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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엘리야의 세례자 요한 - 수요일
작성자장이수 쪽지 캡슐 작성일2008-06-25 조회수482 추천수4 반대(0) 신고
세례자 요한은 그 자체가 ''하늘의 경고''인 존재였다. 그는 근본적으로 세상과 타협하지 않은 ''경계 대상자'' 였다. 세상의 지배자(우상)가 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잠재적인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문제적 인간''이었다. 세상 우상과 타협한 이들에게서 ''깨어 있을 것'' 을 요구하는 ''광야의 소리'' 였다. 피곤한 운명이며 수축하고 덮수룩한 머리에 여윈 모습일 수 밖에 없다.
 
 

서양 그림 속의 예수님은 결코 십자가를 지팡이처럼 들고 다니지 않는다. 커다란 십자가를 등에 지고 가거나 십자가에 매달리신 모습이 예수님이시라면 세례자 요한은 나무로 만든 가느다란 십자가를 지팡이처럼 들고 다니는데 이는 그리스도께서 오신다는 메신저로서의 이미지이다. 깨어 실천하는 모든 구도자의 모습을 반영한다고 설명할 수 있다.
 
최고 권력자(우상)의 잔치상에 메뚜기나 먹고 산 가난한 예언자의 머리가 올려지는 것(발 아래의 쟁반)은 그들에게는 수치스러움을 더해 주게 된다. 성과 속이 정면 충돌하는 강렬한 인상은 살로메의 춤추는 자태에서 특히 부각되는데 살로메는 옷은 입었으나 상체를 드러냄으로써 세상의 요부성(영적인 음란, 우상숭배)과 그들의 악함이 증폭된다.
 
 

세례자 요한을 제거한다고 그의 경고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살로메가 상징하듯 인간은 그 경고 앞에서도 대부분 세속적 욕망의 포로가 되어 무기력하게 쓰러져 버린다. 세례자 요한은 긴장을 조성하는 ''예언자 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다" (마태오 11, 9) 세례자 요한은 엘리야의 정신으로 결국 새로 오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뜻은 당신(아버지)의 나라를 세우는 데 있다. 그러나 안다는 자들과 똑똑하다는 자들은 하느님 나라와 그 정의가 예수님을 통하여 현존하여 있음을 깨닫지 못한다. 그와 반대로 보잘 것 없는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펼치시는 활동의 의미를 꿰뚫고 그 활동을 이어받는다. 
 
주님을 예비하는 그의 소리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라는 말은 오늘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들려지는 광야의 소리이다. 자기 안에 자신은 작아져야 하고 그분께서는 더욱 커지셔야 한다. "이제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다" 라는 의미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살로메의 세상''에 매료된 영혼과 다를바가 없다. 
 
<참조>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양의 옷차림을 하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게걸 든 이리들이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잘려 불에 던져진다."

엘리야의 정신은 거짓 예언자와 대결하는 아버지 하느님(야훼)에 대한 변함없는 신앙이다. "나를 보았다면 아버지를 본 것이다" 그리스도 주님을 보았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자기 마음 안에 모신다는 의미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를 알려 주셨으며 앞으로도 아버지를 알리신다고 하셨다. (요한 17, 26)
 
"예언서에 그들은 모두 하느님의 가르침을 받을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누구든지 아버지의 가르침을 듣고 배우는 사람은 나에게로 온다." 다른 누구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까지 버리신 착한 목자에게로 향하는 것이다. 엘리야의 세례자 요한은 그와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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