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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생각] 모든 구속에서 자유로워질 때 - 배광하 신부님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8-12-14 조회수727 추천수3 반대(0) 신고
[복음생각] 모든 구속에서 자유로워질 때
                                 
 
대림 제3주일 요한 1, 6~8·19~28

주님의 은혜의 해


자유와 해방

김수환 추기경님은 예전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이야기 하셨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길고 어려운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까지 내려오는 여행이다.”

실로 우리는 머리로는 끝없이 옳은 일을 생각하여도 가슴에서는 그것을 따르지 못하는 안타까운 삶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때때로 자신이 미칠 듯이 싫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치 알코올 중독자들이 술을 끊기 위한 발버둥을 치면서 머리로는 반드시 끊어보겠다고 되뇌이면서도 가슴에서는 그것을 따를 결심이 무너지는 경우와도 같습니다.

우리는 세상 무엇엔가 얽매어 참 자유와 해방을 살지 못합니다. 그것이 삶의 고통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이 같은 억눌림 속에 신음하는 모든 인간들에게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며 기쁨에 찬 소식을 전합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 하느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게 하셨다.”(이사 61, 1)

예수님께서도 공생활을 시작하시며 당신께서 이 세상에 오신 까닭을 바로 이 말씀을 인용하시며 분명히 밝히셨습니다(루카 4, 18~19).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까닭은 물질적, 정신적 얽매임의 가난에 허덕이는 이들에게, 마음이 부서져 고통의 신음 속에 아파하는 이들에게, 이국땅이든 제 나라에서든 온갖 것에 잡혀간 이들에게, 감옥에 갇혀있는, 세상 것에 갇혀있는 이들에게 참다운 자유와 해방을 맛보게 하기 위함이셨다고 밝히신 것입니다.

그분께서 오심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자유와 해방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상 억눌림에서 해방될 수 있었습니다. 모든 성인과 교부들도 이 자유와 해방을 크게 강조합니다. 그리하여 영성생활의 목적은 인간 구원이며 해방이라고 가르칩니다.

때문에 ‘안셀름 그륀’ 신부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해방시키셨다. 우리가 십자가에서 일어난 예수님의 자기 헌신에 주목하면, 우리는 우리에게 있는 모든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이 기쁨을 선포하시고, 이 같은 해방의 기쁨을 우리가 살도록 구세주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오시는 분

‘이형기’ 시인은 <낙화>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가야 할 때를 안다는 것은 버릴 줄 안다는 것입니다. 나뭇잎들도 자신의 잎을 버려야 겨울 북풍의 한설을 견딜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너무도 추악해 보이는 것은 버리지 못하고 끝까지 움켜쥐려는 욕망을 보일 때입니다. 훌훌 털어 버릴 때 진정한 자유와 해방의 기쁨을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버린다는 것은 낮춤입니다. 성탄은 낮춤의 겸손을 의미합니다. 지존하신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낮추시고 가난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 그것을 우리는 성탄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분명 예수님 보다 앞서 세상에 태어났고, 그의 가난과 극기와 정의로움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며 따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교만에 찬 만족으로 자신의 자리를 끝까지 고집하며 지키려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자리를 예수님께 돌려 드리고 떠날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 같은 겸손을 보입니다.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요한 1, 26~27)

이 같은 겸손이 있었기에, 내어 드림이 있었기에 세례자 요한은 주님 오실 길을 닦을 수 있는 영광을 받게 된 것입니다. 누구나 성탄의 영광과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점점 더 작아지려는 노력과 어린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을 지닐 때, 작은 아기로 오신 예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자리는 자신 것이 아니라, 오시는 주님 것이기에 그분께 내어 드리고 자신은 물러설 줄 알아야 아기 예수님께서 내게 오실 수 있는 것입니다.

대림은 기다림입니다. 기다림은 오시는 분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맞이함은 내가 서 있는 자리를 물려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제껏 지키려고만 하였던 욕망, 자신이 빛 자체라 생각하였던 교만을 버릴 때 물러설 수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요한복음 사가는 세례자 요한을 이렇게 소개하며 우리를 일깨웁니다.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요한 1, 8)


 - 배광하 신부〈춘천교구 겟세마니 피정의 집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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