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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위령의 날 (성거산지기신부님 연중31주 강론)
작성자김시원 쪽지 캡슐 작성일2008-11-06 조회수731 추천수2 반대(0) 신고
Photo by 성거산지기 정지풍 아킬레오 신부님 
 
 
성거산의 야생화 용담
 
 
 

위령의 날 (11월2일) 첫째 미사


위령 성월은 가톨릭 교회에서 세상을 떠난 모든 이들의 영혼을 기억하며 기도하는 달입니다. 한국 교회에서는 위령의 날(11월 2일)과 연관시켜 11월을 위령 성월로 정해 놓았습니다. 이 달에는 특히 이미 세상을 떠난 부모나 친지의 영혼, 특히 연옥 영혼들을 위해 기도와 희생을 바치게 됩니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죽은 부모나 형제, 친지들을 위해 제사를 바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조상들과의 긴밀한 유대관계를 형성하여 왔습니다. 가톨릭교회 역시 오래 전부터, 교회의 핵심적인 신앙 조문을 모아놓은 사도신경 안에서

"모든 성인들의 통공을 믿으며" 하며 성인통공 교리를 믿어왔습니다.

 

이 성인통공 교리는 교회를 이루는 세 구성원들, 즉 세상에 살고 있는 신자, 천국에서 천상의 영광을 누리는 이들, 그리고 연옥에서 단련 받고 있는 이들 사이의 긴밀한 유대관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들이 서로의 기도와 희생과 선행으로 서로를 도울 수 있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교회의 신앙에 의하면 죽음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하느님과 만남은 결코 개인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우리는 고립된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 그리스도의 형제자매로서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죽은 이를 위한 교회의 기도에는 바로 죽은 신자가 살아있는 신자들의 연대성으로부터 떨어져나가지 않는다는 희망이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은 이를 위한 기도는 사랑의 한 가지 모습, 하느님 앞에서의 인간적 연대성의 공표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위령 성월의 근본정신은 사랑의 정신이요 하느님 백성 전체를 향한 한없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따라서 산 이와 죽은 이를 위해 기도하고 이들을 위해 사랑의 행위와 희생을 쌓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특권이자 의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위령 성월을 맞는 우리 신앙인들의 자세여야 합니다. 나 혼자만의 구원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처음부터 한 개인의 구원이 아닌 백성의 구원, 즉 공동체의 구원을 원하셨습니다. 또 이를 위해서 당신의 외아들마저 이 세상에 보내주셨고 십자가에 무참히 죽는 고통마저 감수하셨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신앙인이라면 나보다는 이웃을 위해 사는 사랑의 사도이어야 합니다.

 

기도가 산 이를 돕는 다면 어찌 죽은 이를 돕지 못하겠습니까?

 

죽은 이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가톨릭 신자가 되어 크게 행복을 느끼는 것 중 하나입니다.

 

우리보다 먼저가신 부모님들과 그리고 다른 죽은 형제들과 또 살아 있는 우리들과 기도 중에 매일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크나큰 행복 입니다.

 

우리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 한다면 우리를 사랑하던 그들의 고통을 잊고 살수는 없습니다.

 

연옥 영혼 중에서도 가장 버림받은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그들의 고통을 덜어 주고 하느님 품안에 평안히 쉴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참된 행복 선언

 

참된 행복의 메시지는 바로 그리스도교의 삶의 규범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무한한 행복, 그 자체이신 하느님만이 기쁨을 가져 올 수 있기에 인간의 행복은 하느님 밖에서 완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성령의 은총으로 끊임없는 삶의 쇄신과 그분의 허락 아래 서 입니다.

 

참된 행복은 먼저 마음의 쇄신에서 비롯되어야 합니다. 마음이 신앙 안에서 질서를 회복하고 기쁨과 평화의 뿌리를 내려 견고해야 하는 것입니다.

 

산상설교의 말씀은 “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하고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참된 행복은 바로 모든 덕의 근본인 겸손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산상설교는 8가지 행복을 말하고 있지만 어떤 면으로는 하나입니다.

 

영적 가난이 참된 행복의 근본이라는 뜻입니다. 8가지 중 6가지는 이 영적 가난의 조건들에 불과 한 것입니다.

 

우리는 숨겨진 사소한 기쁨과 행복을 드러내기를 두려워하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들의 생활에서 감정과 느낌을 이야기 할 때 행복이나 기쁨보다는 고통에 대해 더 많은 말을 하여 우리가 행복보다는 불행한 것으로 더 많은 표현을 하고 살아갑니다.

 

우리들의 실생활 속에서 작은 조각들의 행복들을 제대로 평가 할 줄 모르고 살아갑니다.

 

어쩌면 친숙하고 잔잔한 기쁨들을 너무 많이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 가치를 모르고 지나가는 경우가 많고, 때로는 행복보다는 불행스런 작은 고통을 더 많이 생각하기 때문에 기쁨이나 행복한 표현이 절제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그것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 할 줄 모르고 살아가는 경우가 더 많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작은 조각들의 기쁨을 받아들이고 감사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기쁨들은 다시는 오지 않을 것들이며, 적어도 결코 같은 것들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충족되지 않더라도 환희의 빛이 비추임으로써 우리의 마음이 위로되는 하찮은 사소한 것들 이들을 공감 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제가 아는 자매님 한분은 가끔 성지에 기도하러 자주 오십니다. 이분의 말을 듣다보면 저는 동질적인 기쁨과 행복감에 젖어있는 저 자신을 발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자매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너무 순수하고 떼가 묻지 않은 영이 맑은 분이셨습니다.

