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나는 예수님을 얼마나 잘 받아들이는가? 점수로는 몇 점일까?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0-03-16 조회수1,093 추천수1 반대(0) 신고

 

오늘 복음 묵상은 매일미사에 잘 나와 있습니다. 이 복음을 보면서 예전에는 그냥 단순히 보고 갔는데 제가 너무 무지했던 것 같습니다. 다시 한 번 더 말씀드리지만 너무 무성의하게 성경을 읽었던 것 같습니다. 통독의 개념으로 읽었습니다. 그러니 스토리 정도를 기억하는 그 정도입니다. 내용을 깊이 생각하는 그런 걸 잘 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런지를 한번 생각해봤습니다. 개신교는 어떤 사실을 스토리 위주로 말을 하지 깊은 내용은 잘 말하지 않습니다. 개신교엔 QT라는 게 있는데 우리와 비슷하지만 조금 깊이가 다릅니다. 우리가 좀 더 깊이가 있습니다.

 

저는 아직 우리 가톨릭 수준에서 하는 뭔가 진국 같은 묵상이 아니고 초벌 곰탕 수준입니다. 당연할 겁니다. 양주 올리베따노 아우스딩 신부님이나 아니면 굿뉴스에 김종업 형제님처럼 전문적인 성경지식이 있으면 묵상도 수준급으로 할 수 있을 텐데 그러지를 못합니다.

 

왜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면요 오늘 복음에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하는 이 말씀만 귀에 잘 남아 있지 그 밑에 있는 내용은 깊이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매일미사를 꼼꼼히 읽으면서 알았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볼 때마다 이 내용이 항상 생각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면서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하는 내용입니다. 실제 어려서부터 예수님의 모습을 본 사람들은 그냥 단순히 사람으로만 봤을 테니 나중에 공생활을 하실 때 당연히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었을 테고 예수님께서 나중에 신적인 내용을 말씀을 하셔도 그게 당연히 잘 와 닿지 않았을 거다라는 내용으로만 이해를 했기에 오늘 복음에 나오는 이 말씀을 그런 측면에서 이해를 했는데 실제 그런 의미도 물론 담고 있겠지만 더 근본적인 뜻은 오늘 묵상난에 있는 내용인 것 같습니다.

 

방금 혹시나 해서 아는 신부님께 얼마 전에 따로 네 사람만으로 조촐하게 밴드를 하나 만든 게 있습니다. 타교구 신부님이신데 신부님과 동생, , 그리고 형제님 한 분 네 사람이 어떤 한 밴드에 있었는데 따로 동생분이 새로 독립해서 그 밴드랑 별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밴드가 있습니다. 오늘 처음으로 이 내용과 관련해서 묵상글을 쓰는 데 도움이 될 거 같아 올렸는데 지금 신부님은 안 나오시고 엉뚱한 분들만 나오시네요.

 

오늘 복음은 이 정도 선에서만 하고 독서에도 나아만 이야기가 나와 나아만 이야기로 바로 넘어 가려고 했는데 독서와 복음 내용이 내용은 비슷한 대목이 나오지만 매치가 잘 되지 않아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는 이 말씀에 대해 좀 더 깊이 생각해보겠습니다.

 

언제 한번은 이 내용을 가지고 본당 형제님 한 분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우스개 소리로 굳이 저희 본당이 아니더라도 어떤 신부님이 사제가 되어 자기 본당에 무슨 일이 있어서 간다고 했을 때 사제가 되기 전에 그 신부님을 잘 봐왔던 사람들은 신부님이 되기 전에 그 모습을 알고 있기에 뭐라고 해야 되죠 전혀 어떤 신부님에 대해 모르는 상태면 모르는데 사제가 되기 전의 모습을 알면 약간은 그 신부님을 바라보는 시각이 예전의 모습이 배제되어야 되는데 그런 게 한번 생각나게 되니 우스개 소리로 그 신부님의 말빨이 잘 먹히지 않는다는 내용으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분이 하는 말이 "예언자는 자기 고향에서 환영을 받지 못한다고 하지 않느냐?" 고 말씀하신 적이 있어서 그게 생각납니다.

 

사실 이와 관련해서 재미난 일화가 하나 있습니다. 저희 본당이 몇 년 전에 본당 설립 60주년 행사를 주교님을 모시고 했습니다. 주교님께서 저희 본당 출신이시라 오셨습니다. 기념미사에서 예전에 어린 시절 에피소드를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참 우낀 내용입니다. 여기서 말씀을 공개하긴 좀 그렇습니다.

 

우리 주교님은 외모는 삼국지에 나오는 장비 같은 이미지인데 보기보다 아주 유머감각이 탁월하십니다. 어떻게 저런 외양을 지니시고 저런 감각이 있으신지 참으로 놀랍습니다. 작년에 위령성월 때도 성직자 묘역에서 미사 강론 중에 말씀을 구수하게 사투리를 사용해서 하시는지 아무튼 웃음을 많이 주십니다.

