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여린 마음으로 인한 고통
작성자김용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8-10-15 조회수927 추천수0 반대(0) 신고
몇 년 전에 놀라운 통찰력을 가진 예수회의 신학자 버클리(Michael Buckley)가
막 부제품을 받은 부제(副祭)들에게 강론을 하였다.
그는 부제들에게 “사제가 될 수 있을 만큼 강한가?”하고 묻지 않고
“사제가 될 만큼 약하느냐?”하고 묻는 역설적인 강론을 하였다.
 
이 역설을 이해해야 한다.
그가 “연약함”을 말한 것은 이들 젊은 부제들(그리고 우리들)이
도덕적인 잘못이나 죄를 짓지 말고 성경에서 보는 예수님 같이 죄를 짓지 않고
매사(每事)에 “연약함 때문에 고통을 받는 모습”을 갖도록 당부하는 말이었다.
 
예수님은 얼마나 약하셨던가? 우리들은 예수님의 연약함의 깊은 의미를 알고 있는가?
 
 버클리는 인간의 우월성이라는 면에서(가끔 우리들이 자만에 빠지는 것처럼),
예수님과 소크라테스를 비교하여 이를 설명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비교하였다.
 
사람들은 예수님과 소크라테스와 같은 시대의 철학을 토대로
그리스도와 소크라테스를 비교하여 어느 분이 더 훌륭한가를 판단하였다.
소크라테스는 조용히 사약(賜藥)을 받고 죽었다.
그는 법정의 판결을 받아 들이고 죽음과 영원한 생명의 의미에 대하여
변증법적으로 말한 뒤 죽음을 두려워할 아무 이유가 없음을 알고 독약을 마시고 죽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얼마나 다른가?
예수님께서는 이성을 잃으실 정도로 무서워하시고 두려워하셨다.
“눈물을 흘리시고 큰 소리로 우시면서
당신을 죽음에서 구원해주실 수 있는 아버지께 매달렸다.
예수님께서는 위안을 받기 위하여 자꾸 당신의 친구들을 보시고
죽음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기도하셨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드디어 안정을 찾으시고 조용히 죽음을 맞으면서
그리하여 외롭게 외톨이가 되면서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는 듯한, 신성이 감추어진 무서운 내적인 고통을 겪으셨다.
 
 나는 한 때 소크라테스와 예수님이 다른 죽음을 맞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즉 한 분은 더욱더 두려워하며 십자가 위에서 고통을 받고 괴로워하면서 죽었고
또 한 분은 아무런 고통 없이 조용히 독약을 받아 마셨다.
이러한 생각이 맞을 수도 있지만
이제는 이러한 생각이 피상적으로 본 결과이며 부차적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예수님께서 소크라테스보다 더 유약하시고 육체적인 고통에 더 민감하시고
인간의 배신과 경멸에 더 예민하시고 사랑과 증오에 더 많은 영향을 받으셨다고 믿는다.
소크라테스는 울면서 아테네를 지나가지 않았다. 
소크라테스는 결코 친구들의 배반 때문에 슬퍼하지 않고 괴로워하지도 않았다.
그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으며 침착하게 정의는 결코 죽지 않는다고 믿었다.
이 때문에 지금까지 살았던 인간 중에서 가장 위대한 영웅이 되었으며
사람들이 귀감으로 생각하고 따르는 철학자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또 소크라테스와 똑같은 이유 때문에
나자렛의 예수님은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을 겪으시고
신비롭게 보이셨던 구원자이신 한 사제(司祭)가 되셨다고 생각한다.
 
예수님은 이렇게 민감하고 사랑에 약하셨기 때문에
당신을 고통으로부터 보호하지 못하셨다.
너무나 인간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기쁨과 고통을 함께 느끼셨다.
민감한 사람은 민감하기 때문에 쉽게 상처를 받으며
그 고통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지 못할뿐더러
사랑하는 사람들과 세상 사람들과 고통을 함께 한다.
더블린 태생의 작가며 철학자였던 머독(Iris Murdoch, 1919-1999)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비록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시면서 돌아가셨지만 평범한 병사는 두려움 없이 죽는다.
결코 이상한 말이 아니다. 민감하면 고통에 열려 있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둔감할 때에는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을 받는 말든 숙면을 취한다.
또 우리들이 둔감할 때에는 덜 두려워하게 되며
그리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많이 입힐 때가 많다.
또 우리들이 둔감할 때에는 자신의 고통과 굴욕을 못 느끼기 때문에 더 강해진다.
운동장에서 경기 중에 세게 부딪혀도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는 선수를 보고 칭찬한다.
강하고 거친 것은 칭찬할만하다. 그러나 영혼의 면에서는 그렇지 않다.
 
 신비주의자면서 위대한 치유사인 십자가의 성 요한은
우리들이 그리스도를 본받아 바른 길을 가고 있는지를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곧잘 던졌다.
“우리는 얼마나 쉽게 상처를 받고 연약한가?
그리스도를 본받으려고 애쓸 수록 바른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우리들이 그렇게 하고 있는지 자기 자신을 속이고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십자가의 성 요한은 이렇게 답하였다.
우리들이 살면서 느끼는 것을 보고
그리스도를 닮으려고 하는지 자신의 욕망을 합리화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내가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본받고 있다면
예수님께서 연약하심을 보이셨듯이
어떤 고통에 대하여 자신을 보호하려고 하지 않게 된다.
내가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본받고 있으면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육체적인 고통이나 피곤함을 더 많이 느끼고
인간의 배신과 경멸에 더 민감하고 사랑과 증오에 더 영향을 많이 받고
시국(時局)을 보고 더 괴로워하게 되며 더욱더 노력하게 되고 더욱더 굴욕을 느끼게 된다.
 
 적절히 민감하게 되면 마음을 비우게 되고 유약한 채로 내버려 두게 된다.
설령 이렇게 하여 웃는 얼굴을 보이지 않게 되어도 그렇게 해야 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은 항상 웃는 얼굴을 보이지 않는 사람이다.
지금 사랑하는 사람들이 울고 있는데 어떻게 웃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
(롤하이저 신부님의 강론을 편집)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