없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는 행동(행함)은 '하느님의 생명'을 내어 주지 (전하지) 못합니다. 행함이 있을지라도 벌써 죽은 것입니다. 

자기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실 때 ( = 은총 ) 그리스도의 힘으로 믿음을 행하게 됩니다. 은총은 믿음 보다도 앞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란 ... 하느님의 말씀, 진리(성경과 성전, 교도권)에 대한 믿음을 의미합니다. 믿음이 없는 행동은 그리스도가 없는 행동, 곧 말씀이 없는 행동, 거짓 마리아에 대한 '마리아 신심꾼'들에게서 나타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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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톨릭교회교리서>

1994 의화는 하느님 사랑의 가장 뛰어난 업적이다. 하느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며 성령을 통해 주어진다. 1996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의화된다. 은총은 하느님의 부름에 응답하도록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호의이며 거저 주시는 도움이다. 1997 은총은 하느님의 생명에 대한 참여이다. 곧 은총은 우리를 성삼위의 내적 생활 안으로 이끌어 준다. 그리스도인은 세례로 신비체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은총을 받는다.

2001 은총을 받아들이도록 인간을 준비시키는 것은 은총이 이미 작용한 결과이다. 은총은 우리가 신앙을 통한 의화와 사랑을 통한 성화에 계속 협력하도록 하는 데 필요하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시작하신 일을 완성하신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원의(願意)를 일으키심으로써 일을 시작하시며, 우리의 의지에 협력하심으로써 일을 완성하십니다.” 2010 은총의 영역에서는 하느님께서 주도권을 행사하신다. 그러므로 회개와 용서와 의화의 기원이 되는 최초의 은총을 받을 권리가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최초의 은총을 받은 뒤 우리는 성령과 사랑의 인도를 받아, 공로를 세울 수 있다.

2011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세우는 모든 공로의 원천이 된다. 은총은 적극적인 사랑으로 우리를 그리스도와 결합시킴으로써 우리 행위에 초자연적 성격을 부여하여 결과적으로 하느님과 인간들 앞에서 공로가 되게 해 준다. 성인들은 항상 그들의 공로가 순수한 은총이라는 사실을 생생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참고.... 펠라지우스주의 : 펠라지우스(Pelagius)가 주장한 이단설 : 펠라지우스는 인간은 하느님의 섭리를 자력으로 실행할 능력이 있으므로 구령(救靈)도 신앙의 노력으로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다만 그것을 쉽게 하는데 은총이 필요할 따름이다고 주장하였다.

 

주님께서는 모든 일에서 인간이 당신의 도우심을 구하고 의지하기를 바라십니다. 주님께 의지하고 그분의 도우심을 청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행하시지 않으면 인간 의지와 힘만으로 하느님의 일을 감당해 내지 못합니다. 지팡이는 하느님의 권능을 뻗치게 하는 도구입니다. 지팡이를 갖고 가라는 것은 하느님께 모든 것을 의지하라는 뜻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있으서 먼저 자기가 먹고 마시며 걸칠까 하는 것을 걱정한다면 결코 말씀을 전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인간의 욕구는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별 볼 일 없는 사람에게 아주 열악한 환경을 제공하고서 ‘하느님 나라’를 세상에 알리라는 엄청난 사명을 주시고 파견하시는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정말로 부족한 제자들이었지만 그들도 멋지게 책임을 완수했습니다. 우리 곁에는 '지팡이' 이신 예수님께서 항상 함께 현존하심을 알리는 것입니다. 

복음 선포자의 삶은 가난한 삶입니다. 그러나 이 가난은 자신이 선택한 가난입니다. 육신의 욕망에 얽매인 삶이 아니라 - 모든 것들에서 해방된 자유로운 삶입니다. 하느님께 의지하고, 하느님과 함께 가며, 하느님의 힘으로 행위하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현존은 - 그들이 오직 믿음을 가져 예수님으로부터 능력을 입고 예수님처럼 사람들에게 다가가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고 더러운 악령들을 쫓아내며 병자들을 고쳐 주면서 도래한 하느님 나라를 실현시키기 위함입니다. 인간 자신들의 행위가 아니라 , 하느님의 행위(하느님 영광)를 드러내시고자 함입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받으신 유혹 중에서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라는 유혹은 바로 인간 자신을 세상에 그 스스로의 존엄성을 떨쳐보라는 유혹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유혹에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라는 말씀으로 이겨 내셨습니다.

