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한상기님의 둥둥 북소리 12
작성자김명순 쪽지 캡슐 작성일2008-10-31 조회수541 추천수3 반대(0) 신고

오늘의 묵상입니다.  (2008년 10월 30일 연중 제30주간 금요일)

한미간 300억불에 이르는 통화스와프 협정으로 한 고비는 넘긴 것 같습니다.
300억불까지는 원화로 미국 달러와 교환이 가능하므로 낭보중에 낭보입니다.
이르 반영하듯 어제 주식시장은 11.5%나 상승하는 사상 최대 상승율을 기록하였으며
미달러 환율도 177원이나 급락하여 1,250원으로 마감하였습니다.
오늘도 어제에 이어 이 땅에 단비가 계속 내리기를 기도하며 오늘 묵상을 시작합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바로 끌어내지 않겠느냐?>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1-6

1예수님께서 어느 안식일에 바리사이들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 가시어 음식을 잡수실 때 일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는데, 2 마침 그분 앞에 수종을 앓는 사람이 있었다. 3 예수님께서 율법 교사들과 바리사이들에게,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 하고 물으셨다. 4 그들은 잠자코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손을 잡고 병을 고쳐서 돌려보내신 다음, 5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 누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바로 끌어내지 않겠느냐?”
6 그들은 이 말씀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수님이 병자를 고쳐주려고 한 것은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게 측은지심이 없었다면 병든 사람을 고쳐주려는 마음도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믿음이 강하다 하여도 이런 측은지심이 없다면 결코 주님을 뵈올 수 없으며
예수님의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측은지심이 가득하다면 주님의 사랑을 누가 가르쳐 주지 않더라도 사랑을 실천할 것입니다.

측은지심은 인간의 네 가지 본성중 하나로 이런 네 가지 본성을 맹자는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이라 하여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지닌 네 가지 본성을 사단(四端)이라 하였으며 四端을 잘 키워나가야 '仁, 義, 禮, 智'의 온전한
인간에 이를 수 있다 하였습니다. 이런 四端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영성의 씨앗'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측은지심이 있어야 불쌍한 마음이 생겨나는 것이므로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먼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불쌍히 여기는 측은지심이 생겨나기 위해서는 먼저 눈으로 봐야 하며 오늘 예수님도 병든 이를 식탁에서 눈으로 봤기 때문에 측은지심이 우러나 치유해 줬습니다. 우리도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소외된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직접 눈으로 봐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그분들이 사는 현장을 찾아가야 합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하였습니다.
사랑하라는 강론을 수백 번을 듣고 사랑을 실천하게 해 달라고 매일 기도해도 불우한 이웃이 사는 현장을 한번 찾아가는 것만 못하는 것입니다.
제 성당은 병들고 오갈 곳 없는 어르신들이 모여 사는 그곳이 제 성당이기에 저는 오늘도
제 성당을 찾아가 측은지심이 생겨나도록 제 눈으로 그분들을 직접 봐야 합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하고 물으셨습니다.
이는 智에 이르는 시비지심(是非之心)이라 할 것입니다.
옳고 그름을 따져보는 것은 인간의 본성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옳고 그름을 따져보는 것을
늘 권장해야 하고 오늘 예수님은 이렇게 분명하게 옳고 그름을 판단하라고 묻고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이런 是非之心이 없는 상태에서 맹목적인 믿음은 곧 맹신이 될 것입니다.

맹신자는 오늘도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는 푯말을 들고 거리를 방황하고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들을 볼 때마다 과연 저들이 그리스도교를 전도하는 것인지,
아니면 예수님을 믿지 말라고 동네방네 소문을 내고 다니는지 분간조차 하지 못하겠습니다.
우리 천주교에는 이런 사람들이 없는 것을 정말 감사하고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 그리스도교의 위기를 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가톨릭의 본 고장 유럽의 어느 경우는 추기경님이 집전하는 성탄 전야미사에 신자가 50명도
안 된 상태에서 미사를 봉헌하는 경우도 있다는 전 바티간대사님의 글을 읽고 설마 하였으나 사실임을 알았습니다.

현대종교는 '왜'라는 물음에 이제 답변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라는 물음은 인간의 이런 시비지심에서 우러나오는 원초적인 것이므로 이제는 '믿음'과
'신비'만을 강조해서는 인간의 합리적 이성이 이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은“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 하시며
시비지심이 충만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므로 저는 이런 예수님을 닮고 싶습니다.

그들은 이 말씀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였다.' 하였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智에 굴복한 것이며 굴복하였으면 부끄러운 마음인 수오지심(羞惡之心)이
생겨나야 바른 인간입니다. 자신들의 기존 생각이 논리적으로 잘못된 것이 확실하다면
이를 반성하고 부끄럽게 여겨야 하는데 악심을 품는다면 이는 그 사람 마음속에 義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먼저 마음 속에 의로운 마음부터 키워야 합니다.

복음서에는 안식일에 대한 논쟁이 많이 나오지만 이는 하느님에 대한 禮에 관한 문제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하느님에 대한 진정한 '禮'인가를 알려주는 것으로 묵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찬미하며 제사를 드리는 것이 하느님에 대한 禮의 전부가 아니며 그보다는 불쌍한 이웃을 먼저 돕는 것이 하느님에게 참 '禮'를 드리는 것으로 말씀하십니다.

맹자는 사양지심(辭讓之心)으로 禮에 이르라 하였지만 이 또한 항시 그런 것은 아니며 자기가 해야 할 일은 義의 관점에서 판단하여 늘 겸손된 마음을 갖는 것이 사양이며  안식일(주일)은 다시 한 번 자신을 돌아보며 하느님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禮를 다하는 것이 참된 辭讓之心일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의 위대성을 우리 동양의 가르침을 통해 더 많이 느끼고 있습니다.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을, 그 당위성을 동양의 가르침으로 배워왔지만 실제 그런 인간의 모습을 예수님의 삶을 통하여 이를 확인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널리 알리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교가 새로운 활로를 찾는 길임을, 모든 말씀은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의 보통 사람들의 언어로 얼마든지 재해석이 가능하고 그 속에서 삶을 지혜를 배워 모든 사람들이 풍성한 삶을 살아 갈 수 있기를 소망하며 오늘 묵상을 마무리 합니다.

아빠 하느님!
성자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온전한 인간의 모습을 오늘도 저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저희도 그 가르침으로 '인, 의, 예, 지'의 온전한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불쌍히 여기는 마음.  부끄러워할 줄 아는 마음, 자신을 낮추는 사양하는 마음,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지혜의 씨앗을 오늘도 잘 가꾸며 살아갈 수 있도록 늘 영성이 충만한 삶이 되도록 성령으로 이끌어 주시옵소서!
성자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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