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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최후의 심판 묵상1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0-03-02 조회수1,349 추천수1 반대(0) 신고

 

제가 가진 일천한 지식으로는 우리가 죽게 되면 심판이 있게 되는데 사심판과 공심판으로 나누어진다고 알고 있습니다. 사심판은 죽게 되었을 때 개인적으로 받게 되는 심판이고, 공심판은 마지막에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실 때 천하만민을 심판하게 되는 그때의 심판인 줄로 알고 있습니다. 아무튼 저는 사심판, 공심판 이것을 일종의 천국문을 통과하는 관문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이때 세상에서와 같은 시험으로 관문을 통과 여부를 판가름할 잣대를 나름 뭐가 있을지 짐작을 한번 해보면 뭐가 있을까요? 어디까지나 상상입니다.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일단 성경상으로 보면 마태복음에 나오는 최후의 심판에 나오는 내용만 가지고 봤을 때는 결국 이 세상을 살면서 가난하고, 소외받는 사람과 불쌍한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사랑을 베풀었는지로 결정되는 걸로 성경은 말하고 있는 듯합니다.

 

저는 예전에 우리가 말하는 성경에 최후의 심판을 이렇게 서술한 것은 말 그대로 이게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이 기준을 하느님께서 심판하실 때 세상 법정에서 법관이 죄인을 심판할 때 정상참작을 하는 것처럼 참작기준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이게 절대적인 기준이 된다면 이상한 결과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가령 성경에서 말하는 이런 게 그냥 세상에서도 종교를 갖지 않고 무신론자로 살면서도 사회에 자기 재산을 기부하며 베품의 삶을 산 사람도 많이 있지 않겠습니까? 이와는 별개로 만약 그게 절대적인 기준이 된다면 사람들이 구태여 성당에 다니며 나름 신앙인에게 요구되는 구속적인 틀에 매이지 않고 그냥 자유분방하게 생활하며 세상에서 좋은 일을 하면서 살고 베푼다면 이게 천국에 가는 기준인양 생각하고 일반적인 신앙생활의 틀을 벗어나 생활해도 천국에 갈 수 있을 수 있다는 이런 결론으로도 도출될 여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어느 누가 성당에 다니며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느님을 섬기려고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마태오복음에서 말하는 최후의 심판은 하느님께서 심판하시는 기준의 가장 전형이라고 할 수 있고 세상 법으로 말하면 일종의 헌법과 같습니다. 헌법은 국가의 근간을 이루는 근본조직과 틀을 개념적으로 제시한 법입니다.

 

모든 법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가장 근간을 이루기 때문에 가장 상위법인 헌법의 근본 정신에 위배되지 않아야 되는 것처럼 우리가 나중에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 최후의 심판의 규정은 하느님 심판의 잣대가 되는 가장 중요한 근본 기준이 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세상의 법에도 헌법 밑에는 하위 법이 많이 있습니다. 이처럼 이런 하위법을 어기지 않아야 세상에서도 잘 사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하위법과 같은 게 바로 성경엔 비일비재합니다. 그 모든 개념을 하나로 통칭하고 표현할 수 있는 가장 포괄적인 개념이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사랑에는 희생이 따릅니다. 희생에는 고통이 따릅니다. 고통은 겪고 싶지 않습니다.

 

마치 수능을 치르는 학생들처럼 좋은 결과물을 얻기 위해 잠도 설쳐가며 졸음이 오는 것도 참아가며 고통을 이겨내려고 합니다. 자기 자신을 이기려는 극기의 의지가 없으면 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며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게 그냥 단순히 하느님을 사랑하는 개념처럼 단순한 게 아닙니다.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도 자기 자신을 부인해야 되는 고통이 수반됩니다. 결국 이런 고통을 하느님을 사랑해서 얼마나 그걸 잘 참아 받아냈는지 이게 어쩌면 나중에 천국으로 갈 수 있는 하나의 시험성적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여기까지만 해야겠습니다.

 

성체조배 대리를 부탁받아 다녀온 후에 다시 작성하겠습니다.

 

조배 시작 7분 전에 도착해서 정각에 조배하러 들어갔습니다. 사실 원래는 성체조배회원임과 동시에 서기를 하고 했지만 지난번에 수도원에 들어가려고 했어 그만두고 난 후에 오늘 모처럼 조배를 하게 되었습니다. 한 달 넘게 조배를 하지 않았지만 맨처음 성체를 바라보면서 드는 생각이 하나 있었습니다. 역시 죄를 지었을 때랑 죄가 없을 때 예수님을 바라보는 제 마음이 확연히 다르다는 것입니다.

 

118일 엄마 산소 가서 기도를 하려고 사전에 고해성사를 했기에 일단 지금의 상태에서는 크게 죄를 지은 게 없어서 마음 편하게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사실 제가 조배를 할 때 조배회원으로서 하는 시간은 수요일 11시부터 자정까지 하는데 사실 어떤 날은 만약 고해성사를 해야 되는데 시간적으로 할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조배를 하러 가야 되는 날에는 그야말로 그 맛은 죽을 맛입니다.

 

조배실에서 맨 먼저 예수님께 큰 절을 올린 후에는 한 시간 동안 머리를 떨구고 그냥 있다가 옵니다. 바로 예수님을 바라볼 용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무서워서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괜찮아 용서해줄게 이렇게 말씀하실 겁니다. 그럼에도 바라볼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아무리 하느님은 용서를 해 주신다고 하셔도 자기 자신이 자신을 바라봤을 때 최소한의 양심이 있기 때문에 양심상 바라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조배 전에 최후의 심판에 대한 주제로 묵상글을 쓰다가 조배를 하러 가야 하는 시간이라 중단하고 조배를 하러 갔기 때문에 사실 조배를 할 때에는 아무런 추리를 하지 말고 그냥 예수님의 현존을 느끼며 성체 앞에 머물러 있는 게 가장 일반적인 방법인데 성체를 편하게 바라볼 수 있느 마음이 생기다 보니 마침 최후의 심판에 대한 묵상이 연장선 상에 있는 것입니다. 최후의 심판 때도 마찬가지지 아닐까 생각합니다. 굳이 심판 때를 한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우리가 나중에 하느님을 바라보는 기회가 있을 모든 경우를 말해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결국 하느님은 빛이시기 때문에 자신이 어둠과 같은 존재로 세상을 살았다면 어둠이 밝은 빛을 볼 수가 없기에 빛이신 하느님을 바라볼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결국 심판은 우리가 생각하는 하느님께서 심판하시는 것 같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한편 들기도 합니다. 심판은 자기가 세상에 뿌린 삶 그 자체와 자기의 양심이 자기를 스스로 심판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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