 

성령의 은총에는 우리를 의화(義化)하는 힘이 있다. 곧, 성령의 은총은 우리의 죄를 씻어 주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그리고 세례를 통하여“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누리게 해 준다. 성령의 권능을 통하여, 우리는 죄에 대해 죽음으로써 그리스도의 수난에 참여하고,새 생명으로 태어남으로써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한다. 우리는 교회인 그리스도 몸의 지체들이며 참 포도나무 곧 그리스도 자신의 가지들이다.

은총의 작용으로 인간은 하느님께 향하고 죄에서 멀어져 위로부터 오는 용서와 의화를 받아들인다. 의화는 단순히 죄를 용서받는 것뿐만 아니라, 또한 성화와 내적 인간의 쇄신도 내포한다. 성령은 내적 생활의 스승이시다.“내적 인간”을 태어나게 하는 의화는 인간 존재 전체의 성화(거룩)에까지 미친다.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의화된다. 은총은 하느님의 자녀 곧 양자가 되고 신성(神性)과 영원한 생명을 나누어 받는 사람이 되라는 하느님의 부름에 응답하도록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호의이며 거저 주시는 도움이다.

그리스도의 은총은 무상의 선물이며, 하느님께서 우리 영혼을 죄에서 치유하여 거룩하게 하시려고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영혼 안에 불어넣어 주시는 당신 생명이다.은총은 우리가 신앙을 통한 의화와 사랑을 통한 성화에 계속 협력하도록 하는데 필요하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시작하신 일을 완성하신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원의를 일으키심으로써 일을 시작하시며,우리의 의지에 협력하심으로써 일을 완성하십니다.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시켜 주는 은총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에게 하느님께서는 거저 베푸시는 의로움의 결과로 참된 공로를 베풀어 주실 수도 있다. 바로 이것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공동 상속자”가 되게 하고“영원한 생명의 약속된 유산”을 받게 하는 은총에 의한 권리, 사랑의 완전한 권리이다. 우리 선행의 공로는 하느님 선의의 선물이다.먼저 은총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마땅히 드려야 할 것을 드려야 합니다. 공로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세우는 모든 공로의 원천이 된다. 은총은 적극적인 사랑으로 우리를 그리스도와 결합시킴으로써 우리 행위에 초자연적 성격을 부여하여 결과적으로 하느님과 인간들 앞에서 공로가 되게 해 준다. 성인들은 항상 그들의 공로가 순수한 은총이라는 사실을 생생하게 의식하고 있었다.“어떠한 신분이나 계층이든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교 생활의 완성과 사랑의 완덕으로”부름을 받는다. 인간은 모두가 성덕(거룩)의 소명을 받았다.

영적 진보는 언제나 그리스도와 더욱더 밀접하게 결합되는 것이 그 목표이다. 이 결합을 ‘신비적’이라고 하는 것은 ‘거룩한 신비들’, 곧 성사들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신비에 참여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신 삼위일체의 신비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당신과 더욱 깊이 결합하도록 부르신다.

어머니이신 거룩한 교회의 자녀들은 당연히 끝까지 신앙을 지키는 은총을 바라며,하느님의 은총으로 예수님과 일치하는 가운데 실천한 선행에 대한 하느님 아버지의 보상을 바란다. 신자들은 같은 생활 규범을 지켜 신랑을 맞을 신부가 단장한 것처럼 차리고 하느님께서 계시는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에서 하느님의 자비에 힘입어 다시 모이는 사람들의 ‘복된 희망’을 나누어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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