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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순 제2주일 독서와 복음 이야기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0-03-08 조회수1,238 추천수1 반대(0) 신고

 

 

 

오늘 복음을 봉독하며 나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사순2주일 복음입니다. 지금 저희는 사순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좀 더 잘 이해를 하기 위해 루카복음9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와 같이 대조를 하면서 이해를 하게 되면 좀 더 리얼하게 복음이 와 닿을 것 같습니다. 이는 오늘 복음이 마태오복음인데 약간의 공극(사이가 떠서 비어 있는 틈)이 있어서 이 공극을 메우는 역할을 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오늘 복음의 전체 틀을 살펴보면 제가 봤을 때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어렴풋이 부활을 미리 체험하게 해 주시는 것 같습니다. 부활이라는 영광을 누리기 위해서는 그 영광만 쫒아서는 안 되고 십자가 없는 부활의 영광이 없듯이 고통의 시간도 필요하다는 의미와 이런 고통의 시간 속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게 회개라는 사실입니다.

 

회개라는 그 여정도 어떤 한 순간 되돌아보며 회개를 하는 게 아니라 항상 깨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걸 복음에서는 전해주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회개를 언급하는 부분이 없는데 왜 저는 복음이 회개를 강력히 저희를 향해 촉구하는지 복음과 복음 사이의 행간에 숨어 있는 뜻을 추적해보고자 합니다. 지금부터 시작하겠습니다. 6시간 정도 생각하고 자료를 찾고 지금 정리를 시작하는 겁니다. 나름 유익한 시간이 되시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조금이라도 유익한 시간이 되시길 기도드리겠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가십니다. 지그재그로 루카복음과 비교하면서 설명 드리겠습니다.

 

루카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러 가시기 위해 제자들을 대동하셨다고 나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산에 오르신 후에 바로 예수님의 모습이 한마디로 거룩한 모습으로 변모하셨습니다. 근데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구약의 대표인물인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계십니다. 바로 제자들이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만 언급되어 있지 내용은 없습니다. 근데 루카복음에서는 내용이 나옵니다. ,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입니다. 또 세상을 떠나실 거라는 겁니다. 아마 이런 배경을 통해서 다시 한 번 더 예수님의 마지막 모습을 좀 더 잘 깨달아 라고 하는 메시지를 전하시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지금 이 부분은 잠시 부활의 모습을 앞당겨 보여 주신 것으로 사료됩니다. 이 상황에서 재미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모세와 엘리야가 등장했다는 겁니다. 이 부분에서 하느님은 시공을 초월하시는 분이라는 걸 나타내주시는 듯합니다.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님께서 한자리 공간에 있다는 것은 우리가 사도신경 기도문의 한 부분을 연상하게 해 줍니다. 저승에 가시어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하늘에 올라 전능하신 천주 성부 오른편에 않으시며 그리로부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믿나이다입니다. 여기서는 심판이라고 나오지만 부활 때는 죽은 이도 무덤에서 나와 부활을 한다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기에 그렇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3절까지의 내용을 보면 마치 영화를 연상하면 높은 산이라는 현세에서 갑자기 부활이라는 시간으로 시간이 옮겨지는 장면 전환이 된 것 같습니다. 이때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께 말을 합니다.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이 말을 예수님께서 들어실 때 내심 시절 좋은 소리를 하고 있구나 하고 생각하셨을 거라고 봅니다.

 

루카복음을 통하여 보면 예수님께서는 수난과 죽음을 맞이하는 자신의 운명을 이야기하고 계시는 상황인데 그때 제자들은 잠에 빠져 있었으니 말입니다.

 

그러다가 잠에 깨어 일어나 보니 주님께서 영광스럽게 변모하신 보습을 보고 뜬금없이 초막을 지어드리겠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여기서 지내고 싶다고 말을 합니다. 루카복음에서는 자기가 이런 말을 하고도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있다고 전합니다.

