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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후(死後)에 생(生)이 있습니까?
작성자김용대 쪽지 캡슐 작성일2010-04-30 조회수482 추천수3 반대(0) 신고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그러자 토마스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요한 14:1-6)
 
영성학(靈性學)에서는 ‘길’의 비유를 많이 쓰고 있다. 너무나 많이 쓰고 있기 때문에 비유로 생각되지 않을 정도이다.
영적 여정은 야곱의 사다리로부터 시작된다.(창세기 28:10-22)
야곱은 꿈에 하늘까지 닿은 사다리를 보았는데, 하늘의 사자(使者)가 거기서 오르락 내리락 하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를 두고 많은 신비주의자들은 영성 생활은 정화(淨化), 조명(照明), 합일(合一)의 단계를 ‘올라가는 것’으로 설명하였으며 많은 고전들의 제목도 이를 뜻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십자가의 성 요한(St. John of the Cross)은 『가르멜의 산길(The Ascent of Mount Carmel)』에서 여러분이 지금 향유하고 있지 않은 곳에 이르려면, 여러분은 여러분이 향유하고 있지 않은 곳에 가야 합니다. 여러분이 알지 못하는 곳에 이르려면, 여러분은 여러분이 알지 못하는 곳으로 가야 합니다. 여러분이 갖고 있지 않은 것을 갖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지금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은 곳으로 가야 합니다.”하고 말했으며, 월터 힐튼(Walter Hilton)의 『완덕에 이르는 사다리(Ladder of Perfection)』, 중세 귀고(Guigo Ⅱ)의 『네 계단의 사다리(A Ladder of Four Rungs 』등도 모두 올라가는 의미를 갖고 있다. 모두 어둠 속에서 영성의 사다리를 올라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오늘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곳’을 말씀하셨는데 이 또한 비유이다.
영원한 생명은 지리적인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을 언급하셨다. 이러한 비유들은 문학 서적에서와 같이 진실이나 거짓을 부러지게 말하는 것이 아니다.
비유를 말하고 있지만 이분법적(二分法的)으로는 사용하지 않고 있다.
의 의미를 생각해보자.
영성에서 말하는 ‘곳’은 항상 ‘여기, 이곳’을 의미하며 시간도 ‘바로 지금’을 뜻한다.
나는 과거에도 지금 이 장소에 있었는가?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나는 항상 ‘지금 여기’에 있다. 그 외의 시공(時空)에는 나는 없다.
이런 면에서 영성 계발은 꿈에서 깨는 것이 아니라 인생 나그네 길을 터벅터벅 걸어가는 것이다. 꿈에서는 남극에 있을 수도 북극에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실로 돌아오면 잠자리에서 자고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언제나 깨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빛보다는 어둠 속에 있을 때가 많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옛날의 성경은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방(mansions)이 많다.”고 번역하였다.
‘mansion’은 라틴어 ‘manere’에서 나왔으며 ‘움직이지 않고 머무르는 곳’을 의미한다. 활동할 수 있는 나이에는 한군데 조용히 머물러 있을 줄도 알아야 한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가 말했다.
“많은 사람들은 ‘주님, 저는 주님과 함께 머무르고 싶습니다.’ 또는 ‘다른 사람들처럼 주님 안에 머물러 주님과 함께 평화를 누리고 싶습니다. 주님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평화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모든 것을 버리고 수도원의 독방으로 가서 살고 싶습니다.’하고 말합니다. 이유는 순전히 자기 자신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집(我執)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도 있고 모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것을 버리고 다른 장소나 다른 사람이나 다른 방법 또는 다른 회사나 다른 행동을 택합니다. 그렇게 다른 것을 찾는 이유는 다름 아닌 자신의 편견이나 악습이나 무지(無知) 때문일 때가 많습니다. 따라서 어떤 일을 하더라도 확신을 갖고 일하되 거짓 자아를 버리십시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하나밖에 없으며 우리가 머물러야 할 곳도 하나밖에 없다.
그래서 영국의 신비주의자 월터 힐튼은 그의 책완덕의 척도(Scale of Perfection)에서 말했다.
“이 어두운 밤에 보지 못하는 것이 아무리 괴롭다 할지라도, 온갖 쾌락이 난무하는 바깥 세상의 삶보다 낫습니다. 당신이 어둠에 있을 때는 거짓 빛 안에 있을 때보다 더 예루살렘에 가까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은총에 마음을 열고 이 어둠 속에 머무는데 익숙하도록 하십시오. 그리하면 당신은 곧 평화를 찾을 것이고 성령의 참된 빛이 당신의 영혼에 넘쳐 흐를 것입니다.”
 
한 제자가 스승에게 물었다.사후(死後)에 생(生)이 있습니까?”
스승이 대답하였다.
“인생에 있어 중요한 질문은
‘사후(死後)에 생(生)이 있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사전(死前)에 생(生)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스승이 이어서 말했다.
하느님께서는 성인들보다 죄인들에게 오히려 더 가까이 계신다.”
어찌하여 그렇습니까?하고 제자가 물었다.
그러자 스승이 대답했다.
하늘에 계신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마다 끈을 하나씩 쥐고 계신다.
그런데 사람들이 죄를 지을 때마다 그 끈이 끊어진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그 끈을 다시 매어 이으신다.
이렇게 하여 그 죄인은 하느님께 처음보다 조금 더 가까이 가게 된다.
죄를 지을 때마다 줄을 끊어지겠지만 하느님께서는 매번 그 끈을 다시 이으시어
그 죄인을 점점 더 가까이 끌어 당기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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