 

방금 밴드에 신부님께서 등장하셔서 제가 질문을 드린 내용에 대한 답변을 주셨습니다. 역시 확실히 신부님이시니 정확하게 답변을 주시네요. 제가 신학을 잘 모르니 궁금했는데 그럼 위에 내용을 수정해야 되겠네요.

 

제가 이런 질문을 드렸습니다. 신부님, 오늘 복음 때문에 그런데요 궁금한 게 있습니다. 예수님의 신성, 인성 이 두 측면에서 신성은 공생활 전에도 있었다고 해야 하는지입니다. 저는 이걸 확실하게 몰랐습니다. 신성이 공생활을 하시면서 신성도 그때부터 발현되는 건지 아니면 이 세상에 오실 때부터 처음부터 존재하셨는지 말입니다. 근데 답은 처음부터이네요. 제 질문이 좀 어리석은 질문일 수 있습니다. 답을 알고 나면 말입니다.

 

제가 가진 의문은 복음에서는 공생활 전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그다지 신성에 관한 면이 복음에 잘 나오지 않으니 그땐 하나의 인성적인 면만 있었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그런 의문을 가진 것입니다.

 

좀 더 상세한 추가 답변도 주시네요. 이 단어는 제가 들어서 아는데 이거랑 관련된 것인지는 오늘 알았습니다. 아리우스 이단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그럼 처음에 제가 생각한 내용이 좀 이상한 점이 있지만 그냥 수정을 하지 않겠습니다. 여기서 제가 신부님의 답변을 말씀드렸기 때문에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어려서부터 신성을 가지고 계셨는데 당연히 사람들은 사람으로서만 이해를 했으니 그런 말을 했겠죠.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하겠습니다.

 

예언자가 자기 고향에서 환영을 받지 못한다는 게 이해는 되지만 간략하게 하나만 이 점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일면 이해는 되지만 또 한편으로는 사람의 고정관념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가령 예언자이든지 예수님이든지 상관없이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위주로 해서 이 부분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설령 그렇게 이야기하는 동네 사람들이 보기엔 어려서 목수의 아들로 자라는 걸 봤다고 하더라도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예수님께서 뭔가 사람들에게 가르쳐주시는 말씀을 들어보면 확실한 것은 아니더라도 어딘가 모르게 일단 보통사람과는 뭔가 다른 게 있다는 걸 느끼면 일단 잠시 멈추고 생각을 해봐야 될 겁니다. 물론 복음에 이와 유사한 표현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뭔가 그 가르침에 권위가 있다고 하시는 표현을 보면 말입니다.

 

실제 그렇게 생각한다면 여기서 한 걸음만 좀 더 나아가 생각했더라면 예수님의 신성을 볼 수가 있었을 텐데요. 그러고 보면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더라도 여러 기적사화가 있지 않습니까? 병자를 고쳐주셔서 낫게 된다는 것 이런 것 말입니다.

 

평소 말씀하시는 거랑 또 플러스 알파로 이런 기적 같은 일을 통해서 눈으로 보면 정말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아야 되는데 그런 걸 구분을 할 수 있는 영안이 없었다니 좀 안타까운 것 같습니다.

 

그런 사실을 보면 우린 지금 그때 당시의 사람들처럼 실제 예수님을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지금 오늘을 사는 저희로서는 어쩌면 이 당시의 사람들은 지금의 사람보다도 더 잘 예수님의 신성적인 모습을 우리보다 더 잘 볼 수가 있었다는 사실과 견주어 봤을 때 그들이 그 당시 보지 못한 예수님의 신성을 오늘을 사는 사람 입장에서 우리가 예수님의 신성을 이해를 하고 믿는 게 얼마나 복된 영혼일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왜 이런 유추를 어떤 근거로 말씀을 드리느냐하면요 예수님께서 토마스 사도에게 한 말씀과 연결지어 생각하니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이 좋다는 말씀 말입니다. 저는 오늘 복음 말씀 '예언자는 자기 고향에서 환영을 받지 않는다'는 이 말씀에서 최종적으로 이런 묵상을 해봅니다.

 

오늘 현대인에게도 던지는 질문이 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갯세마니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시면서 기도하실 때 그때 제자들이 졸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너희는 한 시간도 깨어 있지 못하느냐?" 하시는 말씀처럼 오늘을 사는 우리 신앙인에게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잘 받아들이지 못하느냐? 어찌 그리 믿음이 굼뜨느냐? 오늘 저는 이 말씀으로 하루 동안 묵상해보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하신다는 것은 예수님을 하느님으로서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말이 아닐까요? 감사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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