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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정의와 죽음,그리고 용서의 선순환!
작성자임성호 쪽지 캡슐 작성일2007-08-04 조회수482 추천수2 반대(0) 신고

 

정의와 죽음, 그리고 용서!

 

정의에는 죽음이 따른다.

올바름을 얘기하면, 그 올바름을 얘기하는 사람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진리를 싫어한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우리는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

 

그것은 순환적으로 연속해서 일어난다.

 

정의와 죽음, 그리고 용서의 과정은 예수님의 삶에서도 드러난다.

독사같은 족속이라고 바리사이파 사람들의위선을 올바르게 지적하면,

그들이 앙심을 품고, 예수님의 목숨을  노리고, 십자가의 죽음으로 복수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복수하지 않고 당신을 죽인 사람들을 용서한다.

정의, 죽음, 용서는 순환적으로 일어난다. 

마치 역사발전 과정이 정반합처럼, 정의, 죽음, 용서의 과정이

지속적으로 일어난다고 하겠다.

크리스쳔이 아니면 정의, 죽음, 복수의 과정이 되풀이 되겠지만,

크리스쳔의 삶은 정의, 죽음, 용서의 삶이 되풀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하늘나라로 가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정의, 죽음, 그리고 용서의 선순환이다. 하늘나라에 이르기까지...

 

정의로우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의롭게 살아야 하는 것은 필수다.

 

안 중근 의사나 윤 봉길 의사와 같은 분들은 그 정의로움을 위해서 당신들의

 

목숨을 초개처럼 버렸다.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신 순교자 분들의 삶도 의롭기 그지 없다.

 

보통 사람들은 자기목숨을 지키기 위해서 얼마나 끙끙 대는가?

 

목숨이 제일 중요한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의인들은 이 귀중한 목숨을 보다 더 큰 대의를 위해서 바쳤다.

 

민주인사들 중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해서

 

목숨을 바쳤는가?

 

정의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 분들은 참 존경 스럽다.

 

일신의 영달과 출세를 위해서 안간힘을 다하는 사람들에 비하면

 

보다 더 큰 가치를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바치는 사람들에 의하여

 

이 땅에 사는 많은 사람들의 인권과 삶은 더 풍요롭다.

 

 세례자 요한의 삶도마찬가지이다. 우리 신앙의선조들의삶도마찬가지이다. 

절두산에서, 새남터에서, 그리고 전국의 많은 성지에서 얼마나 많은 선조들이

목숨을 바치며 진리를 증거했던가?

이제 그 분들의 순교로 자유롭게 진리이신 예수님을 믿는

바로 그 열매를 우리 후손들이 누리는 것이다.

 

그러나, 참으로 정의롭게 산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그 길을 가는 사람도 많지가 않다.

 

험난한 길이기 때문이다.

 

일반 사회 생활에서도 그렇다.

 

올바른 목소리를 내는 사람을 존경은 하지만, 나서거나  따라서 하는  사람은 적다.

 

그 올바른 소리로 인하여 피해를 볼 수 있는 사람들의 눈 밖에 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대개 불의하나 힘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피해를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의 조직은 또 엄청나게 사람을

 

괴롭힐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인의 주변에는 사람이 가까이 가질 않는다.

 

예수님도 의인이시다.

 

이 세상의 불의와 위선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정의로우신 하느님의 이름으로 성당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의 판을 엎으셨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주변에는 끝까지 함께하는 제자들이 별로 없다.

 

로마인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예수님처럼 의인이나 순교자들은 세속적으로 보면 무척 외롭다.

 

그래도 한 두명은 끝까지 함께 한다.

 

성모님이나 사도 요한처럼 사랑과 의리를 지키는 사람들이다.

 

의인들과 의리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은 통한다.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 잘 알기 때문이다.

 

무엇이 소중한 것인지 잘 알기 때문이다.

 

하늘나라는 의인과 예수님과의 의리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간다.

 

세속에서는 피해를 입더라도, 하늘나라에는 합당한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또 하나의 노력은 이웃과의 화해이다.

 

인간은 그 본성이 동물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사회적 동물이라고 했지만 본질적으로 동물인 것이다.

 

그동안 사회적이라는 말에 촛점을 맞춘 논의를 많이해서 이성적인 측면이

 

강조된 점이 없지 않지만, 기본적으로 인간은 동물인 것이다.

 

그러니 자연의 다른 동물들처럼 생존경쟁과 양육강식의 사회 생활이

 

펼쳐지는 것이다. 정치판을 한 번 보라!

 

얼마나 서로 죽이기 위해서 몸부림치고 있는가?

 

생존경쟁하는 동물들의 몸부림과 다를바가 별로 없다는 생각이다.

 

그러니 많은 사람들이 동물적 본성에 따라서만 살다가는

 

이 사회는 늘 전쟁 상태인 것이다.

 

그래서 화해하는 사람들도 그렇게 많지않다.

 

화해의 길도 쉬운 길은 아니다.

 

일전에 동티모르 구스마오 대통령이 우리나라 DMZ 도라산역에 와서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강의를 한 적이 있다.

 

그는 독립전쟁 당시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는지,

 

또 전쟁으로 원수지간이 된 그들이 서로 용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화해 위원회에서 만든 모임에서 잘 설명해 주었다.

 

서로가 가진 한을 먼저 욕으로 풀었다고 한다.

 

서로 전쟁을 치른 그들은 한 자리에 모여 화해하기 전에 3시간이 넘도록 서로에게

 

온갖 욕을 해가면서 자신의 가족과 친척과 전우들을 죽인 상대방에게 울분을 터뜨

 

리고 죽일놈, 살림 놈 하면서 상대에게 공격을 했다고 한다.

 

그런다음 어느정도 시간이 흐른 후,

 

서로를 부등켜 안고 울면서

 

서로 서로가 같은 피를 나눈 민족이고 형제임을 확인하는 과정을 거쳤다고 한다.

 

 

그런후 전부 무기를 반납하고 서로를 용서하고 받아 들이는 시간을 가졌다고 한다.

 

 

이렇게 진정으로 화해하고 용서하는 과정은 힘이 드는 과정이다.

 

 

그러나, 이렇게 진정으로 화해하는 과정을 거쳤기에 이제는 서로를 진정으로

 

형제 자매로 받아들이고 화목하게 국가 발전을 위해서 힘을 합치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구스마오 대통령은 관용의중요성을 이야기하였다.

 

 

서로의 다른 점을 받아 들이는 관용이 오늘날 우리가 서로를 인정하고

 

화해하는데에 참으로 중요한 정신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비무장 지대인 도라산 역에서 들은 강의는 바로 지척에 북녘 형제들을 두고

 

있는 우리 입장에서는 참으로 남의 일 같지가 않은 일이었다.

 

 

이데올로기가 달라 남북으로 나뉘어져 아직도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하나 되지

 

못한 우리 민족에게 참으로 필요한 것은 진정한 화해를 이루는 관용의 정신임을

 

다시금 느낀다.

 

 

바로 나와 다른 이웃을 인정하고,

 

존중해 주는 마음이

 

화해와 일치를 이루는

 

지름길임을 마음에 새기자.

 

 

또, 정의로운 마음과 함께

이러한 관용의 마음이

 

상대방을, 이웃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마음이 바로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열쇠임을 잊지 말아야겠다. 

 

정의롭게 살면서 동시에 관용의 마음이 절실한 오늘이다.

정의는 진리이고, 관용은 용서의 일상 생활화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올바르게 진리따라 살되,

포용력있는마음으로, 자비로운 마음으로 살아가야,

하늘나라에 들어 갈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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