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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랑을 없애버린다 의미 (사랑은 독이 되어)
작성자장이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3-08-20 조회수472 추천수0 반대(0) 신고

10년 동안을 버려진 이들 가운데에서도 또 다시 버려진 아기를 보살폈습니다.
아기는 무려 10가지 이상이나 세심하게 돌보아 주어야 하는 다른 아기들에 비해서 무척 많은 손길이 필요한 아기였습니다.
삯꾼들에게는 자신의 손길이 편한 아기들이 있는가 하면 이 아기처럼 어려운 아기도 몇몇이 있기도 합니다. 언제나 사랑받는 아기들은 삯꾼 자신에게 손길이 편한 이들입니다.
이 아기는 태어나면서도 부터 얼마만에 버려졌고 삯꾼들에게서 또 다시 버려집니다. 
이 아기에게는 손길이 많이 가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은 아기 뿐만 아니라 어른들과 노인들에게도 해당되어지는 일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일은 힘들고 고생해야 하며 고난을 겪는 일인 것입니다.
똑같은 봉급을 받으면서도 좀 더 편리하고 수훨하게 일하고 싶은게 삯꾼들과 가짜 예수의 제자들입니다. 
그래서 <부산 어린이집>에서 방송으로 보았듯이 가짜 예수의 제자들과 삯꾼들을 힘들게 하는, 즉 인기가 없는 버려진 아기들과 어른들과 노약자들은 삯꾼들에게 호되게 (거칠게) 당합니다.
악에 의한 고통과 죄에 의한 죽음(사고사)이 빈번하게 일어납니다만 부모가 있는 부산 어린이집 아이들과는 다릅니다. 버려진 그들에게는 부모가 없습니다. 
가짜 예수의 제자들과 거친 삯꾼들은 부모 역할을 대신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수용소이지 성가정의 집이 아닙니다.


이 아기에게 연민의 손길을 내밀었습니다. 삯꾼(직원)이 되는 것을 자진 포기하고 무려 10가지 이상이나 돌보아 주어야 하는 점 때문에 장기 봉사자로 남았습니다. 
숙소에서 장기 봉사자로 지내면서 1주일간 5일은 아기 곁에서 일과를 하고 1주일간 하루는 노가다 하면서 벌인 일당은 아기의 습식 훈련을 위한 '유산균제'와 변비 해소를 위한 음료 및 식단 준비와 '식이섬유제'를 구매합니다.
지난 과거 처음 만났을 때부터 몇년간 아기는 자해를 했습니다. 얼마나 심한 자해인지 차마 눈 뜨고 보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 아기에게 <아래 게시글 ; 하늘이>에서도 말하였지만 자기 몸의 불편한 점을 말하지 못하는 아기의 온갖 스트레스를 풀어주고 미리 예방하면 자해가 수그러듭니다.
그리하여 아기와 헤어지기 전까지 99%가 치유되었고 1% 정도는 여전히 자기 의사표현입니다. (여의도 성모병원 소견 ; 게시글 참조)
삯꾼들은 이 아기에 대해 골칫거리가 되어져 버려진 가운데 또 다시 버려졌지만 이 아기에게도 아름다운 영혼이 있습니다.
아기와 '사랑의 소통'이 있다면 아기의 마음과 통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아기는 자해를 하지 않게 됩니다만 삯꾼들은 이 아기를 포기하였기 때문에 '사랑의 소통'이 없고 가짜 예수의 제자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의 소통'이 없게 됩니다.
그래서 그동안 아기는 자기 몸과 마음에 고통이 되었기에 엄청 심한 자해를 해 왔던 것입니다. '아기의 아빠'는 저절로 아기에게
사랑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누군가에게는 질병을 치유해 주는 사랑이 됩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자신들과 다르다며 반대를 받는 표적이 됩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사랑을 없애어 버립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습니다.
사랑은 힘들고 고생하며 고난을 겪기 마련입니다.
거친 삯꾼들과 가짜 예수의 제자들은 자신의 편리성을 위해서 사랑을 미워하게 됩니다.
다른 여러 삯꾼들과 가짜 예수의 제자들에게 사랑을 모해하기 조차 합니다.
그래서 사랑 그 자체이셨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수난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군가들에게는 사랑이 되셨지만
율법 학자들, 바리사이들, 수석 사제들, 원로들과 같이 불완전한 규정들과 방침들의 힘과 재물(돈)의 힘 및 거친 삯꾼들의 힘을 유지하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미움을 당했습니다.
지금의 가짜 예수의 제자들(사제들과 수도자들)과 삯꾼들도 변함없이 '사랑의 힘'에는 무기력하고 자기 집단의 이익과 편리성 들만을 따져 사랑을 미워하고 사랑을 죽입니다.
겉으로는 신앙과 신심의 모습을 갖추었지만 사랑이 무척 힘든 관계로 사랑을 미워하는 까닭에 결국은 사랑을 십자가에 매달아 예수님과 성모님을 갈라 놓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꺼이 십자가에서 죽으십니다.
그런데 그 짓을 한 사람들은 도리어 십자가의 고통을 미화하며 회개를 하지 않습니다.
이 모두는 그들에게 사랑이 결핍된 탓입니다.
'사랑의 아픔' , '사랑의 고통'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과 같이 누군가들의 사랑이 될 수 없었었다는 뜻입니다.
자기 및 집단의 이기성과 편리성을 중요시하며 불완전한 규정들과 삯꾼들의 노동력에 의존하는 가짜 예수의 제자들은
사랑 때문에 겪어야 하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결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반대하고 바리사이들, 율법 학자들, 수석 사제들, 원로들 처럼 사랑을 없애기로 작정합니다. 그들에게는 사랑이 오히려 독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 때문에 집단이 취하고자 하는 이득과 지배구조를 잃게 되는 것입니다.
거친 삯꾼들에게 악한 것들이 서로 공유되면서 공동체 안에는 죄악이 설치고 고통과 죽음이 멈추지 않듯이 가짜 예수의 제자들에게도 한 통속의 죄악이 그 틈으로 들어갑니다


