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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 천명도 인간을 도구 삼아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신부님
작성자김세영 쪽지 캡슐 작성일2013-12-22 조회수480 추천수10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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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 제4주일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자손 요셉과 약혼한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시리라.>
+ 마태오 1,18-24



우리를 도구삼아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함께하신 다는 것을 좀 더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도록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눈높이를 맞춰주시기 위해서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신 하느님이십니다. 준비된 마음 안에 하느님을 잘 모셔드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대림초 4개가 환히 빛을 밝히는 그만큼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음을 느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시간 순명하는 삶에 관해 묵상하는 가운데 은총을 얻기를 바랍니다.

 

아빌라의 성녀 대데레사는 우리에게 간절히 호소했습니다.

그대의 몸을 지니고 있을 뿐 지상에서 그리스도는 더 이상 몸이 없습니다. 그대의 손과 발을 지니고 있을 뿐 그리스도는 손도 발도 없습니다. 그대의 눈은 이 세상을 자비로 바라보시는 바로 그분의 눈이요, 그대의 두 발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시려 걸음을 내딛는 바로 그분의 발이며 그대의 두 손은 세상을 강복하시려 펼쳐 드신 바로 그분의 손입니다. 그리스도는 더 이상 몸이 없습니다. 그대의 몸이 바로 그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이 마음을 잘 표현해 놓은 곳이 있습니다. 미국 샌디에고 한인성당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1729년에 지어진 미션성당에는 양 팔이 없는 십자고상을 볼 수 있습니다. 그분의 손이 되어드려야 한다는 간절한 호소를 듣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도구삼아 당신의 뜻을 펼치십니다. 주님의 뜻은 인간의 선한 응답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느님의 사랑은 언제나 변함이 없습니다. 어렵고 힘든 가운데에도 하느님의 사랑은 여전합니다. 다만 내가 힘들 때는 그 고통에 가려서 느끼지 못할 뿐입니다. 시련과 역경 안에서 하느님을 결정적으로 만나게 됩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기적은 문제가 있는 곳에서 믿음을 바탕으로 드러났습니다. 우리는 예기치 못한 어려움에 직면할 때 양다리 걸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주님의 능력은 만날 수 없게 됩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언제나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임마누엘”(??????) 이라는 이름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임마누엘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임마누(????)라는 말과 엘(??)이라는 말이 합쳐진 단어로 ‘임마누’는 ‘우리와 함께 있다’라는 뜻이고 ‘엘’은 ‘하느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 두 말을 합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이 됩니다.


오늘 복음은 신비로운 예수님의 탄생을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그 한복판에 서있던 요셉의 처신을 통해 순명의 역사를, 믿음의 응답의 결과를 보게 됩니다. 요셉을 바라보면 정말 너무도 기가 막힌 일을 당했습니다. 마리아와 약혼을 하고 잠자리를 한 적이 없는데 마리아가 아기를 가졌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요셉으로서는 황당한 일입니다.

 

결혼을 앞두고 얼마나 마음이 설레였겠습니까? 그런데 약혼한 처녀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임신을 했다는 사실에 접하게 됩니다. 실망, 또 실망, 배신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놀랍고 분하고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하는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입니다. 그냥 결혼을 하자니 남의 여자를 데리고 사는 것이 되고, 파혼을 하자니 한 사람을 돌팔매질을 당해 죽게 만드는 것이고……


따지고 소문내고, 소란을 피울 수도 있었으나 요셉은 고민하였습니다. 법을 어기지도 않고 마리아를 죽음에로 몰아넣지 않으면서 해결할 방법은 없을까? 그래서 결국은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마음을 먹게 되었습니다. 이는 당시 시대 상황으로 봐서 의로운 사람이기 때문에 가능한 생각입니다.

 

그런데 그날 밤 꿈에 천사가 나타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하셨습니다. “예수”라는 뜻은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예수(ihsouς)는 ‘예슈아’(????)를 그리스어로 음역한 신약성경에 나오는 발음입니다.‘예수’라는 이름은 ‘하느님은 구원이시다’, ‘하느님은 구세주시다’ 라는 뜻을 갖습니다.  이 말씀은 이미 예언된 말씀이었습니다. 1독서 이사야 7장 14절을 보면,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말씀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요셉은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요셉은 자기 삶의 상식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요셉에게 닥친 일은 믿음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고, 믿음이 없이는 받아들일 수 없는 불가사의 한 일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에 대한 해명도 설명도 없습니다. ‘믿겠으면 믿고, 말겠으면 말라.’는 식입니다. 사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이렇게 보통사람과는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로 이 땅에 태어나셨습니다. 물론 마리아의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 한 순명도 기억해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모든 것 다 설명해 주고 다 보여준 다음에 믿으라고 하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사실 확인에 불과한 것입니다. 믿음은 바로 어려운 일에 처했을 때 그 빛을 발하게 됩니다. 내 뜻을 내려놓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이 신앙입니다.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인간의 구원은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구원의 완성을 위하여 인간의 협력을 원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인간과 더불어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십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해 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 편에서의 응답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 응답을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구원은 하느님의 부르심과, 믿음으로 표현되는 인간의 응답으로 이루어집니다.

