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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1월 22일 야곱의 우물- 루카 20, 27-40 묵상/ 하느님 앞에서는
작성자권수현 쪽지 캡슐 작성일2008-11-22 조회수639 추천수5 반대(0) 신고
하느님 앞에서는

그때에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물었다. “스승님, 모세는 ‘어떤 사람의 형제가 자식 없이’ 아내를 남기고 ‘죽으면, 그 사람이 죽은 이의 아내를 맞아들여 형제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고 저희를 위하여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자식 없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둘째가, 그다음에는 셋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습니다. 그렇게 일곱이 모두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마침내 그 부인도 죽었습니다. 그러면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그러나 저 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은, 모세도 떨기나무 대목에서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주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그러자 율법학자 몇 사람이 “스승님, 잘 말씀하셨습니다.” 하였다. 사람들은 감히 그분께 더 이상 묻지 못하였다.
(루카 20,27-­40)
 
 
 
 
◆“하느님께는 모든 이가 살아 있다.” 창조주 하느님은 피조물을 사랑으로 바라보며 끊임없이 말을 건네신다. 바람과 구름과 물결과 비와 눈! 모든 자연현상이 그분과 어우러져 뒹구는 한판의 놀이처럼 움직이고 춤추며 흐른다. 하느님은 인간과도 한번 맺은 관계를 잊지 않고 바르게 회복시키는 데 창조의 에너지를 다시 쏟으신다. 아들 예수님을 인간세상으로 보낸 것은 재창조 사명을 완수할 의지 표현이며 증거다. 부활의 선물이 그분한테서 주어졌다. 우리는 죽은 후에 하느님을 만나기를 기대하지만 그분은 생명의 주인답게 태어남을 축복하고 관계를 끝까지 간직하신다.
 
죽음은 생명의 끝이 아니라 영원히 살아 계신 하느님 현존 앞으로 들어가는 해방의 문이다. 이는 그리스도인한테만 공개된 진실이고 비밀이다. 죽음이 종말을 의미한다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맺었던 관계도 그 순간 끝난다는 논리인데, 생명을 만드신 하느님을 생각하면 그건 불가능하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생명 안에서 만나 영원한 교감과 교류를 약속하셨다.
 
아버지 산소가 모셔져 있는 로스앤젤레스 남쪽 공원묘지에 가면 드넓은 잔디밭에 비석대신 나란히 누운 묘판들이 평화로운 느낌을 준다. 동판이나 대리석에 새겨진 이름과 생몰 날짜로 묻혀 있는 사람의 역사를 읽는다. ‘자애로운 할머니이며 헌신적인 어머니요 충실한 아내였던 그녀, 여기 영원한 안식 누리기를. 1917-­2001.’ 푸른 하늘 아래 누워있는 동판에서 망자와 사랑하는 이들의 축복이 전해진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는 기구한 삶을 산 여인 이야기가 논쟁거리로 등장한다. 예수님은 그 여인이 세상에서 맺은 관계가 혼란스러워 보이지만, 하느님 앞에서는 아무 조건과 차별 없이 평등하게 사랑받는다는 진리를 일깨우신다. 중요한 것은 가난한 죄인으로서 죽음을 통해 회개를 완성하는 일이다. 예수님은 죽음의 문을 건너 영생으로 들어가는 길을 가리키고 있다.
원영배(미국 로스앤젤레스 대교구 종신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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