 

나뭇잎 하나, 꽃 한 송이를 보고도, 건네주는 말 한마디에도, 성지에서 만나는 한 분 한분에게도 만나는 기쁨에 늘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그 자매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평화와 행복함을 선사해주곤 하였고 입에서는 늘 감사라는 말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성지에 올 때는 순교자님들을 위해 꽃 한 아름 안고 오시며 제대나 성모님 앞에 놓고 가곤 하였습니다. 이분의 작은 생활의 한 조각 이였지만 하느님 안에 늘 행복해 하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지난 금요일 오후에는 야생화 화분을 사러 경기도 여주 이천에 다녀왔습니다. 야생화를 무척 사랑하시고 가꾸는 세 자매님들의 소개로 찾아간 곳은 여주의 도자기 명장의 집이었습니다. 40여년을 오로지 도자기 빚었다는 이분의 갤러리를 구경하였습니다.

 

이분은 주로 조선 시대의 청자를 만드셨지만 간혹 현대적인 작품도 볼 수 있었습니다. 같이 간 자매님은 다도를 하시는 분이라 진열되어 있는 작품 중에 찻잔이 눈에 제일 먼저 보여졌나 봅니다.

 

아름다운 찻잔을 발견하고는 너무 좋아하면서 품에 안아 보기도 하고 행복해 하였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너무 좋은 작품이었고, 일생에 단 하나 나올 수 있는 찻잔이었습니다.

 

유엔 지정업체이면서 세계 평화 문화상도 수상한바 있는 그 분은 아주 유명한 명장이었습니다.

 

자매님께서는 이곳에 온 것이 야생화 화분 때문에 온 것이지 찻잔을 살려고 한 마음은 없었기 때문에 이 정도의 작품은 얼마나 가는지 가격이나 알아보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이 찻잔은 얼마 정도 갑니까?”하자 그 명장은 그렇게 그 찻잔이 좋으냐 하면서 얼마 전에도 서울의 어느 형제님께서도 아름다운 막사발을 너무 좋아해서 그냥 가지고 가시라고 했다면서 원하면 줄 수도 있다고 하며 부인한테 찻잔을 싸주라 하면서 오히려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저는 참으로 놀랬습니다.

저는 작품도 명장의 작품으로 너무 좋았지만 그 형제님의 마음씨가 정말 명장이었습니다.

 

 “저 분이야말로 정말 훌륭한 장인이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자기 남편은 도자기 만드는 데만 몰두하지 돈하고는 무관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일생에 이와 똑같은 작품은 절대 만들어지지 않는 소중한 작품을 선뜩 내주시는 장인의 비움의 마음에 따뜻함을 느끼게 하였습니다.

 

집착(執着)하는 마음이 없는데 무엇이 아깝고 소중할 것이 있겠는가?

 

나에게서 인연(因緣)이 다하면 자연스럽게 떠나갈 것이고, 아직 인연(因緣)이 다하지 못하면 내가 소중히 관리하면 될 것이라는 무심(無心)이라는 단어가 문득 생각이 났습니다.

 

혼자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오늘 참으로 아름다운 사람을 만난 것이 행복했습니다.

 

찻잔을 받은 자매님은 너무 흥분이 되고, 가슴이 떨려 청심환을 먹어야 될 것 같다면서 얼굴에는 환희의 기쁨으로 가득차 있었고 그의 입에서는 감탄이 흘러나왔습니다.

 

오면서 차 안에서 도자기 명장의 아름다운 찻잔이 제대로 임자를 만난 것 같다면서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행복한 하루였고,

 

함께한 저희들도 모두 행복한 하루였습니다.

 

참된 행복은 일상생활의 의식주와 양식, 의복, 주거와 같은 자연적인 부와 인위적인, 즉 인간의 재간으로써 만들어진 돈과 같은 재산 속에서는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재산은 인간에게 외부적인 것이고 다만 인간을 돕는 데 쓰일 뿐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그것의 노예가 되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그것을 목적으로 해서도 아니 되며. 단지 수단으로만 이용해야 할 것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 영혼이 육체의 생명인 것처럼 하느님은 인간의 복된 생명이시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인간의 내면에 있는 행복의 심한 갈망을 가득 채워 주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참된 행복은 주님에 대한 관상이며 동시에 그분과의 친교인데 성 아우구스티노는 그것을 “진리의 기쁨” 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이신 하느님을 소유하고, 하느님을 체험하는데 있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행복하게 태어나는 게 아니라 하느님의 도움으로 행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예수님이 가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것처럼 우리를 행복의 길로 이끄시기 위하여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당신의 도움으로 우리가 현재의 고통을 영원한 기쁨으로 변화시켜 주시기 위하여.....

 

성거산 성지에서 성거산지기 신부

 

성거산지기 신부님 연중 제31주일 강론

http://cafe.daum.net/sgm2008  성거산 성지 카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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