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나르시시즘이 무너지면 용심이 나온다
작성자김용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8-10-20 조회수903 추천수3 반대(0) 신고
어제 친구를 만나면서 평소에 내가 겪어오던 심적인 불편의 원인을 대충 알게 되었다.
아내와 나는 대화 중에 상대방에서 양식(良識)에 맞지 않은 말이 불쑥 튀어 나오면
아무 대꾸도 못하고 어안이 벙벙해지면서 기분이 상하는 상황을 워낙 많이 겪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전에서 나르시시즘(narcissism)을 찾아 보니
자기애(自己愛)라고도 하며 자신의 외모, 능력과 같은 어떤 이유를 들어
지나치게 자기 자신이 뛰어나다고 믿거나 아니면
지나치게 자신을 사랑하는 자기 중심성을 말한다.
정신분석학에서는 보통 인격적인 장애증상으로 본다.”고 되어 있었다.
 
20여 년 동안 임상 사회복지사이자 심리치료사로 일해 온
미국의 샌디 호치키스(Sandy Hotchkiss)가 그의 책 『사랑과 착취의 심리 』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많은 현대인이 인간 관계에서 느끼는 고통과 혼란의 밑바닥에는
나르시시즘이 있다.
자기를 세상에서 가장 특별하고 우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자기 자신밖에 보지 못하는 사람은 타인에게 언제나 특별한 사랑, 복종과 숭배를 요구한다.
그런 사람에게 휘말리면 인생이 고달파지기 마련이다.
물론 나르시시즘은 누구든 어느 정도까지는 갖고 있다.
더구나 나르시시즘은 자기 발전의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나르시시즘에는 건강한 나르시시즘과 건강하지 못한 나르시시즘이 있다.
건강한 나르시시즘은 긍정적인 자기 인식에 도움을 준다.
문제는 지나친 자기애로 인한 인격 장애로 불리는 건강하지 못한 나르시시즘이다.
 
그런 나르시시즘의 징후가 무엇일까?
뻔뻔함으로 위장되는 수치심, 나와 남의 경계를 함부로 침범하는 이기심,
타인을 무조건 깎아 내리는 오만함, 근거 없는 멸시로 나타나는 시기심,
현실을 왜곡하는 마법적 사고, 끝없는 착취, 제멋대로 자격 부여하기 등이다.
이런 특성 가운데 하나라도 심각한 수준으로 나타난다면,
그런 사람은 치명적인 나르시시스트라고 할 수 있다.
 
 또 그의 책 『나르시시즘의 심리학』에
《우리 안에는 잘나고 대단한 사람들이 권좌에서 흔들릴 때 고소해하는 어두운 면이 있다.
우리는 잘난 사람들의 결점과 불운을 좋아한다.
그로써 그 사람들도 우리와 그리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되기 때문이다.
자기애적 시기심은 우월해지고 싶다는 필사적인 욕구를 먹고 자라며, 매우 모호한 감정이다.
나르시시스트의 내면에서 진행되는 다른 여러 감정들이 그렇듯,
시기심도 무의식적이거나 의식되더라도 부인되기 십상이다.
바로 그 때문에 시기심은 더욱 위험하다.
나르시시즘에 빠진 개인들 자신은 시기심도, 우월성에 대한 욕구도 자각하지 못한 채
그저 독선적인 경멸감만을 느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증오의 또 다른 이름이다.》라는
대목(40쪽)이 나온다.
 
 나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나르시시즘이 무너지면
콤플렉스를 느끼게 되면서 용심으로 바뀌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나르시시즘과 콤플렉스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인가?
자기애로 자신을 높였으면 그 자기애가 무너질 때
추락하면서 콤플렉스로 바뀌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있다는 말이 생각난다.
언제나 공격 받을 수 있는 자기애 때문에 현실을 왜곡하기도 하고,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도 우월하다고 오만을 보이기도 하며
나보다 잘하는 사람을 경멸하지만
그 뒤에는 자신보다 강한 존재에 대한 용심이란 시퍼런 칼이 숨겨져 있는 것 같다.
 
나르시시스트와 가까운 인간관계로 얽힌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변덕스럽고 자기중심적인 그들 때문에 힘들어하게 마련인 것 같다.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은
“나르시시스트들은 남을 배려하거나 관계를 믿을 제대로 된 자아가 없어 
제 멋대로이지만 결코 자신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 줄 모르고
남의 기준에서 산다는 것이다.
자기애적 인격장애의 양면성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었다.
나르시시스트들은 분노를 제어할 전략을 개발하고는
상대방을 존중하는 척 해주고 자기가 주고 싶은 것만 주면서 결국은 손해를 보게 된다.
관계로부터 멀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기 말만 하고 남의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고작 한다는 소리는 “참 자아”가 아닌 “남의 기준”에서 하는 소리이다.
너무 비약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참 자아를 찾지 못한다는 것은 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증거이다
하느님의 말씀도 듣지 않으니 남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많은 사람들이 나르시시즘에 빠져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아내와 나는 이러한 나르시시스트들에게 손을 들고 말았다.
 
앨더스 헉슬리(Aldous Huxley)가 해답을 주었다.
그는 『루동의 악마들(The Devils of Loudon)』에서
남의 기준에 따라 사는 나르시시스트들의 종말과 이들을 대하는 사람들의 처신술을
다음과 같이 알려주고 있다.  
악에 너무 끈질기게 강렬하게 집착하게 되면 언제나 비참해진다.
자기 속에 있는 하느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들 속에 있는 악마에 대항해서 싸우는 사람은
세상을 개혁하는 일에 결코 성공하지 못한다.
잘 해야 현상 유지이고 잘못하면 전보다 상황이 악화될 수도 있다.
의도가 아무리 훌륭하다 할지라도 주로 생각하는 주제가 악이 된다면,
우리는 악의 경우들을 만들어 냄으로써
그 자체를 증명해 보이는 성향을 띠게 되고 말 것이다....
악 또는 악의 개념에 집중하고 영향 받지 않고
남아 있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느님을 위하기보다 악마를 대적하게 된다는 것, 그것은 엄청나게 위험한 일이다.
모든 개혁자들은 제정신을 잃어버리기 딱 알맞다.
그들은 자신들의 적(敵)의 것이라고 분별하곤 하는
그 사악함에 계속 영향을 받으며
어물어물하는 사이에 그들의 일부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언동이 나르시시스트들에게 자랑으로 비쳤다면
전적으로 그것은 내 잘못일 것이다.
 
내가자랑해야한다면나의약함을드러내는것들을자랑하렵니다.”(2코린토 11:30)
“누구든지 자랑하려거든 주님을 자랑하십시오.”(1코린토 1:31)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10:27-30)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