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상처 받은 아이의 치유
작성자김용대 쪽지 캡슐 작성일2010-02-07 조회수471 추천수2 반대(0) 신고
예수님께서 겐네사렛 호숫가에 서 계시고, 군중은 그분께 몰려들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을 때였다. 그분께서는 호숫가에 대어 놓은 배 두 척을 보셨다. 어부들은 거기에서 내려 그물을 씻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그 두 배 가운데 시몬의 배에 오르시어, 그에게 뭍에서 조금 저어 나가 달라고 부탁하신 다음, 그 배에 앉으시어 군중을 가르치셨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시몬이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자, 그들은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다. 그래서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고 하였다. 동료들이 와서 고기를 두 배에 가득 채우니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다.
시몬 베드로가 그것을 보고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말하였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사실 베드로도, 그와 함께 있던 이들도 모두 자기들이 잡은 그 많은 고기를 보고 몹시 놀랐던 것이다. 시몬의 동업자인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도 그러하였다.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루카 5:1-11)
 
76개 대학의 3000명의 학생들과 대화를 하는 위성 TV강의를 진행했던 앤소니 드 멜로(Anthony de Mello)신부는 인도의 뭄바이(Mumbai) 근처에서 자랐다. 고등학교 시절인 어느날 학교에서 돌아와 그의 아버지에게 신부가 되고 싶다고 말하자, 그의 아버지가 말했다. “너는 내 유일한 아들이다. 너는 가문의 대를 이어가야 한다.”
어머니가 14 년동안 아이가 없다가 임신을 하여 출산을 하자, 4마일 거리를 맨 발로 병원으로 뛰어가서 숨을 헐떡거리면서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들인가요 딸인가요?” 아버지가 말했다. “네가 형이 되었단다.” 안소니 드 멜로가 말했다.
“와, 정말 잘 됐군요. 이제 저가 신부가 될 수 있겠네요.”
 
여기서 나는 얼마나 주님을 본 받고 살고 있나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주님을 본 받고 사는 사람은 모두 제자이지만 나는 사제는 아니다. 물론 복음에서 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생업을 버리고 예수님을 본 받고 사는 것을 말하지는 않는다.” 쟁기를 잡고 자꾸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뜻이다. 속(俗)에서 성(聖)의 삶을 살아라는 뜻이다.
 
에릭슨(Erikson)의 심리, 사회적 발달이론에 따르면 우리 모두는 각자의 어린 시절의 여러 발달시기에 따라 단계적으로 받아들여져야만 했던 지극히 정상적이며 당연한, 의존적이며 발전적인 욕구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의존적인 욕구들이 충분히 채워지지 못 했을 때,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처 입은 내면 아이(wounded inner child)’로 어른이 된다. 이렇게 어린 시절에 아이로서 당연히 경험하고 받아 보았어야 할 신뢰와 안전한 환경, 사랑과 관심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상처 입은 내면 아이를 가슴에 품은 채로 겉만 성장한 성인 즉 ‘성인 아이(adult child)’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학교 의과대학의 교수이며 미국 정신신경의학회의 전문의인 미실다인(W. Hugh Missildine) 박사의 저서 『몸에 밴 어린 시절』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완벽주의자에게 불가능한 것이 있다면 바로 휴식이다... 그래서 자기에게 필요한 것 이상으로 또는 인간으로서 감당할 수 있는 조건 이상으로 자신을 몰아붙인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기에 그들은 그러한 자신의 태도에 대해 일반적인 기준이 자신에게 적용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한다고 변명한다.
나 역시 민망하게도 어떻게 쉬어야 하는지를 모른다. 내게 휴식이란 심적 휴식을 의미하지, 육적 휴식을 의미하지 않는다. 방에 누워 TV를 시청하는 것은 휴식이 아닌 게으름으로 인식된다. 다른 이는 허용할지 몰라도, 내 자신에게는 한심함으로 다가온다.
위 문장에서 말하는 ‘일반적인 기준’은 그게 무엇인지 모른다. 다만 다른 이에게는 그럴 수도 있지 하고 생각하는 게 많은 반면, 내게는 해야할 것들만 남아있다.”(p.121)
  미실다인 박사에 따르면 우리의 마음 안에는 두 개의 자아(自我)가 있는데, 하나는 부모의 생각과 태도와 행동을 닮은 내면부모(inner parents)이고, 다른 하나는 부모의 양육태도에 대한 우리의 반응으로 형성된 내면아이(inner child)이다. 완벽주의 부모의 양육을 받으며 자란 사람의 내면에는 또 하나의 자아 즉 인정받지 못한 내면 아이가 있다. 완벽주의 양육태도는 자녀의 마음 속에 인정받지 못한 내면아이를 만들어 낸다. 인정받지 못한 내면아이의 특징과 역할은 무엇인가? 칭찬과 인정에 목말라 하며 매우 집착한다.
왜냐하면 어려서부터 칭찬과 인정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완벽주의는 지나치게 꼼꼼하고 철저하며 결코 실수를 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말한다.
자기 자신은 물론 타인에 대한 기대와 기준이 매우 높기 때문에 특별히 잘 한 경우가 아니면 마음에 차지 않는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실수없이 잘 하려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태도와 행동이 인간관계를 파괴하고 자기의 행복을 방해할 만큼 지나치다는 것이 문제다. 완벽주의 성향을 지닌 부모는 자녀를 양육할 때에 완벽주의 태도를 나타낸다.
 
나는 완벽주의자인 선친(先親)으로부터 완벽주의를 강요받았고 또 나의 자식들에게도 꼭 같이 완벽주의를 강요했다. 그 결과 아들이 지나치게 ‘일 중독’에 빠져 있다.
그것만은 나에게 배우지 않았으면 좋았겠지만 나보다 더 심한 것 같다. 마음이 무척 무겁다.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본 받아 살아야 하는데 그렇게 살지 못한 과거가 안타깝기만 하다. 완벽주의 안에 ‘참 사랑’이 없었던 것이다. 나의 판박이를 강요하면서 자식을 키웠던 셈이다.  
 
그러나 앤소니 드 멜로 신부는 ‘성인 아이’가 되지 않고 주님의 참된 제자가 되었다. 아들의 뜻을 존중해준 결과이다. 안소니 드 멜로 신부는 “내 안에는 인정과 사랑을 받고 싶은 욕구만이 아니라 오히려 인정하고 사랑해 주고 싶은 욕구도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다른 사람을 인정하고 사랑하는 것은 또 하나의 욕구로서 우리 안에 존재하며, 그 욕구를 충족하며 사는 것은 무엇보다도 인정받지 못한 내면아이를 치유하는 과정이 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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