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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2월 14일 야곱의 우물- 요한 1,6-8. 19-28 묵상/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작성자권수현 쪽지 캡슐 작성일2008-12-14 조회수490 추천수4 반대(0) 신고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그는 증언하러 왔다. 빛을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요한의 증언은 이러하다.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었을 때, 요한은 서슴지 않고 고백하였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하고 고백한 것이다. 그들이 “그러면 누구란 말이오? 엘리야요?” 하고 묻자, 요한은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그 예언자요?” 하고 물어도 다시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그들이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우리가 대답을 해야 하오. 당신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오?” 요한이 말하였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그들은 바리사이들이 보낸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요한에게 물었다. “당신이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라면, 세례는 왜 주는 것이오?” 그러자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이는 요한이 세례를 주던 요르단 강 건너편 베타니아에서 일어난 일이다.
(요한 1,6-­8.19-­28)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6절)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세계를 이야기하다(1,1-­5) 갑자기 너무나 평범한 한 인간의 이야기를 꺼냅니다. 이 구절은 구약성경에서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시작할 때 쓰던 방식과 유사합니다.(1사무 1,1; 욥 1,1) 이처럼 초월적 서문과 역사 서술이 절묘하게 엉켜서, 영원한 하느님의 실재가 특정 장소와 시간에 속한 역사적 사건이 됩니다.
 
“그는 증언하러 왔다.”(7절) 요한이 주로 한 일이 세례 주는 일이라 세례자 요한이라는 이름이 붙었건만, 요한복음은 한 번도 이 칭호로 그를 부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증인의 역할에 주목합니다. 그의 소명은 증언하는 일입니다. “빛을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7절) ‘빛’이 증인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 역설적입니다. 예수님의 신원과 정체가 피상적으로 드러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첫 번째 증인입니다. 빛이신 예수님의(4.5.9) 증인일 뿐이지 자신이 빛은 아닙니다.(8절) 그가 가리키는 분은 예수님입니다. 그를 통해 청중들은 차례로 예수님의 증인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참 빛이시고 구원의 빛이십니다.

 
요한이 증언을 시작합니다. “요한의 증언은 이러하다.”(19절) 그가 보고 듣고 체험한 것을 증언할 것입니다. 전통을 고수하는 유다인들이 대표를 요한에게 파견하여 묻습니다. “당신은 누구요?”(19절) ‘유다인들’은 세상을 대표하고 체계화된 기존의 종교를 대변합니다. 또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대신합니다. 그들은 요한의 신분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가짜 예언자인지 자칭 메시아인지를 확인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입니다.
 
요한의 대답은 질문에서 좀 벗어나 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20절) 당신이 그리스도냐고 물었던 것도 아닌데 미리부터 손사래를 칩니다. 요한이 메시아라는 소문이 파다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대답이 바로 튀어나온 것입니다. 그는 약속된 메시아도 아니고, 주님의 두려운 날을 알릴 엘리야도(말라 3,5) 아니며, 하느님의 말씀을 전할 모세 같은 예언자도(신명 18,15-­18) 아닙니다.
 
재차 물어오는 유다인들에게 자신의 신원을 어떻게 밝혀야 할지 마땅치 않아 길게 늘여 설명해 봅니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23절) 여전히 그는 ‘소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증인일 뿐입니다. 외치는 이를 붙잡아 봤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는 주인공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가 외치는 소리에는 귀를 기울이는 것이 현명합니다. 그의 외침은 성경의 외침, 하느님의 약속의 외침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람들이 그토록 기다리는 메시아에 관해서 외칩니다. 그는 이사야처럼(이사 40,3) 그들 유다인들한테도 주님의 길을 곧게 내라고 외치고 싶어합니다. 임금이 자기 백성을 방문하러 올 때 아무 어려움이나 방해를 받지 않도록 길을 내듯이, 함께 주님의 길을 닦자고 외칩니다.

 
“당신이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라면, 세례는 왜 주는 것이오?”(25절) 그들은 여전히 요한에게 시선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외침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람이 무슨 자격으로 세례를 주는지가 궁금합니다. 그들은 요한이 설교를 해서가 아니라 세례를 주어서 화가 난 것입니다. 물로 씻는 행위는 영적 정결로 매우 오래되고 보편적인 상징입니다. 다른 종교에서처럼 유다교에서도 정규 예식에 속합니다. 구약성경의 에제키엘서 36장과 즈카르야서 13장은 종말론적 약속을 얘기하면서, 물로 씻는 것을 성령을 주는 것과 연결시킵니다. 그래서 더욱 요한의 세례 행위는 그들 눈에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나 봅니다.

 
그러나 요한은 극구 부인합니다. 물로 세례를 줄 뿐이라고(26절). 자기가 하는 일과 메시아가 하실 일은 큰 차이가 있다는 듯이. 요한의 세례는 하나의 표징입니다. 예수님의 성령 세례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성령 세례는 메시아의 특권입니다. 아직 감추어져 있지만 곧 계시될 것입니다.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시다.”(26­27절) 그분은 그들 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요한 뒤에서 이제 막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사실 유다인들은 그분을 알지 못했고 아직 그분께는 관심조차 없습니다. 가짜 메시아는 적발했지만 참 메시아는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요한은 끝까지 자신이 아닌 다른 분을 가리킵니다. 증인의 본분을 다합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27절) 자신을 그분과 비교할 생각도 못합니다. 갈릴래아의 그분을 위해 가장 비천한 봉사를 할 자격도 없습니다. 무릎을 꿇고 신발 끈을 풀어 신발을 벗기고 발을 닦아드리는 행위조차 높으신 분께 무례가 될까 조심합니다. 요한은 그분에 관하여 외치는 ‘소리’로서만 최선을 다합니다. 신앙의 대상은 자신이 아니라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모두가 믿도록 증언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분이 증인을 필요로 하십니다. 모든 것을 당신 권능으로 처리하셔도 될 텐데 인간의 도움을 받으십니다. 우리가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게끔 기회와 시간을 주십니다. 요한은 증인의 소명을 철저히 수행함으로써 뒤에 오실 예수님을 빛내 주었습니다. 요한 덕분에 예수님을 알아보고 믿기가 수월해졌습니다. 요한이 앞장설 때 예수님은 나서지 않으셨습니다. 요한이 자기 몫을 다할 때까지 기다리셨습니다. 요한이 요한 자신으로 빛나도록 물러나 계셨습니다. 서로를 배려하는 두 분의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강지숙(한님성서연구소 수석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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