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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부활
작성자김용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8-11-22 조회수669 추천수2 반대(0) 신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은, 모세도 떨기나무 대목에서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 주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루카 20:37-38)
 
바리사이들은 부활을 인정했지만 그들이 믿었던 부활은
현실이 그대로 지속되는 부활이었다.
부자인 사람은 그대로 부자가 되고,
자식 많은 사람은 저 세상에서도 수많은 자녀들을 거느리는 부활이었다.
당연히 가난한 사람들은 기가 꺾일 수밖에 없었다.
반면에 사두가이들은 부활을 인정하지 않았다. 현실만이 있을 뿐이라고 믿었다.
그러기에 현실의 최강자인 로마에 복종했고 그 그늘에서 살려고 했다.
그들은 부활 사상을 웃음거리로 만들고자 억지 주장을 펴고 있다.
일곱 형제가 한 여인과 혼인했다면 저 세상에서 누구의 아내가 되겠는지 질문한 것이다.
신명기 25장에 나오는 내용을 빗대어 말한 것이다.
레비라트(Levirat) 법〔嫂姻法〕으로 알려진 유목 사회의 독특한 법이다.
형제가 혼인하여 아들을 두지 못하고 죽으면
형제 중 한 사람이 형수나 또는 제수를 아내로 맞아들여야 했다.
그리하여 아들을 낳을 경우 첫아들은 죽은 형제의 후손으로 삼아 혈통을 잇게 해 주었다.
예수님께서는 혼인 생활은 이 세상에 속할 뿐이라고 말씀하신다.
저 세상의 일은 오직 하느님께만 유보되어 있다는 가르침이다.
그러니 분명한 것은 이 세상의 삶이다.
현실에서 평화와 기쁨으로 살지 못한다면 저 세상에서도 평화와 기쁨은 요원한 것이 된다.
 
태양의 사랑으로 봄에 장미로 피어날
씨앗으로 누워있는
눈 속 깊이 파묻혀 있는 겨울을 기억하라.
         -팝송 <The Rose> 중에서
 
그리스도교에 대한 강한 비판은
교회가 행복한 사람들에게 불행하도록 가르쳐 놓고서 그들의 불행에 대처하겠다고 나서는
어처구니 없는 모순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 비판가들은 그리스도교가 고통, 죽음, 내세에 대한 삶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이 세상에서 우리가 누려야 할 삶의 기쁨을 깡그리 앗아가고 있다고 말한다.
프로이트에게도 그렇게 보였다.
프로이트는 그리스도인들이 진정한 행복을 찾아가지 못하고
신경과민적인 불안에 빠져 있는 것을 비난하였다. 이러한 비판들이 모두 틀린 것은 아니다.
실제로 그리스도교 영성(靈性)의 이름으로 상당히 많은 불안들을 가르쳐왔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에 대한 이러한 비판들이,
만일 인간은 본성적으로 만족하는 존재이고 그래서 고통, 죽음,
그리고 내세의 삶과 같은 문제들에 대해 그리스도교의 지난친 간섭만 없었다면
우리가 병적으로 불안해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단정한다면 그것은 매우 유약한 발상이다.
어떤 인생 철학이나 인류학이나, 심리학이나, 어떤 영성도 시대를 초월하여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혀 온 문제들
즉 고통과 죽음이라는 문제들을 고민하지 않고는 성숙해 질 수 없었다.
고통과 죽음의 문제는 그리스도교가 만들어내는 신경증적인 유령이 아니다.
이 문제들은 우리에게 다가오는 엄연한 현실이며 변화를 불가피하게 요구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영성은 모든 신비들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신비가
고통과 죽음 그리고 변화의 신비 즉 파스카의 신비라는 사실에 대해 변명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교 영성에서는 그리스도가 핵심이고,
그리스도의 핵심은 그분의 죽음과 새로운 생명으로의 부활이었으며,
그렇게 하여 우리에게 새로운 성령을 보내어 주시고 계시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교 안의 핵심적인 신비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파스카의 신비는
그리스도교 신학과 영성에 있어 가장 많이 오해되고 있고 무시되고 있다.
우리는 입으로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 중 핵심이 수난과 죽음이라고 말하지만,
진정으로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가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으며
우리 생활에 이 사실을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 가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떻게 그 신비 속으로 들어가서 그렇게 살 수 있을까?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예수님의 이 말씀은 파스카 신비를 정의하고 있다.
다시 말해 파스카 신비는 우리가 더 충만한 삶과 영(靈)에 이르기 위하여
끊임없이 현재의 삶과 영을 놓아버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런 의미를 이해하기 위하여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분별해야 한다.
우리는 두 종류의 죽음, 두 종류의 생명 그리고 생명과 영 사이의 차이점을 알아야 한다.
 
