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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깨어있고 행동마저 옮겨야 - 윤경재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8-12-15 조회수715 추천수6 반대(0) 신고
 
 

깨어있고 행동마저 옮겨야 - 윤경재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 “‘하늘에서 왔다.’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않았느냐?’ 하고 우리에게 말할 것이오. 그렇다고 ‘사람에게서 왔다.’ 하자니 군중이 두렵소. 그들이 모두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니 말이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께 “모르겠소.” 하고 대답하였다. (마태 21,23-27)

 

 유대인들이 사회에 나가 출세하는 길에는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혈통에 따른 출세요, 또 하나는 훌륭한 학자 문하에 들어가 오랫동안 수업을 받고나서 율법학자 자격증을 받는 길입니다. 대략 15세경에 스승의 문하에 들어가 기숙하며 지냈습니다. 몇 차례의 과정을 거쳐 마지막으로 독립된 율법학자가 되려면 40세경에 스승에게서 일종의 면허증 같은 허락과정을 얻어야 했습니다. 이 두 가지 길 외엔 비합법적인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사제 가문의 혈통을 이어받았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가말리엘 문하에서 도제 수업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두 분 모두 중간에 인생길이 바뀌었고 원래 목표했던 직위를 포기했습니다. 두 분은 사제나 율법학자 같은 사람의 일을 중지하고 하느님의 부르심에 따라 새 인생을 사신 것입니다. 사람의 눈으로는 고생스럽고 힘들어 보였지만, 하느님의 부르심에 따라 일한다는 확신과 자세는 언제나 의연하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에게 존경과 경외심을 받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언제나 옳은 말과 행동으로 백성에게 존경 받았으며 더욱이 이방인 봉분왕에게 항거하다 참수당하여 더욱 경외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시대에 아류하지 않고 지조를 지킨 하느님의 참 예언자였다고 추억하고 있었습니다. 누가 보아도 이견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은 모르겠다고 얼버무리고 말았습니다.

 요즈음 정치가나 고위직에 있다가 부정부패로 지탄 받는 사람들이 초기에 오리발 내미는 수법과 똑같습니다. “모르겠다.” “잊어버렸다.”라고 곧바로 들어날 거짓말로 하늘을 가리려 합니다.

 우리는 곧잘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것으로 자신을 내세우지만, 사람들은 무엇을 했는가로 판단하는 법입니다. 무엇을 할 수 있다고 해서 믿었더니만 그 기대에 어긋난 행동을 보여주는 사례가 얼마나 많은지요. 언행일치는 어떤 권위보다 앞서는 가치판단의 기준입니다.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 일했는지 아니면 이웃을 위해서 한 일인지는 누가 보아도 금세 나타납니다. 자기의 권위를 말로써 내세워야 아무도 믿지 않을 것입니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라고 언뜻 무모하게 보이는 대답도 구구한 설명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주시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옳다 그르다 하는 감정에 휘둘리지 않으시는 초연함이 배어 나옵니다. 자신의 본래 모습을 지키고 계신 자세입니다. 

 진리는 말이 아닙니다. 실천입니다. 깨달음은 행동이어야 합니다. 모르겠다고 얼버무리는 것은 깨어있음이 아닙니다. 부처께서 군중 앞에서 꽃 한 송이를 들어 보였을 때 그에 행동한 사람은 단 한 명 마하가섭뿐이었습니다. 다들 모르겠다는 듯이 멍한 상태로 잠자고 있을 때 홀로 깨어서 행동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미소 짓는 일이 무슨 행동이냐고 반문하겠지만, 백남준 같은 분이 아무도 하지 못 했던 일을 행동으로 옮겨서 존경 받았던 것처럼 첫 행동은 언제나 깨어있는 자라야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도 첫 깨우침 덕분에 후진들이 더 발전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깨어있는데다가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느님의 뜻마저 실천한다면 이야말로 금상첨화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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