 


이 응답의 역사를 보면 아브람은 일가친척을 떠나 하느님께서 보여줄 낯선 땅으로 떠날 것을 요청 받았고 또 떠났습니다. 그리고 늘그막에 얻은 아들을 기꺼이 하느님께 제물로 바쳤습니다.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창세15,6).

 


탈출기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이끌어내었던 모세의 삶의 여정을 보면 인간적인 정의감에 불탔던 그가 온전히 하느님의 사람으로 변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당신 종 모세에게 명령하신대로 명령하였고 여호수아는 주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 가운데서 하나도 빠뜨리지 않았다”(여호11,15).

 

불과 삼백 명으로 십오만 병사에 대항해 싸우는 기드온, 천사를 통해 전해진 하느님의 메시지를 순명으로 받아들인 마리아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믿음에 따르는 순명이란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마땅하고 옳은 일에 응답하는 것이 아니라 비상식적이고 비논리적이며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주님의 뜻이기에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물론 거기에는 고통과 시련이 동반할 수도 있습니다. 큰 사람이 되려면 이러한 단련이 필요한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든 갈등과 상처를 가슴에 담고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작정한 요셉의 태도를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사방에 소문을 내고, 따지고 망신을 주며 보복하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세상에 드러내지 않고 상대를 철저하게 배려하는 큰 사람입니다.

 

우리의 삶은 어떠합니까? 남의 허물을 일삼아 찾아다니고 들추어내고 싶어 하는 마음은 없는지요. 이웃의 잘못만이 눈에 띄는 사람이라면 남의 불행이 곧 나의 행복으로 삼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의 주변에는 진실한 사람이 없고 하느님께서도 함께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삶이라면 남의 허물을 덮어주고 격려해 주는 사람입니다. 힘겹고 어려워하는 이들과 마음을 나누는 사람, 만나면 위로와 기쁨이 되고 하느님의 축복이 되어주는 사람입니다. 궁지에 몰린 마리아를 감싸주고 품어주려 했던 요셉의 모습을 닮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뜻 앞에 요셉이 이성적으로 생각하여 최선책으로 결정한 것은 다 소용이 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혼자 고민하기 전에 하느님의 뜻을 먼저 구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인간적인 계산을 하고 이해득실을 따지지만 하느님께서는 그 한가운데서 나의 응답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응답을 통해서 구원을 이루십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고는 하지만 현실적인 이익 앞에서는 나도 모르게 세상 것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서 바르고 정직한 마음을 지녀야 하고 아주 사소한 것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사실 우리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관계 안에서,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 안에서 응답을 요구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매순간 신앙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무엇을 하든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주님께서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을 그분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해야 합니다. 더더욱 상식에 어긋나고 비합리적일 뿐 아니라 이해하기 어려울 때 그때야말로 그 안에서 주님의 뜻에 맞는 응답의 소명을 받고 있는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관심은 편안하고 안락한 길에 있지만, 우리의 관심은 그 길이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인가에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아름답고 멋있게 보이는 길이라 해도 그 길이 우리의 목적지인 하늘나라와 연결되지 않은 길이라면 가지 말아야 합니다. 반면에 아무리 험한 길이라도 목적지를 향한 길이라면 그 길을 가야합니다.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어려운 일이 일어나야만 하는가? 내가 이것을 감당해야 하나? 하는 마음이 들 때 응답의 소명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어렵고 힘들게 여겨지는 일, 궂은 일, 곤란한 일에 직면해서 피하려 하지 말고 주님의 부르심을 생각하십시오. 길의 상태가 아니라, 그 길의 끝이 어딘가를 생각하십시오. 바로 그 마음 안에 아기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그 응답 안에 완성될 것입니다.

 

주님의 뜻에 맞는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주시고 그 일을 할 힘을 주시길 청하며 매일 매 순간 우리 마음속에 아기 예수님을 탄생 시켜 드려야 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글을 옮기는 과정에 히브리어 표기가  되지 않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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