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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상기님의 둥둥 북소리 45
작성자김명순 쪽지 캡슐 작성일2008-12-22 조회수700 추천수4 반대(0) 신고

오늘의 묵상입니다. (대림 제4주간 월요일)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6-56

 그때에 46 마리아가 말하였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47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48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49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50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51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52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53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54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55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56 마리아는 석 달가량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 복음은 '레지오 마리애 까떼나' 입니다. 루카 기자는 오늘 복음을 통하여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게 될 이유를 밝히고 있으므로 우리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해야 할 이유도 오늘 복음을 실천하기 위해서 입니다. 오늘 복음을 처음 접하였을 때에 무슨 혁명공약을 접한 듯 한 착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53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사실 이 부분은 혁명을 칭송하는 노래라 할 수 있습니다.

 혁명과 개혁은 이해관계에 따라 그 평가가 달라지겠지만 모두가 수긍할 수밖에 없는 사실중 하나는 변화입니다. 그 변화는 오늘 복음에서도 알 수 있듯이 언제나 비천하고 굶주린 이들을 위하여 변화하여야 하고 그 변화가 가진 자들을 위한 것이거나 기득권을 더 유지하는 차원이라면 이는 주님의 가르침과는 역행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세상사의 거의 모든 일은 양면성이 있으므로 귀에 걸면 귀걸이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이므로 우리 그리스도교인의 세상사 판단 기준은 얼마나 복음에 충실하는지, 그로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영세를 받고 교우가 된 것은 새롭게 변화하기 위해서 입니다. 새롭게 변화를 하지 않으려면 신앙생활을 할 이유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행한 모든 이적의 공통점 중 하나는 변화입니다.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이적도 우리의 삶을 성변화 시키라는 뜻으로 요한복음의 첫 이적에 배치시키고 있습니다. 물이 육이라면 포도주는 영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으므로 육에서 영으로 다시 태어나라는 상징적인 의미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렇듯 예수님은 우리 삶과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모든 생명체는 변화를 계속하며 그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환경에 적응하며 변화하지 못하는 생명체는 도태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유구한 역사도 변화를 계속하며 그 생명력을 이어가듯이 변화하지 않는 생명체는 도태될 수밖에 없으므로 우리 인류가 영원하기 위해서는 우리도 끊임없이 변해야하고 교회도 끊임없이 변해야 합니다. 오죽하면 삼성의 이건희 전 회장은 어느 해 신년사에서 마누라만 빼놓고 전부 다 바꿔라 하였겠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하였습니다.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자 들이 도대체 누구입니까? 물론 제 자신도 한없이 교만한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가 자기 잘난 맛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의 교만한 자들은 저희같은 소시민이 아니라 통치자들이며 부유한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쩨쩨하게 저희 같은 소시민을 상대로 회개를 요구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위선적인 사회 지도층에 대하여 당당하게 회개를 요구하였으며 저희에게는 언제나 위로해 주시고 희망을 주셨습니다. 

 제발 우리 교회도 번지수를 잘 찾아서 당당하게 회개를 요구하고 통치자들과 부유한 자들을 질타하였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사실 우리 교우들처럼 착한 사람이 어디 있고 겸손한 사람들이 또 어디 있습니까? 우리 교회가 저희들에게는 더 이상 회개를 요구하지 않아도 되고 겸손을 요구하지 않아도 됩니다. 주일에 미사에 참석하지 않으면 하느님에게 큰 죄를 짓는 것으로 알고 고해성사를 하는 그런 착한 교우들입니다. 잘못을 했다면 가족의 생계를 위해 노점상을 하느라 도로교통법 정도나 위반하는 그런 잘못들이나 범한 착한 사람들입니다.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53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하신 것처럼 예수님은 그들을 위해 이 땅에 오셨으므로 우리 교회도 그들을 위해 존재해야 하고 우리도 그들에게 한없는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차별이 있는 수직 사회에서 차별이 없는 수평 사회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평등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한없이 낮아지고 비천한 이들과 굶주린 이들은 한없이 높아져야 가능합니다.

 마태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대중을 상대로 첫 복음을 선포하신 산상설교의 첫 말씀도 오늘 이 말씀과 무관하지 않은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하시며 참 행복 여덟 가지를 알려 주셨으며,

루카 복음에서도 첫 복음 선포는 이사야 예언서를 인용하며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루카 4,18) 하시며 비천한 이들의 해방을 위한 희년을 선포하셨습니다.

억압하는 하느님에서 자비로운 하느님으로 새롭게 알려주는 오늘 '마리아의 노래'를 통하여 우리 모두는 자비로운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참된 종이 되어야 합니다. 순종의 의미를 바르게 알아서 억압하는 하느님이 아닌 자비로운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여야 우리 모두가 살고, 우리가 교회가 살고, 우리 사회가 살아날 수 있음을 묵상하였습니다.

 대자대비하신 아빠 하느님!
성자 우리 주 예수님은 비천한 이를 높이시고
굶주린 이는 배불리게 하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저희도 그 가르침에 따라 교만한 통치자들은 왕좌에서 끌어 내리고
이웃 사랑을 모르는 교만한 부유한 자들은 빈손으로 내 치실 수 있도록
언제나 성령으로 이끌어 주시옵소서!
성자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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