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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원본이 따로 있는 편지
작성자강헌모 쪽지 캡슐 작성일2012-08-16 조회수480 추천수4 반대(0) 신고
찬미예수님!

 

가톨릭 사제가 쓴 눈물의 사모곡

나물할머니의 외눈박이 사랑
이찬우 신부

낯선 땅, 그리운 얼굴 나와 하느님의 소통이 나와 어머니와 같다면, 나는 어머니를 통해 하느님의 영성을 볼 수 있고, 어머니 역시 하느님을 통해서 나의 영성을 보고 계실 것이다. 원본이 따로 있는 편지

주안3동 성당 홈페이지가 두 달에 걸쳐 개편작업을 마치고 새로 개설되었다. 기도문과 미사시간, 찾아오는 길 등 다양 한 정보와 본당에 속한 여러 단체들이 오프라인에서 뿐만 아니라 온 라인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도록 꾸며 놓았다. 이렇듯 IT강국인 우리나라는 성당마다 홈페이지를 갖추고 있고, 누구나 전화로 이메일로 쉽게 다른 사람과 연락을 취할 수 있다. 하 지만 과거에는 소식 한 번 전하는 일이 여간 힘들지 않았다. 전화는 비싼 통화료 때문에 엄두도 못 냈고, 그나마 편지가 가장 부담 없고 널리 쓰이는 연락 방법이었다. 전화 통화가 잠시라도 안 되면 안달 하는 요즘 사람들로서는 답답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지금 돌이켜보면 그런 상황이었기에 어머니가 내게 보낸 편지들을 소중히 간직할 수 있게 되지 않았나 싶다. 서울에서 신학 교에 다닐 때에도 부모님에게 편지로 연락을 드렸지만, 형님 댁을 통해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었던 터라 굳이 부모님이 글을 쓰실 필 요는 없었다. 하지만 내가 갑자기 로마로 유학을 떠나게 되면서 상황이 바뀌었 다. 경황없이 오른 유학길이라 준비도 부족했고 새로운 환경이 낯설 었지만 적응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어머니는 음식 때문 에 고생하지 않을까 염려하셨지만, 그런 것은 아무 문제가 아니었 다. 다만 나를 힘들게 한 것은 어머니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이는 어머니도 마찬가지셨다. 이국 멀리 떨어져 있는 막내아들에 대 한 그리움이 너무 깊어서 잠도 못 이루고 식사도 제대로 못 하시게 되었다. 전화로 소식을 전하기에는 시차 문제도 그렇거니와 비용도 무시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유학 초기에는 시골집에 전화도 없었다. 멀리 있는 아들이 어머니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자주 안부편지를 드리는 일이었다. 종이에 적어내린 나의 편지가 어머니에게 다소간 마음에 평안을 드릴 수 있었다는 사실에 다시금 감사하는 마음이 든 다. 아들의 편지를 받은 어머니가 답장을 통해 당신의 마음을 전하고 싶은 것은 당연한 일이리라. 아니 수없이 많은 편지를 쓰셨더라도 양이 차지 않으셨으리라. 그런데 어머니는 당시 대부분의 여인네들 이 그랬던 것처럼 정규교육을 제대로 받을 기회가 없었던 터라 읽고 쓰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아들의 편지에 답장을 하기 위해 조카나 이웃집 학생들에게 대필을 부탁하셨지만 계속해서 남의 손을 빌리기가 여 의치 않았을 것이다. 사정이 그렇다고 아들에게 무작정 답을 기다리 게 할 수는 없으셨기에 결국 어머니는 손수 편지를 써서 로마로 보 내기 시작했다. 비록 어머니의 편지는 맞춤법이 제대로 맞지 않고 그저 소리 나는 대로 띄어쓰기도 없이 적은 것이지만, 그 안에는 아 들에 대한 절절한 사랑과 그리움이 담겨 있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초등학생이 쓴 편지인가 싶겠지만, 나는 어머니 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어머니의 편지를 읽어 내려가다 보면 마치 어머니가 옆에서 차근차근 이야기를 해 주시는 목소리가 들리 는 듯했다. 이렇게 유학기간 동안 받은 어머니의 편지는 대필해서 쓴 편지가 5통, 직접 쓰신 편지가 12통, 모두 17통이다. 그 편지들은 이역만리 에서 고달픈 유학생활을 하고 있던 나에게는 물론, 함께 공부하던 신부님들에게도 커다란 청량제 역할을 했다. 귀국하고 나서야 알게 된 일이지만 어머니의 편지에는 원본 노트 가 따로 있었다. 대필 편지는 처음에 손자들이나 동네 학생들을 시 켜 썼지만 글자가 틀리면 지우고 다시 쓰게 할 수도 없었다. 더구나 아이들이 어머니 말씀을 받아쓰는 것을 답답하게 여기고 짜증을 내 는 바람에 나중에는 어머니가 직접 쓰시게 되었다. 처음에는 항공 우편엽서를 이용하셨다. 그것은 봉투를 겸하는 봉 함엽서 형태로 되어 있어 일반 국제우편에 비해 요금이 저렴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한 지면에 하고 싶은 말을 다 써야 했기 때문에 글 씨 크기 조절이 여의치 않으셨던 어머니는 몇 자 적기만 해도 편지 지가 가득 차기 일쑤였고, 가뜩이나 잘못 쓰면 다시 지울 수도 없어 서 힘드셨던 것 같다. 그래서 어머니는 초반에 학생들에게 대필을 부탁하실 때처럼 노 트에다 쓰고 싶은 말을 먼저 적어놓고 뺄 것은 빼고 더 넣을 것은 넣 어서 항공 우편엽서에 베껴 쓰는 필사 형식을 취하게 된 것이다. 편 지지가 귀하고 우표가 비싸던 시절에 어머니 나름대로 재치를 발휘 하신 셈이다. 어머니는 편지는 그야말로 불가능을 가능케 한 자식 사랑의 결실이었다. 훗날 공부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에는 직접 찾아뵙거나 전화를 드리게 되었으니, 그 이후로는 어머니의 편지를 따로 받아볼 기회가 없는 것이 아쉬웠다. 그래서 어머니가 생전에 남기신 글은 나에게 보낸 12통의 편지가 전부다. 어머니에게는 편지 쓰는 수고를 덜게 해 드려 다행이긴 했지만, 아들의 입장에서는 어느 문학작품보다 더 진솔한 어머니의 편지를 더 많이 받았더라면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어머니의 깊은 사랑 과 향기를 느낄 수 있는 어머니의 노트가 지금도 남아 있다는 것만 으로도 감사하고 또 감사할 일이다.

주님의 평화가 항시 함께 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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