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사회적인 집단이 만들어 낸 수치심/영적성장을 위한 감성수련 문종원 신부님
작성자조연숙 쪽지 캡슐 작성일2008-11-22 조회수569 추천수2 반대(0) 신고

 
 


 

   

 

오늘 복음에서 간음하다가 잡힌 여자가 느끼고 있는 감정을

정확히 이야기한다면 수치심입니다.

대중 앞에 자신의 결점이 완전히 노출되었을 때 느끼는 감정을 말합니다.

이 수치심은 사회적인 감정이기에

이 여자는 공동체에서 소속될 수 없음을 절감하게 됩니다.

사회적인 관계성 안에서 세워진 기준들은 엄격하며 가혹하기까지 합니다.

그 기준에 못 미치거나 그 기준을 파괴할 위험성이 있는 사람들을

대중 앞에 폭로하고 공동체 안에서 추방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기준들이 너무도 모호하다는 것입니다.

설정된 기준이  선입견과 편견으로 얼룩져 있어서

상처를 입었다는 것입니다.

큰 도둑이 작은 도둑을 감옥으로 보냅니다.

궁극적으로는 큰 죄인들이 작은 죄인들을 돌로 친다는 것입니다.

수치를 당한 사람은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입니다.

이러한 죽음의 위협을 받을 때 자신의 자존감이 무너지며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자신을 판결하기에 이릅니다.

예수님의 판결은 율법학자나 바리사이파

그리고 죄를 지은 사람들의 것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 판결 안에 신비적인 힘이 있습니다.

그것은 뒤바뀐 기준들을 바로 세우는 힘이며 죄인을 구원하는 판결입니다.

왜냐하면 그 누구보다도 예수님 당신 자신이

그러한 수치스러운 상황 앞에 서실 것과

수치스러운 죽음을 당하리라는 것을 아시기에

그로부터 나온 공감력 때문입니다.      

어떤 공동체 또는 사회적인 집단이 만들어 낸 수치심에

자신의 내적 소신으로 당당히 맞설 수 있다면

한 개인의 존엄성은 부셔지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굴욕적인 고문을 받고 벌거벗겨지는 수치를 당하게 되었을 때

수치심에 대한 개인적인 인식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예수님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큰 위기의 순간에서 예수님은 수치스러운 상황을 거부하십니다.

수치를 당할 곤경에 처했을 때도 수치심을 거부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수치심을 잃지 않고 옷을 벗을 수 있습니다.

달리 말해 깊이 내면화되어 있는 인간 존엄성에 대한 감각이

외부의 압력에 의해서 박탈당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그때까지의 종교적인 경건심과 수치심을 뒤엎는

혁명적인 요소들을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라는 죽음의 길을 통해

대중 앞에서 모욕을 당하셨습니다.

그분은 심하게 심문을 당하고 벌거벗겨지고 조롱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신약성서가 말하는 것처럼, “그분은 장차 누릴 기쁨을 생각하며

부끄러움도 상관하지 않고 십자가의 고통을 견디어 내시고...”(히브 12,2).

대중 앞에서의 수치스러운 죽음이 그분을 치욕스럽게 만들지 못했습니다.

그분은 자세를 잃지 않으시고 죽음을 직면하셨습니다.

수치심에 관한 이야기는 예수님의 죽음 안에서

신비스럽게 완전한 전환을 이룹니다.

예수님께서는 벌거벗겨 졌으나 수치스럽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벌거벗기움은 첫 번째 동산,

낙원에서의 낭만적인 노출이 아니라 공공의 장소에서 대중 앞에서

사형집행을 받는 자의 벌거벗기움입니다.

이러한 죽음의 굴욕적인 환경들이

예수님을 치욕스럽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분은 십자가의 수치스러움을 멀리하지 않으셨습니다.

죽음을 껴안음으로서 예수님은 사회적 수치스러움을 변형시켰습니다.

크리스천들은 십자가에 대한 신앙 안에서 이 변형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이 사건은 수치스러운 것으로 그리고 실패한 사건처럼 보였으나

치유가 이루어지는 고통의 표시로서 들어 높여졌습니다.

감추인 것이 드러났으며 하찮고 버려진 것이

놀랍고 경이로운 사건이 된 것입니다.

마지막 순간에 위엄과 품위로 껴안은 그분이 걸어간 죽음의 길이

어리석은 죽음의 독침을 빼냈습니다.

죽음의 고통이 마술적으로 제거된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굴욕과 치욕을 통해

들어 높여진 것입니다.

그분이 이러한 죽음의 길을 걸어가셨기 때문에

다른 모든 죽음들을 인내하며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고

그분의 어리석음으로 모든 죽음들이 덜 어리석게 되었습니다.

그분의 죽음을 통한 신비스러운 변형은

수치스러운 모든 육체적인 죽음을 뛰어 넘어 확대됩니다.

심한 박해로 인해 고통을 받아온 초대 교회의 신자들은

기도와 종교 예식을 통해서 수치심을 잉태했습니다.

치욕을 당했으나 그들의 가치는 손상되지 않았습니다.

상처받기 쉬운 것들이 모두 폭로되었으나

그들은 내면의 가치를 잃지 않았습니다.

사회가 그들을 거절했으나 하느님은 껴안으셨습니다.

이 역설적인 사건은 크리스천들에게 메시지를 전합니다.

“그들이 숨겨진 수치심을 용기를 가지고 하느님께 드러낸다면

수치심은 그 힘을 잃을 것이다.”

마태오 복음서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를 듣게 됩니다.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폭으로 찢어지고...”(마태 27,51).

낙원으로부터 쫓겨난 이래로 인간과 거룩한 것 사이에 덮여졌던 것과

가려졌던 것이 제거되었습니다.

이 거룩하고 놀라운 계시가

십자가의 벌거벗겨진 예수님의 몸을 통해 메아리쳤습니다.

감추어진 것이 드러나고 비밀이 사람들에게 알려졌습니다.

고대 종교적인 행렬은 끝나고

이것이 사람들에게 수치심에 대한 규범이 되었습니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베일이 찢어짐을 해석합니다.

“예수께서 피를 흘리심으로써

우리는 마음놓고 지성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휘장을 뚫고 새로운 살길을 우리에게 열어 주셨습니다.

그 휘장은 곧 그분의 육체입니다”(히브 10,19-20).

이 메시지는 육화의 계시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는

육체를 지니고 하느님을 볼 수 있으며 그분을 마주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존엄한 현존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가로막았던

불가항력적인 요소들이 제거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수치를 당하심으로

우리의 사회적 수치심은 치유 받고 안전하게 될 것입니다.

그분이 당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 길을 걸을 때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거부하고 치욕스럽게 위협을 가하는 요소들이

계속해서 우리에게 순응할 것을 강요하고 순명을 요구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근원들, 심리적인 성숙과 종교적인 믿음을 통해

우리는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자주 교회가 사회적인 부끄러움에 연루됨에도 불구하고

우리 신앙인의 유산은 소속감이 무엇인지를 재정의 할 기회를 갖게 해주고

복수하고자 하는 갈증을 용서의 의지로 전환시켜

우리의 수치심을 치유할 것입니다.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