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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최후의 심판 - 죄의식과 감정이입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7-02-26 조회수481 추천수4 반대(0) 신고

 

 

<최후의 심판>  - 죄의식과 감정이입


“사람의 아들이 영광에 싸여 모든 천사와 함께 오면, 자기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민족들이 사람의 아들 앞으로 모일 터인데, 그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가를 것이다. 그렇게 하여 양들은 자기 오른쪽에, 염소들은 왼쪽에 세울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 (마태 25,31-46)



  무신론을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는 그리스도교가 인간에게 죄의식을 심어주어 심판당하지 않으려는 두려운 마음에 신을 믿게 만들었다고 비판합니다. 특히 19세기 정신 심리학자 프로이드는 종교를 인류가 가지고 있는 ‘아버지 살해 콤플렉스’를 신에게 투사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또 그는 성적 본능인 리비도를 억압하기위해 종교가 필요하였다고 말합니다. 종교는 단지 환상일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를 위시한 무신론자들은 당시까지의 부족한 자연과학 지식을 신봉하여 합리주의라는 이름하에 종교를 폄훼하였습니다.


  실제로 지나친 죄의식을 심어 주어 사람들을 자기네 종교집단으로 이끌려는 의도를 보이는 종교단체도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융을 비롯한 심리학자와 영성가들의 연구에 의하면 죄의식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집단 무의식에 뿌리를 내리고 있답니다. ‘현실의 모습’과 ‘마땅히 되어야할 이상’과의 차이에서 느끼는 모순이 죄의식으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하루에도 수없이 죄의식을 느낀답니다. 거리에서 구걸하는 사람들이나 위험에 빠진 사람들을 보고 지나칠 때, 부주의 했거나 의식적으로 남에게 해를 입혔을 때, 외국에서 전쟁이나 재해가 났을 때 등등 비록 외면하고 지나칠 수도 있지만 인간인 한에는 공통적으로 껄끄러운 감정이 생깁니다.  어쩌면 동냥을 주지 않는 것이 사회학적으로 더 옳은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죄의식은 왜 저런 일이 실제로 생겨나는지에 대한 모순을 느끼게 만드는 것입니다. 개선될 여지는 없는가 하고 숙고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양심과는 다릅니다. 양심은 죄의식의 한 단면이라고 정의합니다.


  죄의식은 문제를 제기하게 만들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가능성과 실천하지 않는 것에 대한 간격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옳고 그름의 차이를 인식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지상의 존재이면서 동시에 영적인 초월을 꿈꾸는 존재입니다. 한마디로 “두 개의 세계 사이에 끼어 있다.”고 표현 할 수 있으며, 동전의 양면과 같은 “두 개의 측면”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술가의 예를 들면 미술, 음악, 시, 소설, 연극 등등 창작활동 중에 그는 자신을 잊고(沒我) 완전히 몰입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작품이 완성되었을 때 그는 잠재의식에서 두 가지 상반된 감정을 느낀다고 합니다. 하나는 만족감과 창조적 노력에서 오는 심리적 정화이며 또 하나는 그 정화에 의해서 더욱 뚜렷해진 죄의식이라고 합니다.

  이때 나타나는 죄의식은 그 작품이 완벽한 이상에 미치지 못했다는 상실감이며, 또 한 순간이나마 美의 문턱에 이르러 거룩함을 맛보았다는 것입니다. 마치 구약에서 하느님의 거룩한 현존을 보면 죽는다는 의식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의식은 병적이고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지니고 있는 어떤 가능성을 말해주는 것이며 인간의 겸손한 자기이해입니다. 우리는 병적인 죄의식에서는 벗어나야 하겠지만, 그것이 종교적인 지향을 가져다준다는 점은 받아들여야합니다. 인간 안에 존재하는 이러한 긴장은 인간성 안에 신적 요소가 담겨 있다는 증거입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신과 결합되어 있으며 종교적이라는 사실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지닌 양면성에서 느끼는 괴리를 해소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나와 타자가 느끼는 분리를 넘어 동질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을 공감(empathy), 동정(sympathy), 감정이입(einfuhlung)이라고 부릅니다. 특히 감정이입은 상대방의 처지를 보고 ‘나 같으면 ~ 했을 것’이라는 생각마저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저 상대방이 어려우면 어려운대로, 잘났으면 잘난대로 받아들이며 고통과 기쁨을 공유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곤란에 처했을 때 마더 테레사 성녀 같은 분을 만났다고 합시다. 성녀는 우리를 어떤 조건도 걸지 않고 받아드릴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성녀에게서 몸과 영혼, 전인적으로 무한한 사랑과 위로를 느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녀를 닮고 싶다는 생각을 할 것입니다.

  또 성녀는 우리 안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두 사람은 서로를 자연스럽게 보고 배우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서 제 3의 인격이 창조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과 같은 온전한 모습이 잠시나마 두 사람 사이에서 교류가 되는 것입니다. 이때 둘 사이에는 지극한 정화가 일어납니다. 거룩함이 현존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라는 말씀이 이 세상 현실에서 실현되는 순간입니다. 현세에서 천국을 맛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랑의 교류를 의도적으로 회피하여 서로에게 원수처럼 굴 때 우리는 아마 지극한 상실감을 체험할 것입니다. 이때 마다 우리는 왼쪽에 빠져드는 죄의식에 감싸일 것입니다. 현세에서 지옥을 맛보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인간은 스스로 오른쪽과 왼쪽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 기준은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타인과 “몰아적 감정이입 상태”에까지 이르도록 사랑을 나누는 것이며,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두 사람 모두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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