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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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순 제1주간 화요일 (주님의 기도를 묵상하며)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0-03-03 조회수1,999 추천수1 반대(0) 신고

 

오늘 독서와 복음묵상에 대한 글은 매일미사를 놓고 보시면 좀 이해가 잘 되시리라 봅니다. 

 

오늘 복음은 제자들이 기도를 어찌 해야 하는지 예수님께 여쭤보는 내용입니다. 항상 깨어 있어 기도를 하라고만 하셨지 기도를 어떻게 하라고 일러주시지는 않았습니다. 그때 어느 제자가 질문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그 제자 덕분에 오늘날 주님의 기도가 탄생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재미난 것은 마태오 복음에 나오는 주님의 기도와 루카복음에 나오는 주님의 기도를 비교하면 모순된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 마태오복음은 먼저 기도를 할 때 빈말을 되풀이 하지 마라고 하십니다.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고 하십니다. 근데 루카복음 11장은 주님의 기도가 나오는 장입니다.

 

근데 흥미로운 점은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주시면서 5절 이하를 보면 예화가 나오는데 끊임없이 청하여라고 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 내용을 보면 귀찮아서라도 누군가가 청하면 들어준다는 그런 예시가 될 겁니다. 이 예화를 언급하시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9절 이하를 보면 청하고 두드리는 자에게 열릴 것이고 받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근데 오늘 마태오복음에서는 67절 이하를 보면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 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그러니 그들을 닮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고 하시면서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주십니다.

 

좀 약간 이상하지 않습니까? 언제는 청하라고 하시고, 언제는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아신다고 하니 얼핏 보면 모순처럼 보입니다. 저도 조금 전까지는 모순 같아보였습니다.

 

근데 자세히 보면 미묘한 차이를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고 하시잖습니까? 이 말씀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알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러신 후에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고만 말씀을 하셨지 청하지 마라고는 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 때문에 모순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시니 굳이 청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을 하셨다면 논리적인 모순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기록된 말씀의 논리를 보면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마태오복음과 루카복음에서 말씀하신 내용을 결합하면 이런 내용으로 최종 귀결시킬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기도를 하긴 하데 빈말을 되풀이 하지 말고 즉 중언부언하지 말고 그렇게 하지 않아도 나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는 알고 있으니 끊임없이 기도를 해야 내가 그 기도에 응답을 해 줄 것이다 이런 의미로 매듭을 지을 수가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 하나 행간에 숨은 의미가 하나 있을 것 같습니다. 응답을 해 주실 거면 왜 처음에는 안 해 주시고 끊임없이 하다 보면 언젠가 해 주신다는 것일까요? 바로 그건 우리가 원하는 때랑 그 기도가 응답이 되는 때는 다르다는 걸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때가 모르니까 너희는 그때가 될 때까지 해야 하는데 그때는 내가(하느님) 생각했을 때 너희에게 너희의 기도가 가장 좋은 때가 되었을 때 너희의 기도를 들어주겠다는 이런 말씀이 숨어 있을 거라고 봅니다. 마치 인디언들의 기후제와 같은 것입니다.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하는 것과 마치 아주 흡사합니다.

 

기도의 응답의 때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하느님께서 생각하시는 때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저도 오늘 어떻게 하다 보니 이런 면이 눈에 보입니다. 이게 맞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신학자도 아니고 성경학자도 아닌 돌파리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저는 텍스트상에 나타난 말씀의 논리로 본다면 이 논리가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하느님의 말씀은 인간의 논리로 해석되는 부분에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묵상에는 정답이 없다는 관점에서 보면 저는 이렇게 의미를 이해를 하는 것이 오히려 교회의 가르침과 동일 하다고 보여집니다. 이젠 그럼 본격적으로 주님의 기도 안으로 들어가서 한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주님의 기도는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아주 기본이 되는 간결한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기도 내용 중에 일용할 양식이 나옵니다. 이 양식은 우리가 먹는 양식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근데 저는 여기서는 문맥상 보면 육적인 양식이 아니라 영의 양식으로 이해를 했습니다. 의미상, 내용상 그게 더 적절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건 지극히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제가 가진 언어감으로써는 그렇습니다. 이 부분에서도 약간 흥미로운 부분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 마태오복음에서는 그냥 단순히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로만 나옵니다. 근데 루카복음에는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로 나옵니다. 저는 이 부분을 오늘 이사야 독서와 연관지어 묵상을 하면서 새로운 것을 저는 발견했습니다. 먼저 결론부터 말씀을 드리면 여기서는 제가 이해를 했을 때 이 양식은 하느님 말씀이 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오늘 이사야 독서를 한번 보시겠습니다.

 

10: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고 돌아가지 않고 ,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11: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

 

10절에 나오는 양식은 육의 양식이 분명한 것 같습니다. 11절에서는 이처럼이라는 말에서 보면 이 양식이 상징하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말씀을 상징한다는 걸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럼 독서의 내용을 쉽게 나름 새롭게 의미를 정리를 해보면 이런 의미로 이해를 해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비와 눈(하느님의 말씀)이 땅(우리의 가슴속)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메말랐던 우리의 영혼이었는데 말씀이 우리의 가슴에 떨어져 우리의 영혼을 가꾸어 풍부하게 해 주셔서 그 영혼에 한줄기 싹인 하느님의 영인 생명이 싹을 틔우게 되어) 씨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씨앗은 지금 땅에 묻히지만 그 씨앗이 싹을 틔워 다시 경작한는 사람에게 열매로 즉 다시 종자로 되어 되돌아가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이처럼 하느님 말씀인 내 말도 나의 입을 통해 나간 말은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하늘에서 내려온 내 말도 땅인 즉 우리의 마음속에 내려오시면 땅에서 열매를 맷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내가 뜻하는 바가 결실을 반드시 맺을 것이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기필코 이루고야) 만다.

