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08-11-07 조회수1,081 추천수14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08년 11월 7일 연중 제31주간 금요일
 
 
 
 The master commended that dishonest steward for acting prudently.
For the children of this world
are more prudent in dealing with their own generation
than the children of light.
(Lk.16.8)
 
 
제1독서 필리피서 3,17―4,1
복음 루카 16,1-8
 
 
묵상을 하다가 문득 신학생 때 등산 갔던 것이 떠올려졌습니다. 월악산 겨울 등산이었지요. 선후배들간의 친목을 다지는 시간이었습니다. 솔직히 조금 힘들었습니다. 사실 ‘악’자 들어가는 산을 오를 때 정말로 ‘악’ 소리 난다고 하지 않습니까? 아무튼 힘들게 산을 올라 드디어 정상에 도착했습니다. 기분이 너무 좋았습니다. 그런데 정상에 도착한 지 30초도 되지 않았는데, 선배가 이제 내려가자고 합니다. 저희는 이야기했지요. 산 정상까지 왔는데, 얼마나 여기에 머물렀다고 벌써 내려가냐고 말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조금 더 있으면서 경치도 보면서 즐기자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선배는 이렇게 말합니다.

“산이 다 똑같지 뭐. 볼 것이 뭐 있다고 그래? 얼른 내려가서 시원하게 목욕이나 하자.”

하늘같은 선배의 말인데 어떻게 어깁니까? 결국 저희는 3시간을 힘들게 오른 정상을 단 30초도 머물지 못하고 내려오고 말았습니다.

산을 즐기지 못하는 이 선배님의 모습이 오늘 떠올려지면서 세상을 살면서 사람들이 삶을 즐기지 못하는 이유를 조금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감탄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본당 마당에서 어떤 꼬마아이가 저를 아주 급하게 부릅니다. 저는 무슨 일인가 싶어서 얼른 다가갔지요.

“신부님, 여기 개미가 있어요. 와~~”

얼마나 흔한 개미입니까? 그런데 이 꼬마는 겨우 이 개미 한 마리를 보고는 감탄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작은 것에도 감탄을 느끼는 사람은 어떨까요? 삶 전체가 얼마나 놀랍고 신기하겠습니까? 그리고 이러한 삶을 마련해주신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바치면서 기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런 감탄을 잊어버렸습니다. 복권에 당첨되거나, 집값이나 주식이 오르면 ‘와~~’하고 감탄할지 모르겠지만, 일상의 삶 안에서 감탄하는 사람들을 쉽게 찾기가 힘든 것 같습니다.

이제 주님의 손길을 느끼기 위해서 우리는 감탄하는 연습도 필요할 것 같습니다. 밥상을 보고서 ‘와’, 책을 읽으면서도 ‘와’, 나무, 풀 들을 바라보며 ‘와’라고 외치는 감탄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볼 수 있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유명한 약은 집사에 대한 비유말씀입니다. 재산을 낭비한 소문을 들은 주인이 집사를 쫓아내려고 하자, 주인에게 빚진 사람의 빚을 탕감해 주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집사 자리에서 밀려났을 때를 대비해서 사람들에게 인심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 이렇게 주인에게 손해를 끼치는 집사가 나중에 주인으로부터 칭찬을 받게 됩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와~~’하고 감탄사를 내뱉을 수 있는 부분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느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은 이렇게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우리는 무조건적인 벌을 생각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악하다는 판단보다는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 노력한 그 정성을 칭찬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부정직한 집사를 닮으라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우리들의 관점과 생각들을 바꾸면서 생활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즉, 세상의 관점에 맞추어 살기보다는 ‘와’라는 감탄사를 내던지면서 힘차게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 집사가 칭찬받듯이 우리 역시 하느님 아버지께 칭찬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오늘 ‘와’라는 감탄사를 많이 뱉어보세요.




바보가 세상을 구한다(홍사종)

얼마 전 극장가에서는 영화 ‘바보’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주인공의 순애보적 사랑과 희생, 헌신이 관객들의 마음을 울린 것이다. 김수환 추기경은 직접 그린 자화상에 ‘바보야’라는 제목을 붙였다. 자신의 삶이 세속의 잣대로는 정말 바보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에서 붙인 제목인 듯싶다. 어느 신문 인터뷰에 실린 그의 ‘바보’ 같은 삶의 방식과 인생철학에 사람들은 또 한번 가슴 뭉클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런 ‘바보’가 사라져가는 세상을 사람들이 그리워해서일까. 정보사회 이후의 변환기에 들어선 한국사회는 큰 몸살을 앓고 있다. 농경사회와 산업사회에서의 소위 ‘미래’는 천천히 다가오는 내일이었지만, 오늘날 미래와 내가 만나는 데 걸리는 시간의 속도는 그야말로 전광석화다. 탁 머리를 치고 지나가 버리는 미래의 속도 앞에 현대인은 어쩔 수 없는 무력감과 좌절을 느끼게 된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변화의 속도가 빠르기 때문일까. 속도에서 뒤처지면 우리는 성공으로부터도 멀어진다는 강박증에 사로잡혀 산다. 사람들은 성공의 가치를 오직 재화와 관련지어 잰다. 개인뿐 아니라 새 정부에서도 국민의 성공적 가치 기준을 ‘국민소득 4만 불 시대’에 두고 있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성공하는 시대를 열겠다는 새 정부의 국정운영 철학에는 자유시장 원리를 적용해서 부국을 만들겠다는 의지가 깔려 있다. 그러나 정부의 의도처럼 4만 불을 향해 달려가는 ‘국민 성공 시대’가 진정으로 우리 국민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을지 의문이다. 국민 모두가 똑똑하고 영악해야 한다는 전제 속에, 어쩔 수 없는 그늘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문득 바보가 그리워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바보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은 이 엄청난 세상의 ‘빨리 뛰기’ 경주로부터 한번쯤 제 자리에서 자신의 모습을 뒤돌아보고 싶은 사람들일 것이다.

예수의 모습도 바보였고, 석가모니도 당시의 세속적 가치 기준으로 볼 때 바보였다. 이제 사람들은 잘나고 똑똑한 자만이 성공하는 숨 가쁜 이 세상에서 ‘자신의 이익보다 다른 사람을 먼저 배려하고’ ‘이해관계를 따지지 않고’ ‘변할 줄 모르고’ ‘누구에게도 위해를 가하지 않고’ ‘자기 할 일만 하는’ 진정한 바보 이야기에 열광한다.

그 바보가 세상을 구한다.
 
 
 
Daydream - Again
Mandy moore - only ho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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