 

잠결에 일어나 보았으니 비몽사몽이어서 그랬을 겁니다. 만약 원래 기도하러 간 목적대로 깨어 기도를 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사태 파악을 제대로 했을 건데 그러지를 못했으니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한심했을 겁니다. 베드로는 아마 지금 주님의 거룩한 모습으로 변모하신 걸 보니 자기가 있는 그 공간이 마치 천국처럼 여겨지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여기서 베드로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 느끼는 게 있습니다. 바로 철부지 신앙을 가진 사람의 모습과 같습니다. 화려한 부활의 영광만 누리고 싶다는 것입니다. 바로 베드로는 이런 영광의 이면에는 주님의 수난과 박해가 수반된다는 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기에 그렇게 말했을 겁니다.

 

5절 이하를 보면 베드로가 이런 말을 채 끝나기도 전에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었다고 나옵니다. 이 빛나는 구름이 무엇을 상징할까요? 재미있는 사실입니다. 탈출기 199절과 에제키엘서 3018절에서 19절까지(구름이 뒤덮인 가운데 내가 이집트에 벌을 내리면 그제야 그들은 내가 주인임을 알게 되리라.)보면 성경에서 구름은 하느님의 임재와 영광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빛나는 구름이 영광에 쌓인 하느님으로 이해를 했습니다. 다음 구절을 보면 확실히 이 추론이 맞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말씀을 보면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이 말씀에 제자들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 채 몹시 두려웠다고 성경은 전합니다. 지금 상황을 한번 상상하면 그럴 겁니다.

 

저는 이부분을 이렇게 묵상하려고 합니다. 구름이 자신들을 덮었다고 하니 일단 시야가 잘 눈에 들어오지 않을 겁니다. 구름이 하느님의 임재를 상징하니 눈에 부시는 하는님의 모습이 자신들을 덮은 상황에서 그의 말을 들어라고 하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어니 그도 그럴 것입니다.

 

어느 누군들 그 상황에서 요즘 현대말로 쫄지 않겠습니까? 몹시 두려웠다고 표현을 하지만 실제 이 표현의 뉘앙스는 공포 같은 것 때문에 두려워하는 그런 두려움이 아니고 경외의 의미를 뜻하는 두려움이라고 합니다.

 

이 부분이 마치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이 죄를 지은 후에 동산을 거니는 하느님의 영을 느낀 후에 아담아 너 어디 있니 하는 하느님의 음성에 두려워 숨은 모습이 상기됩니다. 이와 관련지어 묵상을 해보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아담이 숨었던 것입니다. 이와 비슷하다고는 말을 하기엔 좀 그렇지만 이 상황에서 제자들이 그런 반응을 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제가 봤을 땐 묵상이라는 건 어떤 제약이 없다고 하는 측면에서 바라본다면 그토록 예수님께서 깨어 기도를 하라고 하셨는데 잠에나 빠져 있었으니 그런 두려움이 엄습해왔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이때 땅을 죄악으로 묵상을 해봤습니다.

 

아담이 죄를 짓고 하느님께서 땅을 저주하셨잖습니까? 오늘 화답송에 그분의 자애가 온 땅에 가득하네.”라고 나옵니다. 이렇게 두려움에 떨며 있는 모습을 보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비의 손을 내미십니다. 그들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일어나라고 하시면서 손을 대셨다고 하시니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워 주셨다는 그런 의미가 되지 않겠습니까?

 

이런 모습을 보니 비록 우리가 나약해서 죄에서 넘어진다고 하시더라도 하느님께서는 저희의 이런 모습도 안쓰러워하셔서 저지른 죄는 밉지만 그래도 손을 언제라도 내밀어 주시니 그 은혜는 한량없을 따름입니다. 8절에 보시면 그들이 눈을 들어 보니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고 나옵니다. 한번 잘 보세요. 구름이 없어졌습니다.

