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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오늘의 ‘혼인 잔치의 비유(성거산지기신부님 연중28주 강론)
작성자김시원 쪽지 캡슐 작성일2008-10-17 조회수650 추천수3 반대(0) 신고
 
 
성거산지기 신부님 그림 작품
 
순교자들
Oil on Canvas, 60.6X72.7cm 2001
 
 
 

오늘의 ‘혼인 잔치의 비유’(마태 22, 1-14)


임금님이 자기 혼인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임금은 왕가에 어울리도록 많은 짐승을 잡아 훌륭한 음식을 진수성찬으로 장만 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왕가이니까 종들도 많았을 것이고, 임금의 잔치자리에 초대된 이들은 지위 있는 관원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그들은 이 명예로운 초대를 거부하였습니다. 더구나 그 이유조차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 무례한 태도는 임금을 모욕하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임금은 모욕을 받고도 별로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 것 같이 보입니다. 무례한 초대 손님에게 임금은 다시 한 번 초대하기 위해 종을 보냅니다. 놀라운 것은 초청받은 사람들은 임금의 초대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도 임금의 아들 혼인잔치의 날에는 다른 일정을 세우지 않았을 것이고, 또 이미 초대의 통지는 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은 밭으로 가고, 어떤 사람은 장사하러 갔습니다. 이러한 처사는 임금에 대한 모욕을 한층 더 고조 시켰을 것입니다. 그들의 무례한 행동은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보낸 종들을 잡아서 창피를 주고 그리고 죽여 버렸습니다. 심부름을 한 자에게 보여준 모욕은 임금 자신에게 모욕을 준 것과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임금의 노여움은 당연하겠지요.

살인자인 초청받은 사람은 임금의 군대에게 죽음을 당하고, 도시를 불태워 버리는 등 벌을 받았습니다.


임금의 분노의 결과는 또 있었습니다.

임금의 초대를 무례하게 거절해 버린 사람들 대신, 천한 계층의 사람들이 초청을 받습니다.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청해 오너라."  전번의 초청과는 달리 지위나 신분에는 상관없이 만나는 사람은 모두 초대를 받습니다. 명령을 받은 종들은 만나는 대로 사람들을 데려 왔습니다. 그 중에는 악인도 섞여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에게 경각심을 주는 것은 높은 지위의 초대객을 두번이나 초대를 거절하였기 때문에 평민들 중에서 새로운 사람들이 초대를 받게 된다는 점입니다.

똑같이 예수님을 통하여 하늘나라의 잔치에 초청하신 하느님의 목소리를 거절한 예루살렘의 지도 계급은 버림을 받고, 아무 지위도 없는 사람들이 그들 대신에 초청을 받습니다.

이 무서운 선언은 오만하고 교만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결과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를 입는 것입니다. 즉 "낡은 사람"과 그 소행을 벗어 버리고 "새로운 사람"을 입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내가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 신자라 해서, 부르심을 받은 자라고 해서 모두 뽑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밭에는 가라지와 좋은 보리가 있습니다. 그물 안에는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가 서로 뒤 섞여 있습니다.

교회의 일원이라고 해서 , 곧 잔치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에 해당하는 자격을 가지고서야만 들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지만 뽑히는 사람은 적다."

구원받는 사람이란 대체 얼마 정도나 될까? 그것은 아버지의 뜻에만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대답하십니다.    "그 문은 좁다" 라고........

 

 

(성거산지기 신부님 연중28주 강론)

http://cafe.daum.net/sgm2008 성거산 성지 카페에서


 

 

 천안 성거산(聖居山) 교우촌과 순교자 묘지 약술안내(略述 案內)

경기도와 충청북도 경계선에 자리 잡고 있는 성거산 성지는 한국의 성지 중에도 보기 드문 해발 579미

터로 차령산맥 줄기의 높은 고지대에 위치하고 있어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고 있는 천연(天然)성지이다. 특히 봄, 가을에는 들꽃과 단풍으로 여름과 겨울에는 울창한 숲과 환상적인 눈(雪) 경치로 장관을 이루어 찾아온 순례자들은 감탄을 하곤 한다. 이곳 성거산 성지는 3가지로 약술(略述)하여 소개 할 수 있다.

성거산 성지는 박해시기에 마을에서 살 수 없었던 신자들의 이주 현상이 일어나면서 형성된 교우촌과 이 교우촌에서 사목 및 활동하셨던 선교사들 그리고 교우촌에 살던 신자들이 잡혀 순교하신 순교자들을 소개 할 수 있다.

성거산에 형성된 교우촌들

1801년 신유박해 이후의 이주기(移住期)에 형성된 성거산 소학골 교우촌과 1830년대에 형성된 서들골(일명 서덜골) 교우촌은 박해시 선교사들과 신자들의 피신처요 은신처였다. 특히 소학골은 한 때 칼래 신부님의 사목 중심지로 삼아 활동하기도 하였던 곳이기도 하며. 서들골 교우촌은 최양업 신부님의 큰 아버님인 최영렬씨가 1827년 고향 청양 다락골을 떠나 서울 낙동으로 이주해 살다가 다시 목천 서들골로 이주하여 살았고, 1839년의 기해박해 직후 최양업 신부님의 둘째 동생인 최선정(안드레아)가 백부 최영렬의 집으로 보내져 이곳에서 잠시 성장 하였던 곳이기도 하다. 이 교우촌을 중심으로 병인박해 이후부터 계속 생겨난 교우촌들은 점점 통 폐합 되었다가 1920년에 와서는 7개의 교우촌이 모두 사라지게 된다.