 

이런 의미로 저는 묵상을 해봤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독서와 복음을 묵상을 하게 되면 오늘 하느님께서 주시는 복음 말씀에서 양식이 상징하는 게 하느님 말씀이라는 게 더 확실하게 와 닿는 듯합니다.

 

복음 11절에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다음에 이어지는 12절에 나오는 내용으로 용서가 나옵니다. 용서라는 말씀에서 확실하게 일용할 양식이 말씀이라는 걸 뒷받침해주는 근거가 된다고 봅니다. 만약 육의 양식이라면 좀 어색하지 않겠습니까? 육의 양식을 주시면서 갑자기 남을 용서하라는 건 좀 자연스럽지 않은 내용입니다.

 

즉 말씀(하느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으로 먹어야 그 말씀이 오늘 독서에 나오듯이 우리의 황폐한 마음에 떨어져 기름지게 되듯이 그때 비로써 남을 용서할 수 있다는 말씀으로 이해를 한다면 어떨까 싶습니다. 이런 논리로 묵상을 한다면 용서도 인간 스스로 할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결국 하느님 말씀이 우리의 메마른 영혼에 들어와 우리의 마음 밭이 옥토가 되었을 때 가능하다는 것으로 저는 이해를 했습니다. 바로 우리가 기도 때 청해야 할 것은 다른 게 아니고 바로 이런 걸 청하게 된다면 이런 걸 들어주시지 않을 하느님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정말 완벽한 논리이지 않겠습니까? 인간의 논리로 본다면 말입니다. 또한 기도는 나의 힘으로는 용서가 되지 않을 때 하느님의 힘을 간구해야 하는 것을 알려주시는 의미도 있다고 봅니다.

 

또한 13절의 내용을 보면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를 마지막으로 간구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달리 해석해보면 유혹에 빠지는 것은 기도를 하지 않기에 빠진다는 말씀으로 이해를 해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또한 기도를 하지 않으면 악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된다는 간접적인 표현인 것 같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를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시면서 오늘 복음 마지막에 나오는 내용으로 첨언하셔서 강조를 하나 하십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이런 동태복수법이라는 형태를 언급하시면서 용서를 강조하십니다. 이것도 사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논리와 조금 배치됩니다. 아니, 완전 배치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저희 보고는 이렇게 하지 말라고 하셨잖습니까? 그런데 모범을 보여셔야 하실 분이 오히려 여기서는 그렇게 하시겠다고 하시니 조금 이상합니다. 결국은 이 말씀은 용서를 하는 길밖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남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느님께서도 저희의 허물을 용서하신다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허물에 대해 묵상을 하는 것으로 오늘 묵상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기도하는 방법을 일러주시면서 하셨을까를 곰곰이 생각해봅니다.

 

사람은 누구나 예외 없이 다 허물이 있습니다. 완벽한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가 남을 바라볼 때 남인 그 사람 개인을 한번 놓고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징그러운 동물이지만 뱀을 한번 보겠습니다. 뱀은 뱀이 살려면 허물을 벗어야 됩니다. 뱀에게는 생존의 수단입니다. 허물을 지니고서는 살 수가 없다는 것이겠죠. 이것을 사람과 신앙에 접목을 시키면 이럴 겁니다.

 

우리가 상대방의 허물을 보게 되면 이런 시각으로 바라보게 된다면 건강한 신앙인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리는 누구나가 이 길을 걷는 게 하느님처럼 거룩하게 되려고 최선을 다해 가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신앙을 가지고 노력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누구나 자신에게 있는 그 허물에서 탈피해 나와야 합니다. 우리가 그런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상대방인 남도 자신이 거룩하게 되려고 자신도 노력을 할 겁니다. 자신도 분명 자신의 허물을 알 것입니다. 그렇게 노력하는 과정에서 허물이 떨어져나오는 것일 겁니다. 바로 이때 우리가 보통 보면 그 허물에 대해 흉을 보게 됩니다.

 

그 사람 입장에서는 자기도 자신의 허물을 벗어버리려고 노력을 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순간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 사람 입장에서는 그게 자신의 몸이 거룩한 모습으로 변모해가는 과정인 것입니다.

 

어쩌면 달리 생각해보면 역으로 나도 저 사람처럼 빨리 자신에게 있는 허물을 벗어버리려고 하는 것에 몰두를 해야 그게 현명한 생각일 겁니다. 사람은 남의 허물은 쉽게 볼 수 있지만 자신의 허물은 잘 모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결국 역으로 생각을 한다면 자신의 눈에는 자신의 허물이 보이지 않지만 남의 눈에는 자신이 남의 허물을 보는 것처럼 남도 자신의 허물을 그렇게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누구를 향해 남의 허물을 보며 흉을 봐서는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럴 시간이 있다면 기도로써 자신의 허물을 보게 해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잠언 1012절에 미움은 말썽을 일으키고 사랑은 허물을 덮어준다.”고 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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