 죽음에는 두 종류의 죽음이 있다.
죽음에는 죽음으로 모든 것이 종결되는 죽음 과월적인(파스카적인) 죽음이 있다.
종결되는 죽음은 삶을 끝내고 가능성을 끝내는 죽음이다.
파스카적 죽음은 종결되는 죽음처럼 실제로 일어나는 죽음이지만,
한편으로 한 가지 종류의 삶을 끝내면서도 그것을 겪는 사람에게
더 깊이 있고 더 풍요로운 또 다른 삶을 받아들이도록 열어주는 죽음이다.
땅에 떨어져서 죽는 그래서 새로운 생명을 틔우는 밀알의 모습은
이러한 파스카적인 죽음의 모습이다.
 
 생명에도 두 종류가 있다.
소생된(resuscitated) 생명부활한(resurrected) 생명이 있다.
소생된 생명이란 이전의 생명과 건강이 회복된 것을 의미하며
임상학적으로 사망했다는 진단이 내려졌지만 다시 살아난 경우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부활한 생명은 이것과 다르다. 과거의 생명이 복구되는 것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생명을 받는 것이다.
성서에서 그 차이를 발견하자면,
예수님의 부활과 라자로의 부활(사실은 소생이다) 이야기를 보면 확연하다.
라자로는 과거의 생명을 되찾은 경우이지만, 다시 죽어야 하는 생명이다.
예수님은 옛 생명을 다시 얻은 경우가 아니라
새로운 생명(더 풍요로우며 다시는 죽지 않는 생명)을 받았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생명(靈)의 차이점을 분별해야 한다.
생명과 영은 똑 같은 것이 아니며, 다른 때에 우리에게 주어진다.
예를 들면 예수님의 부활 후, 제자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새로운 생명이 주어지나,
성령강림절에 이르러서야 그들이 이미 받은 새로운 생명(삶)을 위한 영이 주어진다.
그리고 이와 꼭 같은 일을 우리는 삶에서 자주 경험한다.
우리는 생명과 영에 따라 살아가며
우리 영혼의 평화는 이 생명과 영 사이의 행복한 통합이 이루어 질 때 가능하다.
파스카 신비는, 이제 곧 살펴보겠지만, 변화의 과정이다.
이 변화의 과정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생명과 새로운 영을 받게 된다.
이 과정은 고통과 죽음으로 시작되고, 이어서 새로운 생명을 받게 되며,
옛 생명에 대한 애도와 새 생명에 대한 적응의 과정이 따르게 되며
마지막으로 옛 생명을 진정으로 놓아버린 후에야
우리가 이미 얻어 살고 있는 새 생명을 위한 새로운 영이 주어진다.
 
 우리는 이 전 과정을 누구보다도 먼저 예수님의 과월
즉 죽음으로부터 새 생명으로 넘어가는 그분의 위대한 파스카 신비에서 보고 있다.
신학적으로 예수님의 가르침 특히 그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이어지는 일련의 일들을 보면서
우리는 파스카의 주기(周期)에
다섯 가지 명확하고 뚜렷하게 구별되는 순간들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것들은 성 금요일, 부활절 일요일, 승천하시기 전의 40일, 승천
그리고 성령강림의 다섯 순간들이다.
파스카 신비를 더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각각의 단계를 유기적인 과정들의 한 부분으로 서로 연관 지어 이해해야 한다.
각 단계는 변화라는 한 과정, 새로운 생명과 새로운 영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죽이고 놓아버리게 되는 일련의 과정 중 일부이다.
 
 파스카의 주기는 요약하면 다음과 같이 도표화 할 수 있다.
1). 성금요일..... “생명의 상실-실제 죽음
2). 부활절 일요일..... “새로운 생명의 영접”
3). 40일..... “새로운 생명에 적응하는 시기이자 옛 생명을 애도하는 시기”
4). 승천..... “옛 것을 놓아주고 그 옛 것이 당신에게 축복이 되게 한 후
그것에 더 이상 집착하지 않는다”
5). 성령강림.... “이미 받아서 살고 있는 새로운 생명을 위하여 새로운 영을 받음”
 
 이것을 좀더 쉽게 그리고 우리 각자에게 더 개별적으로
파스카적인 시도가 되는 말로 바꾸어보면 다음과 같다.
1). “당신이 잃은 것을 나열해 본다”
2). “당신이 새롭게 탄생한 것을 선포한다”
3). “당신이 잃은 것을 애도하고 새로이 얻은 삶에 적응해 본다”
4). “옛 것에 집착하지 않고 그것이 당신을 고양시키도록 하고 그것이 당신에게 축복이 되게 한다”
5). “실제로 당신이 살고 있는 새로운 생명의 영을 받아들인다”
 
 이 같은 주기는 일생에 단 한 번만 겪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 또 이 지상에서 삶을 상실할 때마다 일어난다.
그러나 또한 우리 삶의 모든 측면에서 매일 겪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수많은 죽음에 대해 말씀하신다.
매일의 죽음과 수많은 오름의 사건들과 다양한 성령강림의 사건들에 대하여
파스카 신비는 생명에 이르는 비밀이다.
궁극적으로 우리의 행복은 파스카를 적절하게 겪어 내느냐에 달려 있다.
(롤하이저 신부님의 『영성을 찾아서』중에서 발췌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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