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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8월 31일 야곱의 우물- 마태 16, 21-27/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작성자권수현 쪽지 캡슐 작성일2008-08-31 조회수470 추천수3 반대(0) 신고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
(마태 16,21-­27)
 
 
 
 
진정 하느님의 신비와 예수님의 신비에 부합하는 믿음을 고백한 베드로는 예수님께 최고의 칭찬과 사명을 받건만, 이제는 정반대의 상황을 맞게 됩니다. 이러한 대조법은 마태오가 좋아하는 서술 양식입니다.
 
‘그때부터’(21절)로 시작하는 이 대목은 새로운 전환기를 표시합니다. 갈릴래아의 사명을 완수하신 예수님은 고난과 죽음과 부활이 일어날 예루살렘을 향해 떠나야 합니다. 앞으로 여러 차례 고난을 예고하실 텐데 이 대목이 그 첫 번째 예고입니다.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21절) ‘고난을 받는다.’는 말씀은 예수님 자신이 받아들이셨고 지금 제자들에게 보여주시며 드러내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계획을 두고 하는 말씀입니다.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앞으로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책임자들입니다. ‘사흗날에 되살아나신다.’는 말은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인 듯합니다(1코린 15,4 참조). 일찍부터 그들은 종말에 의인들이 부활하리라는 것을 예언서에서 읽어 알고 있던 터입니다. “이틀 뒤에 우리를 살려주시고 사흘째 되는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어 우리가 그분 앞에 살게 되리라.”(호세 6,2)

 
모든 노력이 죽음으로 끝나버릴 수 있을까? 베드로는 고난과 죽음을 거쳐야 한다는 말에 강하게 반발합니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22ㄴ절) 승리의 월계관을 기대했던 베드로한테는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환상에 사로잡힌 그의 발언은 예수님 가시는 길을 가로막는 걸림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호통을 치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23ㄴ절) 베드로는 자기 신앙을 말할 줄은 알았으나 아직 하느님의 관점을 따르지는 못했습니다. 인간적 사고를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사명에 적대적인 사탄으로까지 불립니다.

 
예수님 추종의 신비를 보여주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24ㄴ절) 고통은 신앙인을 유혹하는 장애물이지만 아무도 죽음을 피할 수 없듯 고통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자기중심적인 성향을 버리는 것입니다. 앞서 베드로가 섣불리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거부했던 것에 견주어 볼 수 있습니다. 항상 잘되고 행복하려고 하느님을 이용해서는 안 됩니다. 오직 자기밖에 모르고 하느님까지 자신을 위해 끌어내리려는 이기적인 성향과 내적인 거리를 두어야 합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간다.’는 것은 하느님을 소유하려 들지 않고 하느님을 하느님이도록 두면서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이 말씀은 금욕적인 말씀이 아니라 신비적인 말씀입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25절) 예수님 생애 말기쯤에는 종교계 지도자들 사이에서 예수님을 처단하려는 움직임이 여기저기서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역설적인 답변이십니다. 일시적인 목숨에 연연해한다면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을 잃을 것이요,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는다면 영원한 생명을 차지할 것이라는`…. 자기 자신을 존재의 중심으로 여기는 사람은 이미 자신을 잃은 것이고, 그리스도를 따라 사는 사람은 실패한 인생인 듯 보여도 오히려 그것이 자기를 지키는 길입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26절) 온 세상을 다 얻었다 하여도 인간의 삶이란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사람을 결코 구원할 수 없으며 하느님께 제 몸값을 치를 수도 없다.”(시편 49,8)는 말씀을 두고 한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고난 받는 예수님의 나약한 모습을 보고 떠나겠지만, 굴욕의 길 끝에는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27절) 오실 것입니다.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27절) 심은 것은 거둘 것이고 처신한 것에 따라 상벌을 받을 것입니다. 어떤 제자들은 살아서 하느님의 나라를 볼 것입니다(28절).

 
베드로가 고백한 그리스도는 정작 고난을 당하고 죽었다가 다시 부활하는 그리스도이십니다. 별난 기적을 행하거나 용한 예언자로 소문만 요란한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예수님은 고난의 길을 걸어가는 하느님의 아들로 인정받길 원하셨습니다. 위대한 고백을 한 베드로도 사람의 일만 생각하다 예수님께 혼쭐이 납니다. 한순간에 성인에서 그리스도의 사명에 적대적인 사탄으로 몰락합니다. 하느님을 섬긴다면서 변덕스런 만족을 채우려 하는 우리도 예수님의 매몰찬 질책을 들을 것입니다. 양다리를 걸칠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예수님을 알아보고 고백하는 것뿐 아니라 자기가 선택한 길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삶의 무게를 짊어진 채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정한 하느님 체험은 자신을 떨쳐버릴 때 이루어집니다. 나약한 자신을 하느님께 내드림으로써 약한 마음이 강해지고 넓어집니다.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는 사람은 실패를 통해 승리를 체험할 것입니다. 그 승리는 내가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결코 구원할 수 없으며 하느님께 제 몸값을 치를 수도 없다.”(시편 49,8) ●
강지숙(한님성서연구소 수석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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