자신들의 편리성 때문에 버려졌고 또 다시 버려진 아기를 거두어 들여서 아기를 보살피면 사랑이 됩니다. 사랑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내어 주지 (자기 버림) 못하면 사랑을 하지 못합니다.
1 - 2가지가 아니라 무려 10가지 이상을 보살피는데에는 힘들고 고생합니다.
또한 사랑스러운 것들이 공동체 안에서 서로 공유되지 못하고 (성인들의 통공) 악한 것들이 한 통속으로 공유되면서
사랑이 도리어 그들에게는 독이 된다하여 사랑을 미워함으로써 아기의 아빠는 10년 동안 내내 멸시와 조롱과 비아냥을 받습니다.
채칙질을 당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랑은 악한 것들과 공유하지 않기에 예수님처럼 당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침묵으로 오로지 사랑의 한 길을 걷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결합하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겪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장기 봉사자가 감히 직원들에게, 예수의 제자들에게 도전을 하느냐 하는 폄훼 식입니다.
자신들과 공유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빠는 '예수님대로' 악한 것들과 공유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10년 동안 채칙질을 받으며 가장 보잘것 없는 한 아기를 돌보았습니다.
마침내 그들에게 거부하는 사랑을 십자가에 못박았듯이 그들은 못난 규정을 억지로 내세워 아빠도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사랑 때문에 예수님과 성모님을 갈라 놓았듯이, 아빠와 아기를 갈라 놓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끝까지 자신을 내어 주십니다.
그런데 그것이 당연하다며 가짜 제자들(사제들과 수도자들)은 회개를 하지 않습니다.
또한 삯꾼들 마저도 회개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흔들림 없이 악한 것들이 공유되어져서 이득과 편리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지속되면 될수록 (거룩한 것들의 공유와 친교라는 성인의 통공이 없다) 
'사랑의 힘'에는 무기력해지고
사랑을 없애어 버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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