박해시 교우촌에서 사목활동을 하셨던 선교사들 

1845년 한국인 사제와 프랑스 선교사들이 조선에 입국한 이후 박해시기인 1851년부터 1861년 10월까지 이 곳 교우촌에 순방하고 관련을 맺었던 한국인 사제와 프랑스 선교사를 보면 최양업 신부와 다블뤼 신부, 페롱신부, 권스타니슬라오 신부, 프티니 콜라 신부 등이 사목방문을 하였고, 1861-1866년 10월까지 이어서 조안노 신부, 페롱신부, 칼래 신부 등이 사목방문 및 활동을 하였다. 특히 칼래 신부님은 1864-1866년 10월까지 소학골 교우촌을 사목 중심지로 삼았다.

병인박해의 목천 순교사들

또한 병인박해의 목천 순교사를 보면 1866년 10월(음력) 소학골과 서들골, 주위의 교우촌이 발각이 되기 시작하면서 계속 포졸들이 덮쳐 이 곳 에 거주하던 신자들이 잡혀 모두 23명이나 순교하게 되었다. 소학골 교우촌 9명, 서들골 교우촌 4명, 복구정 교우촌 2명, 베장골 2명, 장자동 4명, 공심리 1명, 목천 1명 모두 23명이나 된다. 이들은 서울 좌포도청(11명), 공주감영(6명), 청주(2명), 죽산(3명), 미상(未詳 1명)에서 순교하였다. 현재 병인년 10월 소학골에서 체포되어 공주 감영에서 순교 한 배문호(베드로)와 최천여(베드로). 최종여(나자로). 고요셉과 최씨 며느리 등 5명의 시신만이 성거산 성지 제1줄 무덤에 묻혀 있다. 이 이외도 순교자들의 시신을 현재 이 곳 성지에 이전(移轉)한 여섯분들의 증언과 순교자들 후손들의 구전으로 전해 오는 이야기에는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이 이 곳에 묻혀 계신다고 한다. 하느님과 진리를 위해 생명을 바쳐 증거한 장한 순교자님들은 그 동안 오랫동안 오고가는 사람 없이 들꽃들과 벌, 나비, 짐승들만이 함께 했던 성거산성지의 교우촌과 무명 순교자 묘소는 침묵의 역사 속에 숨겨져 있었다. 이제는 신앙인의 순례의 선교지가 되고 있다. 달이 바뀔 때마다 주위에 아름답게 피어나는 야생화는 마치 우리 순교자들과 신앙의 선조들이 하느님과 신앙 때문에 흘린 피를 상징하듯이 오는 순례자들을 반기고 있다.

1) 성거산 자락의 교우촌들(1800년부터 1920년까지 무려 7개의 교우촌 형성)

① 소학골 교우촌(현 천안시 목천읍 납안리 )

성거산 자락의 대표적인 교우촌으로 동쪽자락에 위치해 있고, 목천읍 석천리의 산방이와 먹방이를 통해 서로 연결되어 있다.

성거산 교우촌의 이름이 교회사의 기록에 나타난 것은 1839년 기해박해 직후였다.

그러나 소학골은 1800년 초 신유박해 이후 신자들이 하나 둘 이주해와 정착하였다. 처음부터 정주형 교우촌이자 신자 공동체 형으로 정착하였다. 이 공동체는 전교 자유기까지 변함없이 신앙공동체 유지되어 왔다.

② 서덕골(서들골) 교우촌: (현 천안시 목천읍 송전리의 서덕동)

성거산 남서쪽 자락에 위치한 서들골은 1830년 초부터 알려져 왔다.

기록에 나타난 것을 보면 최양업(토마) 신부의 백부 최영렬이 1827년 무렵 고향 다락골(현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의 다래골)을 떠나 서울 낙동으로 이주해 살다가 다시 목천 서들골로 이주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 직후 최양업 신부 둘째 아우인 최선정 (안드레아)이 목천 서들골의 백부 최영렬의 집으로 보내져 그곳에서 성장하게 되었다. 최양업 신부의 첫째 아우인 최의정(야고보)가 겨우 13살로 부친 최경환(프란치스코)과 모친 이성례(마리아)가 모두 순교하면서 어린 동생들의 양육을 담당할 수 없게 되자 모두 친척으로 보냈다고 한다. 이후 성거산 교우촌은 오랫동안 교회사에 서 그 이름을 감추게 되는데 그 이유는 소학골이나 서들골 두 마을 모두 외딴 산간 지대에 위치에 있었다는 점도 있지만, 이보다 비밀 공동체가 철저하게 유지해 왔기 때문이다.

    병인박해이후 1920년까지 성거산뜨락 주위에 형성된 교우촌들 

    ◈ 먹방이 교우촌(1884년, 두세신부) 공소 신자수가 128명; 현 목천면 석천리)
    ◈ 매일골 교우촌(1895년, 퀴를리에 신부; 현 목천면 송출리)
    ◈ 사리목 교우촌(1901년, 드비즈)
    ◈ 석천리 교우촌(1913년, 공베드로 신부); 112명(현 목천면 석천리)수
    ◈ 도촌 교우촌(1919년, 공베드로 신부); 110명(현 북면 납안리)
    ◈ 납안리 교우촌(1920년, 공베드로 신부) 5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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