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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제로서 바치신 기도
작성자김용대 쪽지 캡슐 작성일2010-05-19 조회수483 추천수3 반대(0) 신고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말씀하셨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도록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께서는 아들이 아버지께서 주신 모든 이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도록, 아들에게 모든 사람에 대한 권한을 주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저는 이들과 함께 있는 동안,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켰습니다. 제가 그렇게 이들을 보호하여,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멸망하도록 정해진 자 말고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더 이상 세상에 있지 않지만, 이들은 세상에 있습니다.이제 저는 아버지께 갑니다. 제가 세상에 있으면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이들이 속으로 저의 기쁨을 충만히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저는 아버지께 갑니다.”(요한 17: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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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께서 저에게 하라고 맡기신 일을 완수하여, 저는 땅에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였습니다. 아버지, 세상이 생기기 전에 제가 아버지 앞에서 누리던 그 영광으로, 이제 다시 아버지 앞에서 저를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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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께서 세상에서 뽑으시어 저에게 주신 이 사람들에게 저는 아버지의 이름을 드러냈습니다. 이들은 아버지의 사람들이었는데,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켰습니다. 이제 이들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모든 것이 아버지에게서 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말씀을 제가 이들에게 주고, 이들은 또 그것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이들은 제가 아버지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참으로 알고,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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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들을 위하여 빕니다. 세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을 위하여 빕니다. 이들은 아버지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저의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고, 아버지의 것은 제 것입니다. 이 사람들을 통하여 제가 영광스럽게 되었습니다. 저는 더 이상 세상에 있지 않지만, 이들은 세상에 있습니다. 저는 아버지께 갑니다.
 
마태오 6장과 루카 11장에는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는 제자들의 요청에 예수님께서 직접 기도를 가르쳐 주신 것이 바로 ‘주님의 기도’로 우리가 매 미사 때마다 바치는 기도이다. 대사제가 자신과 온 이스라엘 회중을 위해 희생제물을 드리듯이 예수님께서도 당신 자신을 희생제물로 바치시기 전에 오늘 복음에 나오는 이 기도를 하셨다.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 때에 때가 되어 드리신 이 기도를 사제로서 바치신 기도라고 한다. 당신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에 당신 스스로 붙이신 근엄한 부연 설명이다. 이 기도는 고별사라고 해도 좋고, 유언이라고 해도 좋을 그런 기도이다.
새 계약의 대사제이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성부께건너가시는, 곧 자신을 희생시키는 때에 당신을 성부께 바치신다.제자들에게 마지막 고별사를 마치신 예수님이 하느님께 당신 자신과 제자들, 그리고 장차 당신을 믿게 될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장면이다.
 
이 기도 속에는 ‘영광’이라는 말이 여섯 번이나 나오는데, 사실 ‘영광’이란 일상과는 동떨어진, 축제에나 있을 법한, 그런 점에서 사실은 평소에는 잘 쓰지 않는 단어이다. 그러나 이 단어는 반대로 예수님의 매우 개인적인 이 기도를 드리게 만든 견인차가 되는 중요한 단어이기도 하다. 아버지가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였고, 아들이 아버지에게 그 영광을 돌린다. 아주 모범적이고 돈독한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라고 생각은 되지만,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영광’을 뜻하는 성경의 원어인 그리스어 속에는 단순한 영광의 뜻만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존경의 의미 또한 함께 들어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는 언제나 ‘존경심’이 있어야만 제대로 된 관계가 성립될 수 있다. 부모와 자식 간에, 스승과 제자 사이에, 부부 사이에 사랑을 담은 존경심이 그 밑바닥에 깔려 있지 않으면 이 그 관계는 존속되지 않는다. 존경심이 상대방에게 전해져야 떳떳하게 요구할 수 있게 되고, 그 요구가 힘이 있게 된다. 부모 역시 자식을 존경해야 한다. 사랑의 모체(母體)는 존경심이기 때문이다. 존경심은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바치시는 이 기도를 보면, 존경심이 구석구석에 스며있음을 볼 수 있다. 존경 안에서 아버지를 신뢰하실 수 있었고, 험난한 고난의 길을 꿋꿋이 걸어나가실 수 있었고, 제자들에게 그것을 보여주실 수 있었다. 예수님과 하느님 아버지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경이 없으면 아예 관계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아버지께 대한 존경은 우리의 인간관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존경 속에서 즉 사랑 안에서 매일을 살아갈 것을 당부하고 계신다.
 
또 하늘과 땅 사이, 하느님과 제자들 사이에 처한 예수님께서는 현재와 미래의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를 하신다. 이 구절을 달리 ‘일치를 구하는 예수님의 기도’라고도 한다.
이 기도의 주된 내용이 ‘하나됨’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저는 더 이상 세상에 있지 않지만, 이들은 세상에 있습니다.”하고 말씀하신 후 제가 세상에 있으면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이들이 속으로 저의 기쁨을 충만히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저는 아버지께 갑니다.”하고 기도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시기도 하고 계시지 않기도 하다고 말씀하셨다. 즉 예수님께서는 계시기는 하지만 이미 멀리 떠나신 것처럼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시기도 하고 지겹고 따분하게도 들리기도 한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성령의 관계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이러한 신성한 신비 안에서 제자들에 관하여 말씀하신 것이었다. 사랑에 관한 말씀이었다. “내 안에 너희가 있고”, “너희 안에 내가 있으며”, “그들이 아버지와 저 안에 하나가 될 것이며”, “당신께서 저에게 하신 말씀을 그들에게 전했습니다.”고 말씀하셨다. 바로 직전에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제대로 당신을 알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셨지만 이제는 제자들을 믿으시는 것처럼 보인다.
 
제자들이 그러했듯이 잘 안다고 생각하면 오류에 빠질 수 있으며 이 오류가 진실을 가로막는 수가 많다. 어두운 숲에서 탁 트인 곳을 발견하면 그곳이 가야 할 목적지로 착각하기 쉽다. 잘못된 확신은 고정관념을 만들어 내고 더 이상 진실을 추구하지 않게 만든다. 그릇된 확신은 마치 진리처럼 보이기 때문에 진리의 가장 큰 적이 된다.
 
영원한 생명’‘아버지와 아버지가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know) 것’이다. ‘Know’에 해당되는 그리스어 ‘yada’는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을 본받아 사는’ 것을 뜻한다. 또 ‘안다는 것(know)’은 ‘마음이나 지식으로 아는 것일 뿐만 아니라 핵심을 아는 것’을 뜻하며 ‘성령의 힘과 성령의 역사(役事)가 필요하다는 것’을 뜻한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말했다.
“형제 여러분, 우리 모두 온갖 교만과 헛된 영광을 조심합시다.
육의 영(靈)은 실천에 옮기는 데 있어서는 노력을 적게 합니다.
그리고 내적으로 신앙과 성화(聖化)를 얻으려 하기보다
사람들에게 겉으로 드러나는 그런 신앙과 성화를 얻기 원하고 열망합니다.
이와 반대로, 주님의 영은 육신이 괴로움과 모욕을 당하기를 원하며,
육신이 천한 것으로 여겨지고 멸시 받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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