 

구름이 걷혀졌다는 것입니다. 이 의미가 무엇을 상징하는지는 이사야 4422절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너의 악행들을 구름처럼, 너의 죄악들을 안개처럼 쓸어버렸다. 나에게 돌아오너라. 내가 너를 구원하였다고 나옵니다. 이 말씀에 비추어보면 인간의 죄인 악행을 구름처럼 쓸어버린 후에는 하느님께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바로 회개하라는 촉구이실 겁니다. 그리하면 하느님께서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구름인 하느님께서 사라지시면서 그 구름이 저희의 죄를 몰아내주셨기에 여기에서 구름의 의미는 죄의 용서를 상징한다고 보여집니다. 이 부분을 묵상을 하면서 이런 생각도 떠오릅니다. 구름은 하느님의 임재를 상징하니 그 임재 속에는 죄가 있을 수 없다는 복합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이런 예수님의 모습에 벅찬 감동을 안고 9절에서 보시다시피 예수님과 함께 같이 산에서 내려올 수가 있었을 겁니다. 제가 서두에 오늘 복음의 큰 틀을 말씀드리면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미리 깜짝 부활을 체험하게 하시려고 하는 과정에서 회개가 필요하다는 걸 말씀드리면서 실제 복음에는 회개의 내용이 나오지 않는데 왜 제가 그렇게 말씀드리는지 추적해보겠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바로 이런 내용을 근거로 해서 그렇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께 초막이나 지어드리면서 부활의 영광을 누리고 싶다고 말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럼 이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가 오늘 제1독서에 나옵니다.

 

1독서는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십니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하느님께서 보여 주실 땅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이 말씀에 순종을 합니다. 이 순종으로 인해 모든 민족이 복을 받게 되는 축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고향은 갈대아 우르입니다. 우르는 그당시 번영이 절정에 다다른 시기였고 또 상업의 중심지였습니다. 많은 교역이 이루어졌다고 하는 사실이 고고학에서도 드러난 사실입니다. 이때 교역의 물품 중에서 주를 이루는 게 우상의 재료였습니다.

 

우리도 하느님께서 부정한 곳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하느님의 약속만을 신뢰하고 친족도 떠나라는 뜻은 아마도 세속에 매이지 말라고 하는 상징적인 의미도 있을 겁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보여주신 비젼을 따라 아브라함이 믿음 하나로 떠난 것처럼 해야만이 베드로가 원하는 대로 될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냥 안주하려고 했지만 바오로 사도께서는 2독서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폐지하시고, 복음으로 생명과 불멸을 환히 보여 주셨다고 하십니다. 생명과 불멸이 바로 부활의 영광일 겁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보여주신 내용입니다. 그러기 위해 사도는 강력히 권고합니다.

 

하느님의 힘에 의지해서 복음을 위해 고난에 동참하라고 하십니다. 이게 하느님의 원대한 인류 구원 역사의 일부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이미 창조 이전에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저희를 구원하셔서 거룩하게 살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걸 말씀하십니다. 이건 2독서에서는 우리의 행실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으로 부르셨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에는 미묘한 뉘앙스가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이런 뉘앙스를 띄고 있습니다. 우리의 행실대로라면 구원과는 거리가 멀다는 말씀으로 이해됩니다. 이런 은총은 창조 이전에 주셨다고 하십니다. 저는 이 말씀을 액면 그대로라면 이해가 될 수가 없겠지만 한편 달리 생각하면 이해가 될 수 있다고 보여집니다.

 

이제 마무리하겠습니다. 이 은총은 씨앗과도 같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결국 2독서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복음인 구원의 기쁜 소식으로 환히 드러내 보여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종교를 계시종교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묵상을 마무리하겠습니다. 부활이라는 화려한 영광을 입기 위해서는 십자가라는 고통의 강을 건너면서 자신을 되돌아보며 끊임없이 회개로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길만을 추구하는 영혼이 최종 하느님과 부활의 영광을 누릴 수가 있다는 것을 묵상해봅니다.

감사합니다. 이걸 나름 자료 찾고 정리하는 데 8시간 소요되었습니다. 힘들지만 이걸 하면서 많은 걸 배우는 것 같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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