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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과 매일 복음 묵상을 - 연중 제 33주일
작성자김현아 쪽지 캡슐 작성일2008-11-16 조회수696 추천수8 반대(0) 신고

 

 

 

                          연중 제 33 주일 - 달란트: 사랑의 씨앗

 

 

 

 아버지에게는 아들이 둘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는 형에게 재산의 반을 나누어주면서 그것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했습니다. 동생이 그 사실을 알고 화가 나서 아버지에게 따지고 들었습니다. 아버지는 그런 동생에게 하얀 종이를 두 장 주면서 한 장은 대장간에 또 한 장은 미술가에게 갖다 주라고 말했습니다.

동생은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그래, 대장간에 갖다 주니 그것으로 뭘 하드냐?”

“종이를 화로에 넣어 불을 땠습니다.”

아버지는 또 다시 물었습니다.

“미술가에게 갖다 주니 그것으로 뭘 하드냐?”

“미술가는 그 종이에 그림을 그렸습니다.”

“똑같은 종이라도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서 화로에 던져지기도 하고 그림을 담는 귀한 역할을 하기도 한다. 네가 재산을 가지고 참으로 귀하게 쓸 수 있을 때가 되면 나머지 재산을 네게 주겠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 우리가 그것을 잘 사용할 줄 알 때에 하느님께서 그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을까요? 아마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 이미 우리가 다 가지고 있는데 모르고 불평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오늘 예수님께서 달란트의 비유를 말씀해 주십니다. 어떤 주인이 떠나면서 한 종에게는 다섯 달란트, 한 종에게는 두 달란트 또 한 종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납니다.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은 열 받을 것이 당연합니다. 자신에게 가장 적은 돈을 맡겼기 때문입니다.

만약 주인이 한 달란트 받은 종에게 다섯 달란트를, 다섯 달란트 받은 종에게 한 달란트를 맡겼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이 오늘 복음에 나오는 종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앉아만 있었을까요?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사람은 워낙 충실한 종이기 때문에 한 달란트든 다섯 달란트든 그것을 가지고 최선을 다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이런 칭찬까지 받았을 것입니다.

“너는 가장 적게 받고도 불평하지 않고 최선을 다 해 한 달란트를 더 벌었으니 여기 있는 종중에 가장 뛰어난 종이로다. 너에게 내 재산의 총 책임을 맡기겠다.”

  사실 오늘 복음에서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이 망하게 된 이유는 주인의 뜻에 불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자신은 더 뛰어난 사람이라 교만하고 있었기에 주님의 달란트 분배가 불공평해 보였던 것이고 그러니 주님의 재산에 도움이 되는 일은 하나도 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교만이란 것은 자신이 지니고 있는 가능성도 보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그것을 주신 분을 사랑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 종은 주인이 무서운 분이라 자신이 그것을 사용하다가 잃었을 경우가 두려워 감추어 두었다고 변명을 하지만 사실 자신에게 다른 사람에 비해 작은 능력만 준 것 때문에 주인을 미워하게 된 것입니다. 두려움은 사랑의 반대말입니다. 사랑엔 두려움이 없습니다. 종은 주인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두려워 한 것입니다.

  실제로 한 달란트를 받고도 불평하지 않고 감사하며 큰일을 이루어 낸 예들은 수없이 많습니다.

무말랭이처럼 말라비틀어진 육체를 지니고 언제나 휠체어에 앉은 채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루게릭병(근육 무력증)이라는 불치의 병에 걸린 사람입니다. 겨우 20세가 되던 해에 이 병에 걸렸다는 통고와 함께 앞으로 1, 2년 이상 살지 못할 것이라는 의학적인 사형선고까지 받았던 사람입니다. 천우신조(天佑神助)랄까, 죽음 선고가 있은 지 무려 4반세기 이상을 살고 있긴 하지만 1985년에는 또 다시 폐렴에 걸려 기관지 절개 수술을 받아 말하는 기능가지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당사자인 호킹(Howking)박사의 <시간과 역사>라는 책을 대하면 유달리 농도 짙은 감사가 처음부터 끝까지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감격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선 우리가 통상 머리말이라고 하는 부분을 그는 “감사의 말”이라는 제목 하에 기술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의 글이 전개되어 가면서 계속하여 자기의 행복을 고백하고 타인에 못지않은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에 부단히 감격하고 있습니다.

그는 현대의 아인슈타인에 버금가는 이론 물리학자로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기에 그는 나이 겨우 32세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또 학문적인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영국왕립협회의 회원이 되는 영광을 안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현재 영국 케임 브리지 대학의 루카스(Lucasian) 수학교수로서 뉴턴의 영예를 계승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아인슈타인과 스티븐 호킹 박사 둘 중 하나에게 상을 내리시려한다면 누구에게 더 큰 상을 내리실까요? 불우한 조건으로 시작했던 호킹 박사가 아닐까요?

따라서 마지막 날 하느님께 평가를 받게 되는 기준은 큰일을 많이 이루어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주님께서 주신 능력을 썩히지 않고 발전시키려 노력하며 살았느냐 일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주님께서 마지막 날에 우리에게 내놓으라고 하실 달란트는 무엇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것처럼 이 세상에서 우리 능력을 발휘하여 번 돈이나 성취한 명예 등을 말할까요? 그런 것들은 하느님께는 아무 쓸모도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마지막 날 주님께서 심판하실 것은 우리의 사랑이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마음 안에 사랑의 씨앗을 심어놓으셨습니다. 우리가 그 씨앗을 잘 키워 당신께 활짝 핀 꽃을 바치기를 원하십니다.

온전한 사랑을 주시지 않고 그 씨앗을 주신 이유는 우리가 노력해서 사랑의 열매를 맺으라는 뜻입니다. 만약 활짝 핀 꽃을 우리에게 주셨다가 그것을 다시 받는다면 주님께나 우리에게도 의미 없는 일일 것입니다. 우리에게 아무런 공로도 없는데 당신 자녀 되는 영광을 주셨다면 하늘의 천사들이 하느님을 불공평하다고 할 것입니다.

진흙 속에 묻혀 있는 연꽃 씨의 수명은 무려 수백 년, 어떤 것은 수천 년이 되는 것도 있다고 합니다. 수천 년이 지나도 조건만 맞으면 싹이 나고 꽃을 피운다고 합니다. 그 씨는 더러운 물 바닥에 잠겨 있다가 좋은 온도와 햇빛 등 조건이 맞으면 아름다운 꽃을 물 위에 피웁니다.

사랑의 씨앗도 마찬가지입니다. 게으른 종은 사랑의 씨앗을 묻어놓고 꽃을 피우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마음 안에 있는 사랑의 씨앗을 피울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일까요?

사랑은 성령님의 열매입니다. 성령님은 마치 알맞은 햇살과 같이 진흙 속에 묻혀있는 씨앗을 자극시켜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합니다. 따라서 게으른 종이란 자신 안에 성령님을 받아들이려고 아무 노력도 하지 않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오십니다. 예수님은 현세에 ‘말씀(성경)과 성체’로 현존하십니다. 성령님께서 오시는 통로를 ‘성사’라 부릅니다. 따라서 가장 완전한 성사란 미사(말씀, 성찬을 모두 포함)를 의미하겠지요. 그러니 부지런하고 성실한 종이란 소리를 듣기 위해서 매일매일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너무 명확하지 않습니까?

 

 

 

 

 

 

                  ☆ 로마에 유학 중이신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복음 묵상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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